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203화 (203/612)
  • < 재활용(1) >

    계획이 지연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내린 과감한 결단.

    또한 그것만으로는 성이 안찼는지 얼마 남지 않은 수하에게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데레오트. 데레아펜다. 너희 둘이 직접 전두 지휘해라.]

    [크크크. 알겠습니다. 하온데 몸은?]

    그림자 종족은 형태가 불확실했기에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기에는 숙주가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가르쿠라 그리고 케르취의 몸을 사용하도록 해라.]

    이는 이참에 통제가 잘 되지 않은 두 종족의 골칫거리를 전선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케르취보다도 멋대로 절벽을 공략한 카취의 몸을 사용하게 하고 싶었지만, 이곳으로 넘어온 놈의 스텟을 잘 모르는 이상 검증된 강한 몸을 쥐어주는 쪽이 일을 확실히 처리할 수 있다.

    한때 코볼트와 고블린들을 전부 잠식해 판도라에서 위세를 떨쳤던 데오폴론.

    이제 이 판도라에서 남은 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크크크, 알겠습니다.]

    [이참에 완벽하게 말려버리겠습니다.]

    두터운 문이 열리자, 두개의 그림자가 바람처럼 빠르게 바닥을 유영해 장소를 빠져나갔다.

    * * *

    -파앗!

    허공에 생긴 거대한 문 속에서 사람들이 단체로 튀어나왔다.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사주경계를 하는 인원들.

    던전을 클리어 할시 대개 돌아오는 장소는 처음 들어간 입구였다.

    때마침 맞닥뜨리는 오크 수색병과 인간.

    “취, 취익?”

    아닌 밤중 홍두깨같은 등장에 깜짝 놀란 수색병들이 후다닥 몸을 돌렸다. 그들이 아무리 용맹하다고 할지언정 고작 수십 명으로 1천명이 넘는 인간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것!

    인상을 팍 구긴 생존자들이 이구동성이 되어 외쳤다.

    “젠장! 쫓아! 놓치면...”

    그 순간.

    -쌔애액!

    귀를 찌릿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바람이 일었다.

    폭풍을 만난 낙엽처럼 휩쓸려나가는 오크들.

    몇몇은 방패로 방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크...”

    어찌나 빠른지 오크들은 그 흔한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트득.

    -쨍그랑.

    유세현은 수명이 다 된 검을 버리고 다른 검을 집어 들었다.

    이전 검은 루베르크보다 길더니 이번 거는 짧다.

    길이가 일정해야 확실히 간격을 잴 수 있는데.

    검을 이리저리 휘둘러보던 유세현이 입에서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후우...그나저나 이건 해도 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네.’

    천마가 직접 저술해놓은 검법.

    그 비급서를 익힌 지금, 유세현의 머릿속에서는 매 전투를 할 때마다 이미지가 떠올랐다.

    어떻게 상대를 공략하면 좋을지 혹은 어떻게 대처해야 보다 더 효율적인지.

    그러나 모든 것을 압도적으로 부숴버리는데 특화된 천마의 검법은 유세현의 기존전투방식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기에 실전에서 써먹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니, 사실 어찌 보면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해놓은 검법을 하루아침에 완벽하게 외우고 따라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것이긴 하지만.

    ‘앞으로는 될 수 있는 한 따라 해봐야겠군.’

    지금까지는 부족한 검술을 스킬과 스텟을 보완해주었다.

    때문에 검술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하고, 합리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열심히 연습도 했지만 그래도 한계는 존재했다.

    그것을 무림인들을 상대하며 똑똑히 느꼈다.

    이제는 부족한 검술도 채워 넣어야 될 시간.

    목표는 순수한 검술 실력만으로 이강호의 창과 대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는 어디로 갈 텐가?”

    아린이 물었다.

    나머지 인원들도 유세현이 결정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마력의 흐름을 읽은 그가 입을 열었다.

    “남동쪽으로 가겠습니다.”

    이 근처에서는 더 이상 마력의 소용돌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처음 위치해있었던 북서쪽에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시계방향으로 섬을 돌다보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물론 그전에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오크 군세 중 어느 한곳을 뚫어야 하지만.

    ‘이전처럼 허술하지가 않아.’

    기껏 키워놨는데 이대로라면 꽤나 많은 인원이 죽어나가리라.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잠시 동안 고뇌하던 유세현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 * *

    ‘어떻게든 공을 세워야 되는데.’

    던전으로 인해, 계획이 완전히 틀어진 캐런은 일단 차분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분명, 기회는 올 것이기에.

    그리고 우습게도 그 기회는 정말로 얼마 안가 그의 앞에 찾아왔다.

