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33화 (233/612)

< 점령(1) >

요새의 자폭을 막기 위해서 얼마나 용을 썼는데 이제 와서 스스로 그만두다니?

굳이 말로 풀어 설명하지 않더라도, 바보가 아닌 그들은 이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유세현이 제어기기를 향해 뻗고 있던 팔을 내리자 루위드가 실소를 내뱉었다.

“하...네놈이 강한 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둘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거냐? 아니, 이 안에 있는 안드로이드 전부를?”

주위에는 어느새 다시 몰려든 3~4세대 마크들로 즐비했다. 그중에서는 유세현이 무시하고 통과한 호위병들도 존재했다.

하나같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는 것이 그 어떠한 생명체도 위압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지만.

유세현만큼은 무척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루위드는 이내 안색을 완전히 굳혔다.

그의 내면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모종의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장의 수가 있나? 아니...그럴리가...’

강하다지만 유세현은 충분히 만신창이였다. 루크루프의 전쟁갑주가 아니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다.

프랑코스가 왔으니 절망에 빠져야 정상이건만.

도대체 저 당당함은 뭐란 말인가!

결론을 내려준 것은 프랑코스였다.

“큭!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덮쳐라!”

“예!”

명령을 받은 마크들이 날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상하좌우, 제어실이 제법 크다지만 너무나도 많은 수라 회피할 공간 따위는 없었다.

“크크크! 잘 가라 가짜인간! 네놈이 가져온 루크루프의 유산은 우리가 잘 사용하도록 하마!”

그 순간, 유세현의 입꼬리가 다분히 올라갔다.

어둠에 휩싸이는 육신.

그때부터 루위드의 시각렌즈에 전혀 믿을 수 없는, 상상조차 못할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콰직.

으득.

잘리고 바스라지고.

마크들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했다.

암흑투기로 인해 스텟이 상당히 저하 된 상태에서 유세현이 너무 빨라진 탓이었다.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파편조각.

고성능의 신경회로가 고철로 전락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루위드의 눈동자에 경악이 물들었다.

허나, 그는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유세현이 이미 근처에 다다른 상태였기 때문.

“크!”

루위드는 황급히 라 아닐더를 컨트롤했다.

가까스로 검을 막는 데는 성공.

허나, 유세현은 이미 2차 공격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핏물을 형상화 한 듯한 유세현의 붉은 눈동자가 더더욱 밝은 빛을 발한다.

사선으로 내리그어지는 검.

“프랑코스 숙여라!!”

공간을 가르는 선이 두 명을 덮쳤다. 무너지는 배경을 본 프랑코스는 깨달았다.

놈의 자신감은 결코 허세가 아니라는 것을.

유세현은 사실 이곳에 찾아온 프랑코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지름길을 내어준 것과도 다름이 없었다.

돌고 돌아가야만 다다를 수 있는, 전쟁의 끝을 향한 지름길을.

처음부터 마족화를 사용하지 않은 건 앞서 말한 마력 탓도 있지만, 사실 정보의 누출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만약 알려진다면 계속 회피하는 등 대비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여기서 끝낸다.’

어둠이 나풀거렸다.

이제 요새는 얻으면 이득이고, 못 얻어도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주변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솨아아아!

폭풍이 몰아쳤다.

“루위드! 저건 또 뭐냐!”

“부패물질이야! 고순도의 마력을 담은 방패로 방어하거나 피해야 돼!”

“제기랄!”

프랑코스는 황급히 쉴드비트를 작동시켰다.

무수히 많은 철판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선다.

전쟁갑주를 베이스로 하여, 제조하는데 성공한 방어용 장비!

그러나 그것도 부패의 시간을 늦추는 정도였다.

프랑코스는 황급히 루크루프의 4개의 유산 중 마지막 유산인 윌페이더를 사용했다.

라 아닐더처럼 범용성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화력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지닌 병기.

치지직-

“뒤져라!”

콰아아앙!

무지막지한 열기를 담은 입자포였다.

하지만.

‘브레스에 비할 바는 못 되는군.’

이 정도의 힘은...

콰아앙!

맞대응하듯 들어 올린 유세현의 손에서 검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서로 상쇄되어 사라지는 힘!

한발자국 내딛자 프랑코스의 기간트가 살짝 밀려났다.

프랑코스가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크으으...어떻게 이걸 정면에서...”

물론 마력소비량은 아이템을 사용하는 프랑코스에 비해 유세현이 훨씬 컸다.

허나, 지금 그는 마력이 계속 회복 되고 있는 상황.

펑! 펑!

