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195화 (195/612)

< 2존(5) >

“어디서 말인가? 이 세계에서?”

“예.”

“허허, 갑자기 황실의 모든 사람들이 실종돼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역시 이곳으로 이동되었던 것이었나...그래서,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는가? 1존? 아니...나보다 먼저 이동했으니 그곳에 있을 리가 없을 터인데.”

“예, 맞습니다. 다른 장소입니다.”

그렇다, 전혀 다른 장소. 자신이 되돌아가려하는 장소.

“가는 법은 지금 저도 모릅니다.”

“흠...그렇구먼...아직 죽진 않았다는 말이지...”

유세현은 모든 것을 밝히지 않았다.

밝혀봤자 구름섬, 1존의 전처를 밟아온 그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킬 뿐더러, 행여나 이곳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설계된, 유적처럼 거짓된 세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계속 나아가다 보면 분명 답에 도달하겠지.’

물론, 그럼에도 아린의 표정은 이전보다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가 진짜고 아니고를 떠나서, 지성과 기억을 지니고 있는 이상, 이벨린이 아직 생존해 있다는 것과 그런 그녀의 행방을 알려준 유세현에게 비로소 신뢰를 가지게 된 것.

대화가 뚝 끊기며 깊은 정적이 흐른다.

아린은 어느새 턱수염을 붙잡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무엇인가를 심히 고심하는 표정.

그렇게 수 분,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벨린에게 나에 대해 들었으니 내 주력기가 무엇인지 잘 알 것이라 생각하네만...”

“예. 마법이시지 않습니까.”

“그래 맞네. 덕분에 이곳에서 나는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지.”

마법사는 본디 적재적소에 알맞게 마법을 사용함으로서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보조마법으로 적의 발목을 붙잡고, 강력한 화력으로 없애버리는...

허나, 빌어먹을 법칙으로 인해 현재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은 오직 3가지였다.

그렇기에 현재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몸을 지켜주는 블링크, 광역마법인 파이어 레인, 그리고 강력하고도 무척 빠른 윙 블래스터였다.

보조마법이나 방어마법, 그 무엇도 사용할 수 없다.

“조만간 우리는 관문으로 향할 걸세. 선택이 아니네. 가지 않으면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니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지. 그리고 그것은 자네도 마찬가지지.”

“그렇죠.”

“그리고 자네는 1000명을 혼자 상대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지.”

“예.”

“그렇다면 자네는 지금처럼 홀로 오크들을 뚫고 관문을 클리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만.”

“예, 전부 맞는 말입니다만, 제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유세현이 까놓고 말하자, 아린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그리 말하니 내 바로 말 함세. 나로서는 이 집단을 이끌기에는 힘에 부치네. 자네가 이들을 인도해줬으면 좋겠네만.”

리더제의.

아린이 이런 말을 왜 꺼냈는지는 대충 예상이 간다.

유세현이 혼자 관문을 클리어하고 다음 존으로 휙 가버릴 수도 있으니까, 대우를 해주면서 붙잡으려는 것이다.

허나.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이들에게는 강자가 필요하네. 염치없지만...내 이렇게 부탁함세.”

“강자가 필요한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강자가 필요한 것이지 강한 지도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죠.”

그 말을 들은 아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 뜻은.

“그냥 도와주겠다는 겐가?”

“예.”

유세현은 애초부터 이들을 모른 척 버리고 갈 생각도 없었다.

하늘에서 내린 코인의 비.

분명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이 지경에 이르기 까지 자신에게도 분명 책임은 있었으니까.

또한 고서클의 마법을 지닌 아린을 살려둔다면 추후 엄청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애초에 홀로 갈 생각이었다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리라.

“다만 지금부터는 이곳을 벗어나기까지 제 지시를 절대적으로 따라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에 아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유세현이 리더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를 깨달은 것!

인지도의 차.

그래, 누가 감히 믿을 수 있겠는가.

홀로 천 명을 당해냈다고.

귀찮게 증명 할 바에는 아린이 이끄는 것이 훨씬 났다.

“혹, 행여나 생각해둔 계획 같은 것은 있는가?”

“예.”

“그, 그게 뭐죠?”

지금껏 숨죽이고 듣고 있던 카텐이 물었다.

이곳에 온지 일주일도 안 됀 그다.

그런데 계획?

유세현은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오크들을 전부 죽일 것입니다.”

“......”

