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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196화 (196/612)
  • < 2존(6) >

    말을 마친 키르갈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던졌다.

    자세를 낮춘 채 빠른 속도로 비탈길을 내려가는 키르갈.

    마구 사용자와 아직 조우한 것도 아니건만, 숨이 턱 막혀 오는 것이 느껴진다.

    “위대한 전사들이여! 목숨을 불살라 적을 처단하라!”

    -슈슈슈.

    -트드득.

    그 말에 오크들의 육신이 일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온몸 곳곳에서 힘줄이 솟고 눈동자는 까뒤집어져 흰자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크들이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는 종족 스킬.

    폭주.

    생명력의 일부를 힘으로 치환하는 이 스킬은 이성을 잃게 된다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약과 같았다.

    “크아아아!”

    오크들은 팔이 잘려나가던 다리가 떨어져 나가던, 전혀 개의치 않고 인간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어찌나 흉폭한지 그 모습은 흡사 언데드와 비슷하다.

    물론 언제나 예외가 존재하듯, 키르갈만큼은 오크들 중에서 유일하게 의식의 끊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놈...예상보다도 훨씬 장난이 아니다.’

    스킬이 공포라는 감각을 직접적으로 차단해주고 있건만, 그럼에도 사지가 떨린다.

    솜처럼 가볍던 육체가 물을 잔뜩 집어 먹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폭주상태에서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불행하게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피비린내 나는 공기와 본능이 말해준다.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을.

    [제콸, 지금 즉시 이곳에서 빠져나가 2존을 떠날 준비를 해라.]

    [그게 무슨! 돌아오신다고 하시지...]

    [아니, 그건 오만이었다.]

    [인원들을 내려 보내겠습니다. 시간을 끄는 동안 키르갈님께서는 그곳을 빠...]

    [제콸.]

    키르갈이 말을 딱 끊었다.

    [명령이다.]

    [......]

    “키르갈님의 마지막 명이시다! 지금 즉시 이곳을 뜬다!”

    제콸이 비로소 몸을 돌렸다.

    키르갈은 배틀엑스를 재차 꽉 움켜쥐었다.

    * * *

    그 어떠한 스킬도 알아내지 못했다.

    너무 강하다.

    뭘 할 틈이 없었다.

    10년처럼 느껴진 10초.

    -서걱.

    키르갈이 보고 있던 세상이 빙그르르 회전했다.

    땅이 솟아나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느낌.

    그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목이 떨어져나갔다는 것을.

    이제 3초도 지나지 않아 생명을 잃을 테지.

    그럼에도 키르갈은 입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비록 스킬은 알아낼 수 없었지만 수확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놈의 스텟.

    저건 아무리 봐도 C랭크 수준이 아니다. 도달해보지 않았지만 필히 B랭크.

    그것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다음 존으로 나아간 동족들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리라.

    -툭.

    밝게 비치던 세상이 새까맣게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금속성의 음색이 점점 수그러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오크 한 마리의 목이 땅에 떨어진 순간.

    생존자 일동의 눈동자가 한순간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허억, 허억...이...이긴 건가?”

    스스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

    “저, 정말 이겼다고?”

    긴장이 풀렸는지 발이 일제히 휘청거린다.

    그대로 주저앉는 수많은 생존자들.

    몇몇은 아예 대자로 드러누웠다.

    승리의 함성 같은 것은 당연히 나오지 않았다.

    몸을 극한으로 몰아붙인 것으로 인해 현재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직 한 명.

    유세현만큼은 여전히 굳건히 서 있었다.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정말로 별거 아니라는 듯이.

    더군다나 그의 발아래는 지도자 아린이 주저앉아 있었다.

    이목이 자연스레 유세현에게 집중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상황.

    그 상태에서 아린의 말이 한없이 고요해진 숲을 울렸다.

    “이긴 것 같구먼...전부 자네 덕분이네.”

    “......”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유세현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세현의 옆에 철썩 달라붙어 있던 카텐도 한 마디 내뱉었다.

    “정말입니다. 세현씨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존자들은 서로를 번갈아봤다.

    그들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린을 포함해 팀장급의 인원이 저리 극찬하다니.

    “후우...후우...저 사람 누군지 알아?”

    “아니...전혀.”

    막 전투가 끝난 마당이었기에 생존자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허나.

    -크오오오오

    -쿵.

    5관문의 보스 강대한 물리저항력과, 마법저항력으로 오크와 인간 두 진형을 괴롭혔던 아이언골렘의 거구가 뒤로 고꾸라졌다.

    검으로 다리를 잘라낸 것이 아니었다.