양옆으로 번진 불길에 의해 화재가 일어나고 새빨간 쇳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프랑코스는 못 버티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하단부를 부수고 아래로 숨어들었다.

“루위드! 라 아닐더의 제어권을 나에게 넘겨라! 그리고 예비 슈트라도 꺼내서 입고와!”

“큭! 알았...”

“놓치지 않아.”

위에서 내려온 유세현의 검이 루위드를 향했다. 프랑코스가 라 아닐더를 컨트롤해 잽싸게 막아섰지만.

손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목덜미를 붙잡힌 루위드가 당혹 섞인 음성을 토해냈다.

“헉! 자, 잠깐만 기달...”

허나, 그말에 행동을 멈출 유세현이 아니었다.

우드득.

경추가 순식간에 박살난 나자 축 늘어지는 루위드의 몸.

코인은 몸 밖으로 튀어나오기 무섭게 유세현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무지막지한 순도.

프랑코스의 눈이 깜박였다. 그는 현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수 천의 대군도 아닌 고작 인간 한 명이다.

그런데 이렇게 궁지에 몰린단 말인가?

혁명까지 성공한 자신들이?

“인간 따위가아아!”

기간트, 입고 있던 슈트를 폭주시킨 프랑코스의 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죽여주마아아!”

파앗!

파바바박!

성능이 올라간 기간트의 파워는 무지막지 했다. 거기다가 라 아닐더와 이어지는 연계 공격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하지만.

‘어째서...어째서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거냐!’

모두 방어해낸다. 도저히 닿지 않는다.

머릿속에 내장 되어있는 일류무술이 하나도 통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 당시의 육체는 이렇게 강하지 않았다. 행동할 수 있는 제약이 해제되는 만큼 전투법은 다양해지기 마련이었다.

특히나 관성을 무시하고 허공을 밟을 수 있는 유세현의 천마군림보는 공중전투를 가능하게 해준다.

빠악!

트드득.

유세현의 발이 적중당한 프랑코스의 슈트가 일부 떨어져 나갔다.

부패의 어둠에 의해 내구도가 상당히 낮아진 탓에 충격을 견디지 못한 것!

프랑코스는 자신의 패배를 확신했다.

지금 프랑코스의 표정은 아까 전 루위드가 하고 있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머, 멈춰라! 혀, 협상을 하자 협상을!”

유세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조각조각 부서지며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프랑코스. 다급해진 그는 최대한 방어하며 혀를 더욱 빠르게 놀렸다.

“마, 말을 좀 들어봐라! 지적 생명체이지 않나! 둘 다 윈윈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

촤자작-

“으아아아! 제발! 제발! 들어보고 관심 없다면 그때 죽여라!”

슈트를 완전 파괴한 유세현의 검이 프랑코스의 목덜미에서 멈췄다.

스스스.

때마침 마족화가 해제되며 어둠이 흩어진다. 유세현의 입에서 무미건조한 중저음의 음성이 튀어나왔다.

“말해봐라. 허튼 짓을 하려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그 순간 목을 벨 거다.”

“아, 알았다!”

프랑코스는 30초라는 짧은 시간동안 열변을 토해냈다.

판도라에 얼마나 많은 종족이 있는지. 그리고 그 종족들이 얼마나 강한지.

즉, 힘을 합치자는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우, 우리 종족에는 몸이 부셔져도 바꿔서 살아날 수 있는 존재가 있다. 반면, 너희들은 부서지면 그대로 끝이지.”

“그래서?”

“우, 우리가 앞장서겠다! 모든 것을 감수 해주겠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믿을 필요는 없다. 너희는 감시하면 된다!”

“감시?”

“그래, 요새를 주겠다. 2개 다! 그 어떠한 마크도 전파 수신 장치를 피해갈 수는 없으니 감시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자신의 생존에만 포커스를 맞춘 무척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때 구멍이 뚫린 천장으로 마크들이 재차 등장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아, 아니 프랑코스님! 이게 무슨...”

“머, 멈춰라 그대로 있어!”

“......”

이 모습을 보던 유세현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대놓고 물었다.

“지금 너의 제안은 너 하나를 위해서 동족을 팔아먹겠다는 건데. 과연 그들이 네 말을 따라 줄까?”

프랑코스는 이를 으득 갈았다.

‘이자식이...’

지금 협상을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하지만 그는 법칙이 해제된 상태에서도 인간과 함께 살아왔다.

감정조절은 기본 중에 기본.

“팔아먹는 게 아니다. 이건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내가 당했다는 건 이중에서는 그 누구도 널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

“흐음...”

