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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1년 같이 긴 정적이 이어졌다.
공간을 가득 메우는 차가운 기류.
침묵을 깬 것은 유세현이었다.
“그래, 주의 하도록 하지.”
그의 표정은 어느새 평소처럼 되돌아와 있었다.
상황은 상황인 것이고, 나아가야 되는 것은 나아가야 되는 것이었으니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머지는 직접 가서 확인한다.
게릭은 실소를 내뱉었다.
그래 고작 이런 정보 때문에 이 남자가 주눅들 리가 없다.
“이렇게 된 거 아예 지금 다 말해주도록 하지. 이강호와 김주희는 그 당시 최북단에 있는 불타는 대지라고 불리우는 장소에서 활동했다.”
“불타는 대지?”
“그래. 나는 직접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마그마가 들끓는 장소라고 하더군. 활동에 필요한 최소 화속성 저항력은 C랭크 90%이상이다.”
유세현은 그 말에 슬쩍 스테이터스를 살폈다.
B랭크 46%로 자격은 차고도 넘친다.
“다음은 게이트 근처의 지형지물에 대해 설명하고 싶다만...그래서 너희 팀원들은 어떻게 할지 선택했나?”
게릭이 조심스레 물었다.
게릭은 현재 유세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팀원들에게 잔류할 것을 권한 상태였다.
이 지역을 지켜줄 고스펙의 생존자들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
‘그나저나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대단하군.’
대다수의 리더는 팀원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는다. 아니, 정보가 아예 흘러들어가지 못하도록 사전에 제지한다.
힘이 전부인 이 세계에서 전력을 약화시키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때문에 팀원으로 받아들일 때 계약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리더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구두계약에 불과하지만 안 지킬 수는 없다.
위반시에는 동료들의 칼자루가 자신에게 향하게 되니 말이다.
과거에는 판도라로 넘어오면서 뿔뿔이 흩어져 그 체계가 무너졌지만, 요새는 1존, 2존, 3존을 거치며 다 같이 넘어와 체계가 어느 정도 확립 되어 있었다.
야시로나 폭시터 같은 리더가 그 예.
물론, 새내기인 만큼 그들은 게릭이 힘으로 찍어 눌러 억지로라도 다룰 수 있다.
허나, 유세현은 불가능.
그러니 거절해도 게릭은 사실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유세현은 그들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했다.
억압하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을 뿐더러, 이것은 지금까지 따라와 준 것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선택은 스스로.
유세현이 말했다.
“아니, 아직.”
“하긴...몇 시간 안 지나긴 했지. 흠...두 번 설명하기는 귀찮은데...결정 되면 다시 와줄 수 있겠나? 나도 할 것이 있어서 말이야. 기능을 자세히 보고 있는데 머리 터질 거 같다.”
게릭이 임시장치를 가리켰다.
유세현은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그러도록 하지.”
바깥으로 향하는 발걸음.
유세현은 팀원이 모여 있는 주거 지역으로 향하던 그는 문득 반쯤 깨진 거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등을 살폈다.
척추를 중심점으로 하여 오른쪽 견갑골에 연달아 새겨져 있는 문신.
프랑코스와 비슷한 깃털 문양이었지만 색이 많이 달랐다.
놈의 깃털의 색이 푸른색이었다면, 자신은 새까만 검은색.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정보가 이제야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아이템 명: 떨어져나간 성물의 파편(외부)
등급: 에픽 [SSS Rank]
상세정보: 신이 판도라 대륙에 퍼트린 성물 파편조각. 6조각을 모으면 운명의 전장 속으로 진입할 자격이 갖춰집니다. (귀속자와 일정 거리가 떨어져 직접 각인된 상태입니다.)
‘흐음, 그래서...’
계속 걸어 나가기 시작한 그의 발걸음이 비로소 멈췄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철문.
꽤나 두꺼워 방음효과가 뛰어났으나, 초인적인 청각은 팀원의 목소리를 얼추 포착했다.
“그럼 결정을...”
“예, 저는 그와 함께...”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양.
과연 몇이나 자신을 따라올까.
유세현은 문고리를 살포시 잡아당겼다.
* * *
이번 전투에서 살아남은 인원은 354명.
2천 명 가량의 사망자가 나온 것 치고는 피해는 59명으로 그나마 미비한 편이었으나, 그래도 입맛이 쓰디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나 고난을 거치며 연인관계까지 발전한 자들은 죽은 연인에 대한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델람...델람...”
