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34화 (234/612)
  • < 점령(2) >

    눈동자를 살핀 유세현은 그 이유를 단번에 깨달았다.

    사람에게서도 많이 본 모습.

    저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삼켜진 얼굴이다.

    ‘어쩌면 쉽게 끝낼 수도 있겠군.’

    사실 프랑코스에게 제안을 한 것은 성물에 대한 정보를 보다 더 쉽게 빼내기 위함이었을 뿐,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프랑코스의 처리한 뒤 달려드는 놈들을 차례대로 죽여 나간다.

    그렇게 해서 놈들이 스스로 이 요새를 버리게 만드는 것.

    이것이 본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건 뒤처리에 제법 시간이 걸린다.

    우선 남아있는 요새가 있다. 전례가 있는 만큼 방비가 높아질 터.

    그리고 물량에서도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게이트를 열고 지원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긴 했긴 하지만, 렉스의 말대로 올 거라면 진즉 왔을 것이다.

    새내기 때문에 이강호가 만들어 놓은 이곳을 모른 척 하고 두고 갈 수도 없는 일.

    유세현은 잡은 기회를 최대한 이용할 생각을 가졌다.

    적을 기만하고, 속여서 깨부순다.

    비열해도 상관없다.

    유세현이 물었다.

    “루위드와 프랑코스 다음으로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자가 누구지?”

    ‘니가 다 죽였잖아!’

    마크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없다는 건가.”

    “......”

    유세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남성형 마크 한 명을 지목했다.

    “너.”

    “...나...아니, 저 말입니까?”

    “그래, 네가 앞으로 마크의 최고 지휘관이다.”

    유세현의 말에 지목당한 마크, 보르도의 눈이 지진을 일으켰다.

    “왜...제가...”

    “네가 가장 나와 가까이 위치해 있어서.”

    어이없는 이유.

    유세현이 툭 말했다.

    “교신해서 요새를 이곳으로 끌어들여라. 다시 말하지만 제안은 유효하다. 하지만 허튼짓을 한다면...”

    “......”

    당장 목숨이 날아갈 참이라 보르도는 일단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통신.

    보르도는 프랑코스가 명령한 것이라 거짓말을 쳤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절대로 오지 않을 테니까.

    모른 척 흘려준 유세현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역시 프랑코스나 루위드의 말이 아니면 안 통하나 보군.’

    이 뜻은 협상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이놈들도 절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꿍꿍이가 짐작이 된다. 아니 확신한다.

    이놈들은...

    한편, 정신을 수습한 마크들은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통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놈을 죽여야 돼!]

    [어떻게? 루위드님이나 프랑코스님조차도 당해내지 못했는데. 네가 먼저 달려들 거냐?]

    일어나는 분쟁.

    무수히 많은 의견이 나왔지만 일치가 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루위드와 프랑코스는 살아있는 신이었다.

    신이 이끌어 주었기에 믿고 목숨을 불살랐다.

    그런데 더는 신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단 한명에게 목이 잘려서.

    3~4세대는 자연스럽게 목숨을 더 우선시 하게 되었다.

    보다 못한 마크 하나가 말했다.

    [도망치자. 이건 아무리 봐도 승산이 없는 싸움이야.]

    [어떻게...]

    [요새가 오면 놈은 분명히 요새를 손에 넣기 위해 직접 들어 갈 거야. 그때 재빨리 도주하면 돼!]

    [나머지 인원들은?]

    [그때 가서 교신하지.]

    [아니, 이곳 말고 001번에 타고 있는 인원들! 제안이 안 된다는 걸 알면 또 학살을 시작 할 텐데!]

    [...버려야지. 지금 그들에게 말하는 건 자살행위야! 우리가 죽어!]

    그때, 유세현이 낮은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도망칠 생각인가?”

    “...?!”

    마음을 읽힌 마크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들은 황급히 변명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변명할 필요는 없다. 곱게 보내 줄 테니.”

    유세현은 격벽을 정상화 시켰다.

    그리고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이 툭 말했다.

    “내가 저곳에 들어간 이후에 말이지.”

    보르도를 포함한 마크들은 전신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신경회로가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느낌.

    “지상으로 내려가면 인원들을 데리고 이곳에서 사라져라. 만에 하나 마크인이 내 눈에 다시 띠는 상황이 오게 되면...”