    “내일 저 산 너머에 있는 오크들을 치겠습니다.”

    유세현이 선포를 한 것.

    캐런이 귀를 쫑긋 세우고 사람들의 말을 경청했다.

    던전의 공략 거부 이후, 그들은 짐덩이로 완전히 낙인이 찍혔기에 발언권 같은 건 없었다.

    “다른 방도는 없는 겐가?”

    “예. 저기가 그나마 약한 쪽에 속하는 곳입니다.”

    아린의 물음에 유세현이 확답하자 사람들은 납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저 빠르고 느리고의 차이일 뿐,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상, 언젠가는 겪어야 될 일이었으므로.

    캐런은 잔뜩 긴장해 있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마음속으로 웃었다.

    ‘이건 진짜 정말 완벽한 찬스다!’

    기습은 기습이기에 의미가 있다.

    알려지면 되려 매복을 당해 역공을 당할 수 있는 것.

    ‘내가 직접 죽일 수 없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놈은 엄청난 괴물이다.

    솔직히 오크 군세가 놈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놈들은 그렇게 강하지 않지.’

    그러니 이를 오크들에게 알리기만 하는 것으로도 인간은 큰 피해를 볼 테고, 모든 것은 공적으로 환산되리라.

    이제 문제는 몸을 언제 이곳에서 내빼느냐 인데.

    ‘지금 빠지면 안 된다.’

    그러면 저 촉이 좋은 유세현이 모종의 의구심을 느끼고 계획을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이번에 이탈하게 되면 앞으로는 같이 다닐 수 없게 될 것이므로 공을 세울 수 없다.

    ‘그래 내일 아침...아침에 말하자.’

    자신들이 겁쟁이란 것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전력이 된다고 생각하진 않을 터.

    그들은 자신들을 두고 계속 나아가리라.

    캐런은 없어져도 전혀 모를, 존재감이 없는 20명을 소리 소문 없이 불러 모았다.

    “바르모프, 너희 팀 10명은 오늘밤 이곳을 몰래 빠져나가서 오크들에게 알려. 내일 적이 쳐들어 올 거라고.”

    “흐흐흐. 걱정 마라.”

    “그리고 제론이랑 나머지 9명. 아까 유세현이 한 이야기 들었지?”

    “저 바로 옆쪽에 오크 진형이 또 있는 거?”

    “어, 거기로 가서 놈들에게 지원 요청해.”

    “...알았어.”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탐탁지 않은 표정.

    눈치 빠른 캐런이 잽싸게 물었다.

    “뭔데?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아...그게...”

    제론이 잠시 뜸들이다 말을 이었다.

    “그냥 우리도 그냥 이곳에 합류하는 게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뭐?”

    “아니, 그게 그렇잖아. 그 사람 정말 센데다가 우유부단하지도 않고...이게 정말로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르고...”

    그 행보에 마음이 동한 것이다.

    캐런이 제론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야, 정신 차려라 제론. 오크 군세가 얼만지 너도 잘 알잖아? 놈이 아무리 강해도 전부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고작 저 2천명도 안 되는 병력가지고?”

    “...그건 그렇지만...솔직히 오크놈들의 말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노릇이잖아. 나중에 쓰레기처럼 우리를 버릴지 어떻게 알아?”

    “......”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캐런은 지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놈들은 자존심에 죽고 사는 놈들이야. 약속은 꼭 지킬 거다.”

    “...그건 궤변이야 캐런.”

    “...그래서? 지금 배신하겠다는 거냐?”

    “...아니, 그런 말 한 적 없어. 그러니깐 하겠다고 했었잖아.”

    “그럼, 괜히 기분 잡치게 만들지 말고 일이나 제대로 해라...욕 나올뻔한 거 간신히 참았으니까.”

    캐런이 제론의 가슴을 툭 쳤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 * *

    -샤샤샥.

    인간의 진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기 무섭게 질주하기 시작한 바르모프와 9명의 눈앞에 더욱 짙은 어둠이 드리웠다.

    -슈욱!

    저편에서 날아와 나무에 박히는 검기.

    “뭐, 뭐야!”

    깜짝 놀란 그들은 곧바로 움직임을 멈췄다.

    “오, 오크들이냐! 난 캐런진형의 바르모프다! 증표를 가지고 있어! 공격을 중지하고 와서 확인해라!”

    바르모프가 외쳤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저벅. 저벅.

    점점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만 울려 퍼질 뿐이다.

    인원들은 잔뜩 경계하면서도 공격하지는 않았다.

    오크를 공격했을 경우 되돌릴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기에.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달빛이 다가온 그림자의 얼굴을 한순간 밝게 비쳤다.