두 사람의 눈이 파르르 지진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줄곧 생각해왔지만, 압도적인 차이 때문에 시도할 수 없었던.

사실상 2존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 * *

마력을 제약 없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적 진형의 취약점을 항시 꿰뚫고 있다는 것과도 다름이 없다.

그것을 토대로 작전 명령을 전달 받은 카텐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4관문까지 한 번도 적과 마주치지 않았던 건가.”

무슨 스킬인지는 알려주지 않아 지금도 모른다.

허나, 그가 짠 작전은 적의 형태를 파악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것이었다.

정말 대단한 작자.

그러나 이러한 작전마저도 엄청난 죽음의 위기를 극복해야만 한다.

카텐은 몇 번이고 읊조렸다.

살아남을 수 있다. 살아남을 수 있다. 반드시 살아남을 것이다.

다른 생존자들도 각자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때문일까?

유세현의 표정도 무척이나 진중했다.

사실, 그들 때문은 아니었다.

남은 2개의 스킬을 무엇으로 할지 결정해야하는데, 전부 좋은 스킬들뿐이라 고뇌가 되풀이 되고 있는 것.

‘흠...’

그의 시선은 스킬창에 위치한 천마혈사장에 가 있었다.

광범위하고 위력적이라 다수의 적을 빠르게 처치하기에는 최고로 좋은 스킬이었기에.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게 아니다.’

행여나 다음 존으로 이동했음에도 법칙이 풀리지 않는다면?

엄청나게 강한 존재가 있다면?

‘범위기술은 암흑투기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다면...’

기동력을 생각하자면 일단 천마군림보는 빼먹을 수가 없다.

유세현은 천마광룡참과 흑뢰검을 반복해서 바라봤다.

천마광룜참은 일격.

흑뢰검은 지속력.

‘내 마력량이 그리 높지 않으니까...’

일단은 흑뢰검으로 정해만 두고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융통성 있게 스킬을 바꾼다.

유세현은 가부좌를 틀었다.

상대적으로 능력치가 낮은 이곳에서 스텟을 복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일단은 천마신공의 숙련도라도 올려둬야 되지 않겠는가.

-스스스.

집중하자 어둠의 마력이 천마가 만들어준 혈을 따라 돌았다.

하지만 뭔가 매끄럽지 않은 느낌.

내공을 수련하기에 제일 편한 자세라 지금까지는 줄곧 따라 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해도 유세현에게는 불편할 뿐이었다.

‘자세를 바꿔봐?’

유세현은 몸을 뒤척였다.

가장 편한 자세라 치자면 현대인답게 당연히 눕는 것이지만. 이건 너무 대놓고 무방비하다.

무방비하지 않으면서도, 편한 자세.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쪼그려 앉은 유세현이 검을 끌어안았다.

이 세계에 떨어진지 첫날 밤 이후로 취침에 들 때마다 유지한 자세.

그래, 이제는 이 자세가 제일 편하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마력을 순환시켰다.

나중에 아린이 급하게 찾아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유세현은 그날만 해서 5%의 숙련도를 올릴 수 있었다.

* * *

섬이 가라앉기까지 9일.

섬의 외곽지역에 위치한 땅의 일부는 침수되었으며, 내부 땅은 스며든 물에 의해 진흙이 되어가고 있었다.

“취익, 기분 나쁘군.”

5관문의 외곽에 배치되어 경계를 하던 오크 한 마리가 인상을 잔뜩 구겼다.

그러자 다른 오크병사 툭 말했다.

“쓸데없는 짓 말고 경계나 잘해라. 인간 놈들 마구를 손에 넣은 것 같으니까.”

“취취취! 그래도 상황은 이미 기울었다. 병력의 차와 스텟의 차가 얼마나 나는데...”

그 순간.

오크 두 마리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며 가슴을 쥐어 잡았다.

“커...컥. 이게 뭔...”

“와아아아아!”

숲 속에 광활하게 메아리치는 함성.

죽음을 각오한 생존자 수천 명이 미친 듯이 오크들을 향해 진군했다.

* * *

피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한다.

“허억, 허억...”

격렬하게 움직이던 생존자들은 숨을 골랐다.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전투.

돌격전에는 상당히 많은 인원이 죽을 것이라 예상했었으나, 땅에 쓰러져 있는 대부분은 오크들뿐이었다.

생존자들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한다.

오크들은 이렇게 약하지 않을 터인데.