    뒷말은 여운이었다.

    삐빅-

    통신이 도착했다.

    근처에 다다랐다는 뜻.

    지이잉-

    유세현이 손짓하자 전후좌우 그리고 상하까지 요새의 모든 출구가 개방되기 시작했다. 마치 도망치는 것을 권장하듯.

    유세현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요새를 건들고 도망치면 좋은 꼴은 못 볼 줄 알아라.”

    파앗!

    마크인들을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유세현을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잠시 멍하니 지켜봤다.

    * * *

    콰과광!

    요란한 폭발음이 대기에 요동쳤다.

    상공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검은 연기.

    먼 곳에 떨어져 하늘을 올려다보는 생존자들의 입은 떡하니 벌어져있었다. 시꺼먼 그림자가 개미떼처럼 비행정에서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저, 저거 전부 마크 맞지?”

    “그, 그런 거 같은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다수의 생존자들은 무슨 상황이 일어난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분명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포격으로 인해 피해인원만 4자리 수에 달했고, 지상에 있는 마크들은 쉴 새 없이 탄환을 쏟아 붇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미친 듯이 싸우다가 번뜩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샌가 전세가 역전되어 있었다.

    지이잉-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시간, 두 대의 비행정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은 비행정의 이동방향을 주시했다.

    점점 커지는 눈동자.

    “미, 미친 저거 일로 오잖아!”

    “수, 숨어! 빨리!”

    아무것도 모르는 생존자들이 진득이처럼 땅에 철썩 달라붙었다.

    허나, 비행정은 생존자들의 부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머리위에 정확히 멈추었다.

    “제기랄! 사령관님 지휘를!!”

    보좌관의 말에 렉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이미 그는 게릭에게 설명을 들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굳게 닫힌 비행정의 입구가 열리며 그 속에서 등장한 한 개의 그림자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허공을 향해 몸을 던졌다.

    쉬이익-

    매서운 칼바람 소리가 울려 퍼질 정도의 빠른 낙하속도였지만 착지할 때쯤에는 깃털처럼 가볍기 그지없었다.

    타닥.

    사뿐히 땅을 밟자 아린이 제일 먼저 그를 반겨주었다.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네.”

    “아닙니다.”

    선택을 한 것은 자신.

    프랑코스 덕에 마력을 관리하느라 중간에 살짝 애를 먹긴 했지만, 그래도 위험한 적은 없었다.

    전리품도 무척 두둑하고.

    아이템명: 라 아닐더

    등급: 에픽 [C Rank]

    상세정보: 과학의 정수가 집약된 무기입니다. 천재박사 루크루프가 개발한 것으로 소체의 개수에 따라 형상을 이루는 입자방출력이 달리 산출됩니다. 주인식별 능력이 탑재되어 있으며 마력을 부여하는 것으로 기동합니다.

    입자포를 발산하는 윌 페이더의 등급도 에픽 C 랭크였다.

    이강호조차도 사용하지 못해봤던 등급의 아이템.

    허나, 이것이 과거 이강호가 사용했던 레전더리 SS랭크 아이템 화신의 멸화창보다 좋은 물품은 아니었다.

    등급은 발휘할 수 있는 힘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고 세부사항인 랭크는 원본의 순수한 능력치를 환산한 것이기 때문.

    즉, 아주 높은 랭크를 가지고 있는 레전더리 아이템은 등급이 낮은 에픽을 씹어 먹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미친!”

    게릭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덜덜 떨리기까지 한 손.

    “에, 에픽이라고? 나...처음 봤어. 하, 한번만 만져 봐도 되냐?”

    “......”

    유세현이 윌 페이더를 건네주자 게릭은 연신 오! 오! 감탄사를 터트리며 마치 가보를 다루듯 살펴보기 시작했다.

    빠르게 집중되는 시선.

    게릭은 그제야 추파를 보였다는 것을 깨닫고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윌 페이더를 돌려주었다.

    “흠흠...그래서 요새 두 개를 얻어냈다고?”

    “그래. 두개 다 꽤나 파손됐지만 사용하기에는 충분하다. 일단 올라가자.”

    쉬이익-

    한 발 뒤늦게 내려온 무인 수송선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은 팀별로 나눠 탑승했다.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자 생존자들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

    “허...”