“캐시, 널 지키고 갔으니 델람도 만족 했을 거다. 그러니 이제 그만 울어라.”
유세현의 팀원인 브레스터는 캐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많았던 인원도 이제 약 350명 정도.
이들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게릭의 제안은 무척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유세현도 하고 싶은 데로 정하라고 했기에 꺼릴 것도 없었다.
아니, 사실 유세현이 아니었다면 고민하지도 않았을 터.
몰래 빠져나와 바로 남는다고 했을 것이다.
브레스터의 내면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는 갈등.
“캐시, 넌 어떻게 할 거냐. 남을 거냐?”
“...아니, 난 따라 갈 거야.”
“가면 죽을 가능성이 큰 데도?”
생존자들도 정보를 받았다.
다만 유세현처럼 추가적인 정보를 받지 못했을 뿐.
허나, 지원군이 수개월 동안 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들도 어느 정도 깨달은 상태였다.
상황이 결코 좋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응. 내가 약해서 델람이 죽은 거니까...그리고 이곳도 100% 안전하다고는 할 수 없잖아? 난 그를 따라가서 더 강해질 거야.”
“...알았다. 그럼 나도 따라가지.”
“...뭐? 네가 왜? 너 설마 나 좋아했냐? 지금 꼬시면 넘어올 것 같아서 그러는 거라면...”
“하이고, 김치국은...야 캐시, 내가 미쳤다고 여자 한명 꼬시기 위해서 목숨을 걸 거 같냐? 그리고 그건 델람에게 실례지.”
“...그럼 왜.”
“너랑 나는 구름섬 동기잖아.”
“......”
이상한 이유.
그러나 캐시는 그걸로 납득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잣대로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동료들과 세현씨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난 남아야겠어. 2존부터 여기까지 너무 지쳤어...조금 쉬고 싶다.”
“나도.”
주위를 둘러보던 지드먼이 루시아를 향해 물었다.
“루시아, 너는 어쩌고 싶니.”
루시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말 할 수 없었다.
게이트의 저편은 미지의 세계.
정보를 받았다 해도 이제는 무슨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에 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여기서 멈추는 게 맞았다.
하지만...
‘지금 멈추면 다시는 못 만날 거 같아.’
종종 떠오른다.
거대 괴수의 배를 가르고 나타난 유세현의 모습이.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상하리 만큼 머리에 피가 쏠리고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그와 함께 하며 대화를 좀 더 나눠 보고 싶다.
“아버지 저는...”
루시아의 표정을 본 지드먼이 헛기침을 하며 선수를 쳤다.
“흠흠. 이 아비가 먼저 말하마. 나는 세현씨를 따라갔으면 하는구나. 그만한 리더는 보기 힘들지.”
“......”
루시아는 지드먼이 자신 때문에 이런 말을 꺼낸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그는 언제나 희생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허허, 왜 그러느냐. 혹시 내 결정이 맘에 들지 않은 게냐.”
“아뇨...고마워요 아버지...”
“아니다. 되려 네가 내 결정을 따라줘서 고맙구나. 내일 바로 떠난다니 장비나 한 번 점검하자 꾸나.”
“예.”
부녀가 갑주를 벗는 순간,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주변에 휘둘리지 않도록 게릭이 유세현의 팀원만 출입이 가능하게 해두었기 때문.
내부로 들어온 유세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결정이 되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약 30분을 더 드릴 테니 잔류하실 분들은 계속 이곳에, 저와 함께 가실 분들은 우측 옆방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옆방으로 먼저 넘어갔다.
자리를 잡기도 전 무섭게 열리는 문.
아린과 카텐, 케드리나였다.
“하하,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현씨!”
“저도요.”
“잘 부탁함세.”
유세현은 마음속으로 피식 웃었다. 두 명은 그렇다 쳐도 아린은 무조건 올 줄 알았다. 왜냐하면 게릭에게 아르카드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연이어서 사람들이 몰려온다.
그러나 그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총원 89명.
유세현은 실망하지 않았다. 대충 예상했던 바, 아니 오히려 예상치를 훨씬 뛰어 넘었다.
안전이 반쯤 보장된 곳을 두고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다짐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루시아와 지드먼이 있는 것은 정말로 의외.
유세현은 게릭을 불러왔다.
게릭은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이전에 못다 한 말까지 포함해 이야기를 늘어놨다.
인간이 싸우고 있는 이유와 목표.