    단순한 주먹질.

    사용하던 검이 골렘의 육체 경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러져나간 덕택에 어쩔 수 없이 취한 행동이었으나, 생존자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으로 작용했다.

    “무, 무슨 힘이...”

    “스...스킬이겠지?”

    “어...내가 보기엔 그냥 후려친 거 같은데...”

    그 다음 순간, 가슴에 올라탄 유세현의 팔이 아이언 골렘의 강철피부를 꿰뚫었다.

    유세현이 근원이 되는 핵을 단번에 뽑아내자 무너지는 아이언 골렘의 육신.

    “헉!”

    생존자들의 입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도무지 다물어 질줄 몰랐다.

    “대...대체 뭐하는...”

    “그러고 보니까. 저사람...이전에...”

    결국, 카텐에게로 달려가 묻는 상황까지 발생.

    6관문을 넘었을 때, 유세현은 어느 샌가 자연스럽게 추앙받고 있었다.

    “후우...처음에는 정말 죽기 살기로 해야 아슬아슬하게 관문을 클리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그러게 말이야, 고작 이틀 만에 두개의 관문을 돌파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린이 코인을 흡수하고 있는 유세현을 향해 다가왔다.

    “허허, 자네 많이 유명해졌구먼.”

    “뭐...그렇군요.”

    유세현의 반응은 무척 시큰둥했다. 아린은 그 모습에 쓴웃음을 삼켰다.

    보통 이렇게 추대해주면 소심한 사람들조차도 으쓱하기 마련인데.

    이 남자는...

    “바로 7관문으로 가시죠.”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마치 무엇인가에 쫓기듯.

    “흐음, 슬슬 해가 저물 것 같은데 하루 자고 내일 돌파하는 게 어떻겠나? 아무리 자네라도 컨디션 관리는 해야 될 것 같네만...”

    “...그럼, 그러도록 하죠.”

    “허허, 잘 생각했네. 7관문 근처에 야영을 할 마땅한 장소가 있다네. 얼마 전까지 오크들이 애용하고 있던 요새지.”

    유세현과 아린이 발걸음을 옮기자 생존자들이 알아서 쫄래쫄래 뒤따랐다.

    선두로 나아가던 유세현이 문득 따갑게만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린이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단순히 보고 있었다고 치부하기는 뭔가 의미심장한 표정.

    “혹시, 뭔가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허허허, 그렇게 보였나? 딱히 그런 건 아니네만...”

    아린이 노을이 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자네를 보고 있으면 자꾸 누군가가 떠올라서 말이네.”

    “예?”

    “허허, 아주 오래전에 말일세. 알테리아 대륙에 있었던 때였지. 그래...분명 한 100년쯤 전이었을 걸세.”

    아린이 회상에 잠긴 것 마냥 말을 이어가자 카텐이 깜짝 놀라 아린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과거에 대해 거론한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늙은이지만 그때는 나도 꼬마였다네. 내가 살던 마을은 북부 최상단에 위치한 곳으로 눈보라가 멎을 줄 모르는 곳이었지. 하지만 춥지는 않았었네.”

    유세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에게는 키만 올란드라는 대마법사가 붙어있었을 테니까.

    “그 당시 북부에는 하나의 신탁이 내려 왔었다네. 악마강림이라는, 소환되면 그 악마가 세상을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했었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유적 때는 자신이 어찌어찌 처리를 했지만, 본래의 과거에서는 막지 못했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것도.

    알테리아 대륙인이었는지 카텐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아! 그거! 저도 책에서 본적 있습니다!”

    “허허허. 그런가? 하지만 세현, 자네는 모르겠구먼.”

    “......”

    “아무튼 그런 신탁이 있었네. 그리고 악마를 소환할 수 있는 제물은 어린아이들 중 한 명이었지. 나도 그 후보에 속해있었네만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몰랐었네. 스승님이 마법으로 마을을 숨겨주고 있었기 때문이지.”

    아린이 한 템포 끊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방인이 4명이 갑자기 마을에 방문했다네. 아직도 기억 한다네 분명 남자 둘, 여자 둘로 이루어진 캐러밴이었지.”

    “......”

    유세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자 2명에 여자 2명?

    ‘에이 설마...’

    유세현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일단 그러려니 넘겼다.

    그 정도야 겹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대화가 계속 이어진다.

    “그자들은 하루 만에 떠났다네. 하지만 다시 돌아왔지.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여행이 시작되었다네. 처음에는 마을 밖으로 나간다는 것에 마냥 좋았었지. 하지만....”

    마수와, 몬스터 그리고 이교도, 기사단들과의 접전.

