< 수확관(3) >
구오오오-
괴수의 포효와도 같은 괴음이 일었다. 땅의 울림 소리였다.
쩌적.
쩌저적.
갈라지는 대지.
처음에는 유리잔에 금이 간 것 같은 그저 미세한 균열에 불과했다.
허나, 채 1초가 지나지 않아 여파는 것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어 갔다.
아무리 스텟이 높은 알비론이라고 하지만 대응할 수는 없었다.
딛을 장소가 너무도 부족한 탓!
-키에에엑!
무저갱 속으로 사라지는 알비론.
그사이 팀원들은 곧게 뻗은 길을 달려 나갔다.
그들이 걷는 길만은 마치 손이 타지 않은 새 옷처럼 무척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키아아악!
주위에 있던 알비론들은 살기위해, 팀원을 잡기위해 달려들었다. 하늘을 까마득히 메운 알비론들의 육신.
혼종도 지지 않고 도약해왔다.
“젠장! 쏴! 쏴! 마구 쏴! 전부 떨어뜨려!”
“으아아아!”
생존자들은 마지막 남은 마력을 쏟아 미친 듯이 스킬을 퍼부었다.
퍼버버벙!
요격.
그러나 전부 막아낼 수 있을 만큼 알비론들의 수는 적지 않았다.
그때 유세현이 살짝 손을 들어올렸다.
스스로의 몸을 탄환으로 하여 알비론들을 추락시키는 구울들!
어차피 오래 상태를 유지할 수 없기에 퍼부은 것이었다.
구울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루시아가 방어 스킬을 사용했다.
순식간에 퍼져나가 일행들을 감싸는 둥그런 막.
고유특성을 담은 루시아의 방어결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
수십 개의 강철을 겹겹이 덧대어 놓은 듯한 느낌.
공격에 실패한 알비론들은 그대로 쭉 미끄러져 갈라진 틈 사이로 사라져 갔다.
일부는 안간힘으로 버티며 그 날카로운 팔을 열심히 휘둘렀으나 흠집도 나지 않았다.
레피아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현재 그녀의 눈은 되살아나 길을 뚫고 있는 레브레스를 향해있었다.
정말 기이하면서도 대단하기 짝이 없는 능력.
그녀와 조우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스킬이었지만, 레피아는 오늘까지만 해도 유세현이 이런 스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의뢰를 받아 유세현 일행을 습격할 당시에는 좀비들을 보지 못했고, 그 이후로는 산하로 들어가 실버어레스트를 깨부술 때 딱 한 번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유세현의 팀도 아니었을 뿐더러 힘의 격차가 너
무 나서 스킬 자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실종.
아는 것은 그가 천마신공이라는 무공을 전수 받았다는 것뿐이었는데, 이제는 이강호가 본인 스스로보다도 유세현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레피아는 그런 면에서 의문이 들었다.
‘왜 스텟이 이렇게 낮은 거지?’
유세현은 원래부터 자신보다도 강했다. 그리고 남들은 가질 수 없는 대단한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재의 속도로 보건데 그의 스텟 자체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아니, 높긴 높았지만 훨씬 기대이하다.
아무리 스텟을 올리기 힘들다지만,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게 있는데 적어도 자신보다는 높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것을 토대로 시선을 끌어주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내린 것인데.
‘분명 서쪽에서 있었다고 했지...’
그러고 보면, 유세현의 팀원들도 어딘가 이상하다.
수준이 낮은 것은 결코 아니다.
거의 완벽에 달하는 연계 플레이와 상호보완 작용.
지니고 있는 스킬도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나 방금 전의 대지진은 여태까지 레피아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그리고 마법의 선두자인 이벨린도 이런 마법은 사용하지 못한다.
‘저 백발 여자의 방어 스킬도 대단했고.’
하지만 현재 그들 또한 스텟이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사람들의 입에서 연신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이전에 비해 체력 스텟이 많이 오른 팀원들이었지만, 그들은 현재 완전 죽을 맛이었다.
입에서 풍기는 단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심장과 폐.