    설마 저 안으로 들어 가보는 날이 생길 줄이야. 계속 시달려온 그들로서는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넓디넓은 함선의 내부.

    점점 깊이 들어 갈수록 사람들은 발밑을 조심해야만했다.

    전투의 여파로 이곳저곳 잘리고 찢겨져 나간 곳이 많았기 때문.

    난데없이 툭 튀어나온 커다란 구멍을 본 게릭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이 구멍...네가 그런 거냐?”

    “아니, 마크가.”

    “...놈도 역시 괴물이었군.”

    제어실은 훨씬 심각했기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거 정말 사용할 수는 있는 거냐.”

    “물론.”

    유세현은 게릭에게 최고권한 레벨 5를 부여했다.

    그리고 연결되어 있는 임시장치를 이용해 곧장 설명에 들어갔다.

    요새의 이동방법, 주 무기의 사용방법, 남아있는 공장을 이용한 요새의 수리방법.

    판도라가 유일하게 좋은 점이 있다면 한국어, 영어, 고대어 등 웬만해선 언어의 장벽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크도 마찬가지.

    게릭은 한참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다가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 근데 왜 이렇게 급하게 설명...너 설마...”

    “그래, 맞아. 난 내일 바로 떠날 거다.”

    마크들은 몰아냈다. 대비책도 만들어 주었다.

    이곳에서 더 이상 그가 할 일은 없었다.

    그럼 이제 만나러 가야되지 않겠는가.

    오랜 시간 보지 못했던 친우를.

    “후후. 그래, 알았다. 너 답군. 그러고 보면 넌 나보다도 구름섬에 1년 늦게 도착한 주제에 6개월이나 빨리 갔지.”

    그 말에 옆에서 조용히 경청하던 카텐이 휘둥그렇게 변한 눈으로 케드리나를 바라봤다.

    “뭔 뜻이냐 저게.”

    “멍청이냐? 6개월 만에 구름섬을 탈출했다는 뜻이잖아.”

    “아니, 누가 의미자체를 모른데? 좀 이상하잖아. 저 게릭이란 사람은 베테랑처럼 보이는데...”

    “...응? 정말 그러고 보니...”

    유세현은 어느새 마무리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그래, 그럼 지금부터는 네가 이 두 요새의 지휘관이다. 그러니까 레벨 4부터는 네가 직접 부여해라.”

    “레벨 5는 내가 못 부여하고?”

    “양도는 가능하지.”

    “호오...내 위는 없다는 거군. 좋아 좋아 괜찮군. 지금부터 만져 봐도 괜찮겠지?”

    “방금 말했잖아. 네가 함장이라고. 좋을 대로 해라.”

    “후후, 알았다.”

    렉스를 부른 게릭은 하나씩 파트를 분담하기 시작했고, 유세현은 구석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한 가지.

    흡수한 성물 파편은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게릭은 알려나.’

    “게릭,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내용을 설명하자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있던 게릭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성물파편을 하나 더 흡수했다고?”

    “아니 말했듯이 하나는 블랙홀에서...”

    “그럴 리가 없어! 웃통 까봐!”

    유세현은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전쟁갑주를 탈착했다. 등을 본 게릭의 양손이 머리위로 올라가며 서양인 특유의 제스처를 취했다.

    “여, 역시 두 개야...두 개라고! 유세현! 넌 지금까지 인간이 모은 성물파편이 몇 개인지 아나?”

    유세현이 응답이 없자, 게릭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폈다.

    검지, 중지.

    “2개다. 그 고생을 했는데 고작 2개라고.”

    “......”

    “연락이 끊긴지 제법 되었으니 1개가 더 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실제로 그 당시 공략이 거의 끝나가는 상태였고.”

    “......”

    유세현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았다. 게릭이 처음 설명할 때 상황이 좋지 않아 지원이 못 오는 것이라 설명 했었다.

    그런데 그 당시 공략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니.

    목 끝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

    게릭이 말을 이었다.

    “눈치 챘나 보군. 유세현, 지금에서야 말하는 거지만 내가 왜 이곳에서 악착 같이 버틸 수 있었는지 아나?”

    “......”

    “그건 저 게이트 너머가 이곳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지금까지는 나밖에 모르고 있던 사실이지. 본래는 네가 푹 휴식을 취한 후 알려주려 했지만...아무튼 단단히 각오하고 넘어가라.”

    < 점령(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