    -두근.

    평온하기 그지없던 유세현의 심장이 조금씩 빨라진다.

    이 이야기는 분명히 자신이 했었던...

    “그리고 마지막에는 엄청난 마수들이 우리를 납치하기 위해서, 기사단과 교단은 우리를 처리하기 위해서 몰려왔었지.”

    카텐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전부 상대했다네. 고작 5명이서 말일세. 화염이 일렁이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보라가 휘몰아쳤지. 그 와중 나를 지키다가 돌아가신 어른도 계셨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네.”

    “......”

    “또 그때, 친했던 친구 한 명이 납치를 당했네. 이름은 캐서린이었지. 그녀가 마족을 강림시킬 제물이었던 걸세. 스승님과 4명은 그녀를 구하러 떠났네. 그리고 악마가 세상에 강림하는 일은 없었네. 아마도 어떻게든 부활을

    저지한 게 아닐까 생각이 되네만...그 이후로 그들 중 누구와도 만나지 못했지.”

    아린의 표정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아! 말이 중간에 딴 데로 샜구먼. 아무튼 4명의 이방인 중 3명의 이름은 상당히 독특했지. 외우기 힘든 이름이었지만 어르신들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계속 일러준 덕에 아직까지 기억한다네.”

    “......”

    “분명, 김주희. 이강호. 유세현이라고 했었지.”

    말을 들은 유세현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간다.

    “네 명 다 무척 강했다고 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유세현이라는 자가 무척 월등히 강했다고 들었었네. 그는 칠흑같이 새까만 검을 사용했으며 그의 근처로 다가온 마수들은 전혀 맥을 추리지 못했다고 했지. 허허허. 아무튼 그

    런 걸세. 자네의 이름과 월등한 능력을 보고 있자니 그가 떠오르는구먼...체격이나 얼굴도 아마 비슷했던 것 같네만...”

    유세현의 귓속에서는 더 이상 아린의 말이 들리지 않고 있었다.

    과거가 바뀌었다?

    혹은 자신이 갔던 곳은 과거의 알테리아 대륙이 아닌 그것과 똑같은 평행세계였단 말인가.

    만약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면?

    현재의 자신은 평행세계에서의 판도라에 있는 것인가.

    혼란스러웠다.

    만약 추측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야 되지?

    그때 아린이 유세현의 어깨를 툭 쳤다.

    “바로 이곳이네. 나도 멀리서만 봤지 이렇게까지 가까이 와보는 건 처음이네만 일단 들어가도록 하지.”

    높디높은 담.

    덩굴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무척 익숙한 느낌이었다.

    유세현은 식물의 틈사이로 외벽에 살포시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외벽을 이루고 있는 재질.

    이 감각.

    설마?

    유세현의 눈가가 진동했다.

    그는 좌측에 위치해 있는 식물이 특히나 많이 둘러싸여있는 외벽을 향해 나아갔다.

    “어디 가는 겐가? 그쪽은 입구가 아니네만.”

    아린의 말을 무시하고 검으로 덩굴을 잘라버린 유세현이 검지로 특정부분을 눌렀다.

    -지이잉.

    독수리, 사자, 뱀 등.

    무척 잘 아는 문양이 나타난다.

    ‘역시 이 건물은...’

    내부로 들어서자 아린도 잔뜩 놀란 눈이 되어있었다.

    그래, 알테리아 대륙인이라면 결코 모를 리 없겠지. 저 높은 곳에 새겨져있는 독수리 문양의 의미를.

    그렇다. 이곳은 황성.

    판도라, 지역 페토리안에 인간이 세운 가장 웅장한 건축물.

    뇌리 속에 수많은 갈래번개가 번개가 내리치며, 이전 이강호와 했던 대화가 불현듯 떠오른다.

    [야, 강호야. 그런데 이곳도 나중에는 결국 붕괴된다며?]

    [그렇지.]

    [그럼, 나중에 구름섬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다른 장소에 떨어져. 튜토리얼 같이 상당히 제약이 심하게 걸려있는 장소라 듣긴 들었는데...관심이 없어서 자세히는...]

    유세현은 곧장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테이블과 뒤집어져 있는 침대.

    그는 침대옆의 공간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래 이 공간.

    이프리트의 화염창만을 위해 설계놓은 공간.

    유세현은 깨달았다.

    이곳은 평행 차원 같은 것이 아니다. 이토록 완벽하게 똑같이 재현 되어 있는 것이 평행 차원일리가 없다.

    이곳은 미래.

    지역, 페토리안이 붕괴된 그 이후의 세계다.

    < 2존(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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