    휘둥그렇게 변하는 바르모프의 눈.

    “너...넌!”

    “이 앞은 오크들이 주둔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

    유세현의 말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바르모프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정찰을 하려고...”

    뻔뻔함의 극치.

    하지만 이미 자백까지 한 마당에 통할리가 없었다.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긴...”

    유세현이 조용히 읊조리자 바르모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현재 그들의 뇌리 속을 점령하고 있는 생각은 오직 하나.

    ‘어, 어떻게든 벗어나야 한다!’

    여기 있다가는 모두 죽는다.

    놈이 아무리 강해도 사방으로 퍼지면 한 명은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짐한 인원들이 발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풀숲이 흔들리더니 수많은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

    축 늘어지는 바르모프의 어깨.

    그는 깨달았다.

    완전히 유세현의 손안에서 놀고 있었음을.

    * * *

    늦은 밤.

    곤히 자고 있던 캐런은 목덜미에 차가운 금속성이 닿기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너...이게 무슨 짓...”

    “말이 많군. 그 상태 그대로 따라와라. 허튼짓하면 이 자리에서 목을 날려버릴 거야.”

    눈에 살기를 가득 담고 있었기에 캐런은 일단 그의 말을 따랐다.

    횃불 근처에는 자신말도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뭉쳐있었다.

    전부 자신의 팀에 속해있는 이들.

    스멀스멀 올라온 불안감이 점차 확신으로 바뀐다.

    ‘젠장! 걸린 거야? 왜?’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캐런이 재빨리 유세현을 향해 선수를 쳤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죠?”

    “글쎄...뭐하는 짓인지는 곧 알게 되겠지.”

    유세현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바르모프와 제론, 그 외 사람들이 끌려나왔다.

    캐런은 일부러 놀라는 척 연기했다.

    “아니, 바르모프. 제론...너희들이 왜 거기에...”

    카텐이 코웃음을 내뱉었다.

    “허! 그딴 연기는 안 해도 돼. 저들이 이미 다 불었어. 너희들이 배신자라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캐런은 꼬리를 잘라낼 생각을 했다.

    그는 제론과 바르모프 그 외 18명이 하는 말을 전면 부인했다.

    아니, 되려 힐난했다.

    “너 이 새끼들...너희들 때문에 오크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던 거구나! 젠장! 너희들을 받아주는 게 아니었는데!”

    “뭐?”

    그들이 가지고온 설정에 부합하지 않은, 정말 기발한 비책이었다.

    바르모프가 치를 떨었다.

    “캐런, 너 이 새끼!”

    “닥쳐! 배신자 주에게 어디서! 유세현씨 저희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도 저놈들과 만난지 한 달 밖에 안 됐어요!”

    즉 자신도 이 사건의 피해자라는 것.

    유세현은 피식 웃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을.

    하지만 증거가 없다면 제법 그럴싸한 말이기도 하다. 그래 증거가 없다면...

    유세현이 주머니에서 철 조각을 꺼냈다.

    오크의 개라는 증표였다.

    창백해지는 캐런의 안색. 반면, 바르모프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비릿한 비소를 짓고 있었다.

    ‘아, 아직 처리하지 못했는데!’

    캐런은 자존심이고 뭐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그, 그러니 목숨만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머지 인원들도 손바닥이 불나도록 싹싹 빌었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

    “죽이진 않아.”

    “저, 정말입니까?”

    “그래. 너희들이 내말을 따라준다면.”

    “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좋아. 넌 패스. 나머지는 어떻게 할 거지? 이 자리에서 죽을 거냐. 아니면 기회를 잡아 볼 거냐.”

    유세현이 주위를 인원들도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은 인원이 부족한 만큼, 자비를 베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좋아...그럼 내일 너희들은 나랑 같이...”

    요구조건을 들은 캐런과 인원들의 안색이 창백히 물들었다.

    “그, 그건 죽으라는 것과도 똑같잖아! 적어도 살 수 있는 길은 줘야...”

    “아니, 잘하면 살아남을 수 있어. 아니면 지금 당장 죽고 싶은 건가?”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고작 500명으로 적진에 쳐들어가겠다니...나, 난 못해! 못한...”

    한 남자가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버럭 외친 순간.

    -서걱.

    지면에 목이 나뒹굴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던 일격.

    “또 가기 싫은 사람 있나?”

    인원들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냉정함과 무자비함.

    배신자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이 남자는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자리에서 모두를 죽일 수 있음을.

    인원들은 해가 뜨기 무섭게 오크진형을 향해 출발했다.

    < 재활용(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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