끝없는 전투로 인해 온 근육이 지끈거린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평불만 하나 하지 않았다.
멈추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에.
우여곡절 끝에 알비론의 추적에서 간신히 벗어난 인원들은 피해상황부터 살폈다.
최대한 수확관을 빠르게 처리한 덕에 부상자는 제법 되었지만 다행이도 사망자는 없었다.
전멸까지 고려했었던 레피아의 예상과는 정반대의 결과.
주위를 쭉 둘러본 레피아가 유세현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플로라에게 대략적인 상황은 들었지?”
“예.”
유세현이 답하기 무섭게 집중되는 이목.
그녀를 정보제공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건 같이 도망칠 때부터 예상되었던 바였으니까.
그들이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지금까지 그들을 이끌어준 남자, 유세현의 정체.
이 대화에 집중하면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레피아가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추가로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까 잘 새겨들...”
“아니, 그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말을 자르자, 레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제 동생 혜인이는 어떻게 됐나요? 무사한 거죠?”
“......”
레피아의 입이 한순간 꾹 닫혔다.
마지막에 말해주려고 했던 건데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다니.
“아마, 무사 할 거야.”
“추측인가요?”
“응. 본의 아니게 갈라지게 됐거든...”
“......”
“아무튼 이 이야기는 마지막에 계속 이어서 하기로 하고, 일단은 전체적인 설명부터 해줄게. 네가 지금 알고 있는 건 빙산의 일각이니까. 거기 당신들도 잘 새겨들을 수 있도록.”
팀원들을 가리킨 레피아는 주위를 의식해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알베타스의 습격.
놈들은 분명 강한 종족이긴 하나 그들 하나 만으로 인간진형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무림인들과 아르카드 제국의 정예병들은 무척 강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건 몬스터들 때문이야.”
“몬스터...말인가요?”
“그래.”
그녀가 몬스터라고 부르는 것들은 유세현이 생각하고 있던 일반적인 마수 같은 것이 아니었다.
트롤과 오우거 등등 과거 알테리아 대륙에서 몬스터라고 불린 종족들.
“놈들이 단합해서 쳐들어왔어.”
“.......”
물량의 향연과도 같아 강자들이 커버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유세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강호는 이종족들의 단합에 대한 것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가 알고 있었다면 갑작스럽게 등장한 알베타스야 그렇다 쳐도 몬스터들 건 또한 마크때처럼 미리 방비를 해놨을 터였다.
즉 이것 또한 예기치 못한 변수라는 것인데...
“이유는 나도 몰라. 그리고 전조 현상 같은 것도 없었어.”
“......”
“아무튼 나는 그때 알베타스 놈들을 상대하기위해 아래로 급파되어 있었어. 그리고 얼마 안가 놈들에게 북쪽과 이어주는 길목 3군데를 전부 먹혔지.”
그것으로 연락 두절.
유세현이 조심히 입을 뗐다.
“그래서 알 수 없다고...”
“응...그런데 아마 정말로 괜찮을 거야. 그때 혜인이는 이태광의 진형에 머무르고 있었거든. 이태광 성격은 네가 더 잘 알지?”
“아...”
유세현은 이태광이 언급되자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진즉 그를 언급했다면 초조하게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 것이다.
“강호와 주희도 전부 위에 있는 건가요? 플로라씨께서 다음에 만나면 강호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고 했었는데.”
“아...그거? 그건 그냥 너 살아남으라고 내뱉은 이야기 같은데?”
“......”
“야야, 그런 표정마라. 플로라는 나름대로 너 신경 써 준거니까.”
그렇게 말하면 딱히 또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끝마쳐진 이야기.
장내에 무거우면서도 냉랭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내 팀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깊은 한숨.
“여기도 미쳤네.”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하고 오긴 했다.
그런데 이건 심각한 수준을 떠나서 거의 묵사발이 난 수준이었다.
물론, 상황이야 서쪽대륙보다는 좋았다. 이곳은 적어도 대치할 수 있는 인원들이 동쪽에 주둔하고 있다니까.
문제는 평균 수준이 다르다는 것.