그때, 한 남성이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손을 힘껏 들어올렸다.

“빌어먹을 오크새끼들을 전부 부숴버리자!”

“우와와와와!”

세계를 꿰뚫을 것만 높이 치솟는 기세.

오늘에서야 유세현의 진면모를 확인한 아린도 한마디 내뱉었다.

“정말 대단하구먼. 어떻게 이런 스킬을...”

“이제 시작입니다. 적도 이제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챘을 테니 말이죠.”

“확실히...바로 다음지시를 내리도록 하겠네.”

아린의 명령에 따라, 진즉 계획했던 것처럼 생존자집단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 * *

“키르갈님! 제 3부대가 공격을 받았습니다!”

“제 3부대? 거기는 예상경로의 반대편일 텐데? 아니, 그보다 피해는?”

“수십 명을 제외한 모두가 당했습니다. 인원이 그나마 적은 곳을 노린 것 같습니다.”

“그렇군...적의 피해는?”

“알 수 없습니다.”

“알았다. 전 병력을 그곳으로 집중시켜라.”

“제콸께서 이미 그렇게 명령을 하달하셨습니다.”

“크...그래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키르갈이 그 육중한 신체를 웃도는 배틀엑스를 집어 들었다.

* * *

-투두두두!

빠르게 움직이는 발걸음만으로 대지가 진동한다.

기습으로 상당히 많은 인원을 죽였음에도 오크들은 끝없이 몰려들었다.

마치, 마르지 않는 바다처럼.

병력의 차이는 2배. 허나,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압박은 수십 배가 된다.

홀로 2명을 죽이면 끝나는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오크들의 기본 스텟이 더 월등하다.

유세현의 암흑투기가 전 지역을 커버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서로 죽이고 죽이는 살육전은 계속 되었다.

서로 뒤엉키는 살점과 피.

때마침 시전한 아린의 불의 비가 오크들을 향해 쏟아졌다.

“크아아악!”

속성저항력은 일반 저항력보다 올리기 힘들기에 화살에 맞은 수 백 마리의 오크들은 그대로 재로 변해버렸지만.

10마리의 오크 투사가 아린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그는 현재 최대한 많은 인원들을 살리기 위해 유세현과 정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다.

노인답지 않은 날쌘 몸놀림을 보이며 공격을 피하는 아린.

그러나 그것도 곧 한계에 봉착했다.

“큭!”

허술하게 휘두른 검이 도끼에 막혀 튕겨져 나간다.

곧바로 오크의 반격이 이어졌다.

-촤악.

피하려고 황급히 몸을 던졌지만, 도끼의 날이 아슬아슬하게 왼쪽 허벅지를 스친다.

정말로 스친 것에 불과하지만 어찌나 두꺼운지 허벅지의 살점이 1/4 정도 떨어져나갔다.

“크으...”

아린은 입술을 악물었다. 왼쪽에 있던 투사가 검을 치켜올렸다.

“취취! 잘 가라!”

그리고는 그대로 검을 내려치려는 순간.

오크투사들의 몸이 일제히 정지했다.

“취...취익?”

-사사삭.

땅으로 떨어지는 목.

아린의 눈이 놀라움에 물드는 반면, 유세현은 살짝 혀를 찼다.

이 영감...

무기를 잘 다루지 못한다.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맨몸으로 이 장소에 떨어진 현대인과 달리 마법사는 처음부터 몬스터를 처리할 수단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무엇보다 강력한.

마법이란 것을.

살아남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를 필요가 없었던 만큼, 아린은 근접전에 취약했다.

유세현은 계속에서 적을 도륙해 나갔다.

이를 높은 장소에서 주시하고 있던 키르갈이 제콸을 향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는 이곳에 있어라.”

“...예? 그게 무슨 말씀...”

“저놈...예삿 인간이 아니다.”

키르갈은 유세현을 육체를 옭아매는 마구의 사용자로 판단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과는 별개로 너무 강해 보인다.

승산이 없을 정도로.

“그렇다면 둘이서 달려드는 것이!”

“아니...나랑 멀리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너뿐이다. 내가 만약 잘못되면 네가 카취님께 가서 놈에 대해 알려라.”

“그럴 순 없...”

“죽겠다는 게 아니다. 놈에 대해 알아낸 다음 빠질 수 있으면 빠지도록 하마. 이 전투...우리의 패배다.”

< 2존(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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