“잘 생각해봐라. 이 제안은 너희에게 무척 좋은 것이다.”

유세현이 묵묵히 프랑코스의 얼굴을 주시하자, 프랑코스는 마음속으로 살짝 안도했다.

오랜 기간 인간과 함께 지내온 그는 인간을 잘 알았다.

저 표정은 분명 반쯤 넘어온 표정!

‘그래, 받아들여라! 받아들여!’

이윽고 장고를 한 듯한 모습의 유세현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 제안 받아 들여 주지.”

“오! 정말 탁월한 선택...”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프랑코스는 검끝이 목에 닿자 다시 조심히 자세를 낮췄다.

“네 신변의 해방은 나중이다. 우선 항복 선언을 네가 직접 날려라. 그리고 요새 한 개를 더 불러들여라. 네가 말한 모든 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네가 풀려나는 일은 없을 거다.”

“하하하. 그래, 못 믿을 만도 하지 알겠다. 우선 그럼 선언부터 하도록 할...”

“사용하던 무기의 제어권을 넘겨라.”

“...알았다.”

유세현은 라 아닐더와 윌페이더가 제대로 말을 듣는지 확인한 뒤 새로 얻은 포켓에 집어넣었다.

프랑코스의 목덜미를 붙잡은 뒤 대파 된 제어실 내부로 되돌아오자 잔뜩 들어서 있던 마크들의 이목이 쏠린다.

하나같이 씁쓸한 표정.

허나, 그들은 겉과 속이 달랐다.

제어실이 날아가면서 재밍기가 망가져 통신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뛰어온 것도 프랑코스의 부름을 받아서다.

[놈의 스킬은 해제됐다. 그러니 지금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준비를 했다.

프랑코스가 몸을 내빼는 순간 덮치기 위해서.

“마이크가 망가져 방송이 힘들겠군. 누가 좀 가져다 줬으면 좋겠는데.”

“제가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프랑코스의 말에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가는 몸짓을 취했다. 유세현이 그사이 툭 물었다.

“너희도 성물조각을 얻었겠지.”

“아...그렇다.”

“내놔라.”

“...불가능하다. 루위드가 아닌 내게 귀속이 되어있어서 말이지.”

“......”

이상하게 생각한 유세현의 검이 더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프랑코스의 입에서 당황어린 음성이 터져 나왔다.

“왜, 왜 그러는 거냐! 너희도 성물조각을 얻었다면 조각이 획득자에게 귀속된다는 걸 알 거 아니냐!”

목숨이 걸려있는 만큼, 진실임이 분명했다.

유세현은 겨를이 없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기 전 성물조각을 김주희에게 건네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잃어버렸기 때문.

‘그런데 어차피 줄 수 없던 거였나.’

마음의 짐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인 유세현이 팔을 휘둘렀다.

서걱-

공간을 장악하는 소름끼치는 음색.

깜짝 놀란 마크들의 눈이 화등잔만해지는 반면 프랑코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온 힘을 다해 입을 열었다.

“네...네놈 지금 무슨 짓을...”

“같은 편을 배신한 자의 말은 믿지 않는 주의라서.”

-콰직.

그 음성 내용을 끝으로 프랑코스의 기억은 완전히 끊어졌다.

유세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시체를 뒤지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마라. 제안은 아직 유효하니까. 놈을 죽인 건 동족인 너희들을 팔아먹어서다. 그놈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항복을 했지.”

‘...그건 아까 전에 이미 끝난 말이잖아!’

마크들은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둘러 쌓여있는 것 치고는 상대가 너무도 여유로웠기 때문이다.

루위드와 프랑코스를 몰아붙였으니 이건 결코 허세가 아니다.

몸을 뒤지던 유세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성물파편이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요새에 있는 건가?’

하지만 그가 프랑코스의 등에 손을 얹은 순간.

파앗!

문신처럼 새겨져 있던 깃털 문양에서 밝은 빛이 새어나왔다.

곧 피부를 뚫고 작은 조각이 형상화 되었다.

정보를 읽어보니 성물 파편이 확실했다.

‘후...이걸로 다시 한 개 얻은...’

생각을 끝낼 새도 없이 조각에서 재차 광명이 터져 나왔다.

몸속으로 흡수되는 빛!

‘뭐야?’

유세현은 놀랐지만 마크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침착함을 유지했다.

‘내 몸에 흡수된 건가? 나중에 확인해봐야겠군.’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도자를 눈앞에서 베어버린 데다가 뻔한 도발까지 해 달려들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들은 움찔거리기만 할뿐이었다.

< 점령(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