마크인들은 이제 막 활동하기 시작한 종족이고, 알베타스는 이미 수많은 종족을 쓰러뜨리고 파편을 얻은 종족이었다.
유세현은 어떻게 해야 될지 고민에 빠졌다.
언데드 군단을 늘려, 미끼로 사용하며 북쪽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잘만 하면 이강호가 있는 곳까지 어찌어찌 다다르리라.
허나, 이것은 리스크가 너무 크다.
또한 무작정 합류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레피아보다도 스텟이 낮으니까.
‘역시 동쪽으로 가는 게 맞겠다.’
가서 직접 확인한다.
그자들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만한 힘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을 정리한 유세현이 공복을 없애기 위해 나무열매를 먹으려던 순간이었다.
레피아가 무엇인가를 쓰윽 내밀었다.
육포였다.
“먹을래?”
굳이 사양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유세현은 받아들었다.
레피아가 말을 이었다.
“유세현, 난 이제 좀 너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솔직히 말해봐. 너 드래곤과 싸운 이후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스텟이 왜 그 모양이야?”
“...그건...”
별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내려던 유세현의 시야에 팀원들의 얼굴이 비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똘망똘망하게 변해있었다.
어지간히도 궁금했던 인원들.
카텐은 이미 맨 앞자리에 앉아 경청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2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마검.
그리고 그것의 본주인.
과연 어떤 이야기가 튀어나올 것인가.
그 태도에 살짝 어이가 없어져 실소를 내뱉은 유세현이 이야기를 시작하자, 듣기 시작한 팀원들의 표정이 빠르게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 * *
“그럼 이 인원들이 구름섬에서 나온 지 1년도 안 된 사람들이라는 거야?”
“예.”
“허...”
레피아가 혀를 찼다.
실로 엄청난 성장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보통의 사람보다도 훨씬 많은 전투를 치렀다는 것인데...
과연 얼마나 많은 인원들이 죽어나갔을지 이미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대략 상상이 갔다.
한편, 팀원들 또한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꺼번에 풀린 모든 의문.
“아...그래서 처음부터 그렇게 강하셨던 거였구나...”
“그러게...진짜 설마 설마 혹시나 했긴 했는데...”
그야말로 컬쳐 쇼크였다.
오크 놈들이 강해진 이유가 유세현이 드래곤을 끝장내서였다니.
아린이 유세현의 어깨에 살짝 손을 얹었다.
“세현, 잠시 괜찮겠나. 자네에게 개인적으로 묻고 싶은 게 있네만...”
“예, 영감님 말씀하세요.”
“이전 나에게 해준 말에 대한 것이네만...설마 이벨린도 판도라에 있을 때 만났던 겐가?”
“예.”
대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와서 숨길 것은 없었기에.
아니, 애초에 상황만 이상하지 않았다면 딱히 돌려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린은 포섭하면 무조건적으로 득이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허허, 그렇구먼...이제 와서 자네에게 행방을 물어 봐도 모를 테고...”
아린의 눈이 레피아에게 향했다.
“혹시 자네는 내 제자의 소식을 아는가? 이벨린 발디안이라는 이름이네만...”
제자.
그 한마디에 레피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 왜 지금까지 눈치 못 채고 있었지?
노인, 그리고 이벨린을 뛰어넘는 마법실력.
키만 올란드에 이어 대마법사의 칭호를 지닌 자.
“여, 영감님. 혹시 아린...아린 하이워커...세요?”
“그러네만.”
“......”
레피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유세현도 찾아내고, 아린도 발견했다.
몇 달 전이었다면 하던 일을 다 때려치우고 다 같이 축배를 들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살아 있을 거예요.”
“오! 그런가!”
아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유세현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험하디 험한 세상.
계속 나아가 결국 끝을 본다고 해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면 그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들이 살아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부여되는 것.
가슴이 순간적으로 욱신 아려왔다.
아직 판도라의 외부...
이강호, 김주희, 유혜인, 이태광.
마지막까지 살아서 도달할 수 있을까.
과연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 수확관(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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