“다시 말하지만, 내가 지금 말한 것들은 어디까지나 몇 개월 전의 정보라는 걸 염두 해두고 나아가길 바란다.”
설명을 마친 게릭은 주위를 둘러봤다.
경력은 낮지만 자신과 비슷한, 아니 더한 역경을 헤쳐 온 이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 전부가 끝에 무사히 다다를 수 있기를 이곳에서 기원하마.”
짙은 여운이 장내에 감돌았다.
사람들은 게릭이 퇴장하고 나서도 몇 번이고 끝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끝.
그것은 목표.
지금까지 그들은 무작정 앞으로 걸어오기만 했다.
도착지점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언제까지 걸어야 되는지 모른 채.
하지만 그들은 지금 이 순간 도착지점을 발견했다.
아주 멀지만 언젠가는 다다를 수도 있는.
유세현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팀원들을 해산시켰다.
잔뜩 고양하는 것은 좋지만, 지금은 피로를 푸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 후 유세현도 한 편에 자리 잡고 내공심법을 운용했다.
잘 갈무리되는 마력과 점점 쌓이는 패도의 힘.
하지만 그것도 잠시.
“유세현, 심법운용 중에 미안하지만 잠깐 괜찮겠나?”
“뭐지?”
“아, 다른 건 아니고 선체를 뒤지다가 좀 괜찮은 걸 발견해서 말이야.”
“흐음...”
유세현은 일단 게릭의 뒤를 따랐다.
냄새를 맡았는지 카텐과 케드리나가 잽싸게 달라붙었다.
“자, 받아라.”
게릭이 넘겨준 것은 드론이었는데, 고글과 한 세트로 드론에 창작된 CCTV 영상이 고글에 비치는 특수한 물품이었다.
자신은 필요 없지만 감지능력이 마땅치 않은 팀원에게는 제법 쓸만하리라.
“잔뜩 있으니까 맘에 들면 원하는 만큼 가져가라.”
“잘 쓰도록 하지.”
유세현은 물품을 분배했다.
소형 포켓에 꾸역꾸역 우겨 담는 팀원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 * *
부서지고 허물어져 폐가가 된 오두막집의 밑바닥.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지하계단의 끝에는 높이가 5m가량 돼 보이는 거대한 석벽이 들어서 있었다.
이것이 바로 게이트.
게릭이 데리고 온 생존자들이 마력을 불어넣자 층층이 나뉘어 있던 문이 아래쪽부터 순차 적으로 빛을 발했다.
게릭은 유세현을 슬쩍 불러 세웠다.
“이 게이트에는 잠금이 걸려 있다. 암호는 너에게만 알려 줄 테니 네가 신용하는 자들에게만 일러줘라.”
-지이잉.
가동되기 시작하는 게이트.
거대한 문이 열리며 내부에서 밝은 빛이 튀어나왔다.
게릭은 살짝 떨어져 작별인사를 건넸다.
“잘 가라 유세현. 몸조심하고. 네가 이곳에 떨어져서 정말 다행이었었다.”
“......”
실소를 내뱉은 유세현이 묵묵히 몸을 돌렸다.
앞으로 걸어 나가는데 게릭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아! 그리고 혹시라도 마첸 케그라니 자작 새끼 만나면 그 새끼는 절대 믿지 말아라. 그 새끼가 버리고 짼 놈이니까!”
슈우욱-
포탈을 통과한 그를 맞이해준 것은 깊은 어둠이었다.
문이 닫히기 시작하자, 아린이 잽싸게 보조마법을 시전했다.
“라이트!”
유세현은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을 메우고 있는 돌무더기.
게릭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게이트가 위치해 있는 장소는 사원의 내부였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있다는 뜻은.
‘무너졌군...아니, 무너트린 건가?’
그리고 생존자들의 생각도 유세현과 같았다.
“흠...누가 인위적으로 이곳을 무너트린 것 같아 보이는구먼...”
“저도 그렇게 생각 합니다. 뚫어야 될 것 같습니다.”
다들 동의하는 바.
그러나 어떻게 뚫을지가 문제였다.
자칫 잘못해 천장이 붕괴해버리면 더 귀찮아질 것이기에.
“영감님 저 돌무더기들 고정되게 얼릴 수 있으십니까?”
“가능하네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린이 팔을 들었다. 그의 손앞으로 만들어지는 거대한 마법진.
‘프로즌 윈드’
쉬이익-
거센 얼음 폭풍이 틈으로 스며들며 얼음을 생성해냈다.
< 이동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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