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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174화 (174/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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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곳에 머물고 계셨군요.”

    “오라버니!”

    남궁시영이 벌떡 일어섰다.

    약 한 달 만에 재회해서 그런 것인지 무척이나 기뻐 보이는 표정.

    반면 일행의 눈빛은 착 가라 앉았다.

    유세현이 미끼를 푼 지 이제 한 달.

    슬슬 물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첩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남궁표가 찾아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기 때문.

    “하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가주님.”

    “정말요. 그간 잘 지내셨어요?”

    “세가에야 뭔 일 있었겠습니까. 그보다 소가주님께서야 말로 괜찮으십니까? 습격이 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남궁표의 표정은 아무것도 멋모르는 타인이 보기에는 진심으로 남궁시영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행은 일단 잠자코 지켜봤다.

    “예, 이것도 들으셨겠지만, 다행이도 여기계신 은공님들 덕에 무사히 격파했어요.”

    “하하, 소가주님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세현은 남궁표가 청해오는 악수를 받아주었다.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빙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님을 깨달은 것.

    “끌끌, 난 이만 가보도록하마.”

    “벌써 가시게요?”

    “그랴, 성격고약한데다가 눈치 없는 노친네까진 되기 싫어서 말이지.”

    “에이,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그럼 내일 봬요. 할아버지~”

    “예끼 이놈! 되었다. 오지 말거라!”

    “히히~알겠어요 알겠어요. 그러니 내일 뵐게요 할아버지~”

    김주희는 빙제를 객점 바깥까지 마중해주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빙제를 알아본 남궁표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렸다. 이제 막 무림에 출사한지 얼마 안 된 신출내기들이다.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벌써 저 까탈스러운 노친네와 식사를 함께할 정도로 친해지다니.

    ‘2~3일은 그래도 두고 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 일을 빨리 처리해야겠어.’

    그때 남궁시영이 툭 물었다.

    “오라버니. 그런데 이곳까지는 어쩐 일로?”

    남궁표가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었다.

    “하하, 제갈세가에 일이 있어 향하던 도중 잠시 들른 것입니다. 내일 바로 떠날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오늘은 여기서 머무르실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오! 그럼 오늘은 계속 볼 수 있겠네요.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아직 입니다.”

    “그럼 드시면서 이야기나 계속...”

    일행에게 양해를 구한 남궁시영이 남궁표와 함께 다른 테이플에 착석했다.

    유세현은 남궁표를 스쳐지나가며 그가 데려온 인원들을 살폈다.

    도합 10명.

    남궁시영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적어도 마교의 인원들은 아닌 게 분명했다.

    방안으로 돌아온 일행은 곧장 의견을 나눴다.

    “선배님, 저들이 어떻게 계략을 걸어올까요?”

    “흠...지금 생각할 수 있는 건 크게 2가지 정도지.”

    하나는 밤을 틈타는 기습.

    또 하나는...

    내일 떠난다는 남궁표의 말을 떠올린 유세현이 말했다.

    “바깥으로 유인하는 거겠지.”

    “흠...유인책의 경우에는 남궁시영씨가 무조건 걸리겠네요. 제가 볼 때는 두 번째를 행할 확률이 높을 것 같은데요?”

    “응, 내 생각도 그래.”

    준비를 어느 정도 해두긴 했다.

    도시 근처에 마수로 제작한 키메라들와 구울들을 숨겨두었으니까.

    신호를 보낸다면 뛰어올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도 적의 수와 수준을 모르기 때문에 안도할 수는 없었다.

    지원군이 더 필요하다. 그것도 고수들로.

    “강호야 태양신공 어느 정도까지 전수받았냐?”

    “거의 다.”

    “흠...그럼 완전히 끝난 건 아니네.”

    “그렇지.”

    유세현은 아쉬웠다.

    전수가 끝났으면 망설임 없이 끌어들이는 것인데.

    ‘흠...그럼 누굴 끌어들여야...’

    생각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비무를 벌였다고는 하나, 친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기껏해야 생각나는 것은 개방이 의뢰를 받는다는 것뿐.

    그때였다.

    고심하는 유세현의 뇌리 속에 문득 두 사람이 떠올랐다.

    ‘후우...그놈들은 싫은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유세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내가 두 명 포섭해볼게. 강호야 네가 개방에 호위 의뢰 좀 넣어봐.”

    “흐음...안 받을 가능성이 높지만...알았다.”

    일행은 곧바로 찢어졌다.

    * * *

    유세현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음식점 앞이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간드러진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나갈까? 내가 아주 천국을 보여주도록 하지. 하하!”

    “아이~형님도 참.”

    문제는 어조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

    형님이라니?

    거기다가 목소리도 칼칼했다.

    유세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섭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그에게 손도 댈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가 뭣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이 음식점은 아니, 음식점처럼 가장해있는 이곳은 게이들의 모임 장소였다.

    과거 남궁시영이 만류할 새도 없이 멋모르고 들어간 장소.

    그는 이곳에서 멸문한 사천당가의 후계자 당운룡과 이연검공의 후계자 강태월과 처음으로 조우했었다.

    유세현은 가게 안을 쓰윽 훑었다.

    몇몇과 눈이 마주친다. 이윽고 날아오는 윙크.

    ‘옘병...’

    그가 동성애자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취향은 제각각이니까.

    존중해줘야 되지 않겠는가?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애자인 자신이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싫었다.

    두리번거리던 유세현의 눈이 이윽고 한곳에서 멈췄다.

    항상 웃고 있는 눈과 미공자처럼 생긴 얼굴.

    유세현은 찝쩍대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당운룡에게 다가갔다. 그 옆에는 역시나 강태월이 함께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오! 세현공 아니십니까!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유세현은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들에게 작업을 걸었다.

    * * *

    유세현이 당운룡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강호는 개방으로가 호위 요청을 했다.

    허나, 정사대전으로 상당수의 고수들이 죽어간 턱에 개방은 예상처럼 의뢰는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이강호는 최후의 비책으로 마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허나.

    “그래서? 우리더러 지금 우르르 튀어나가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교인들을 잡으라는 겐가?”

    “주민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허허,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건 자네들이 현재의 상황을 몰라서 할 수 있는 말이네. 지금 어떤지 아는가? 개방은 모름지기...”

    개방은 정보로 유명하다.

    낮말을 새가 듣고 밤 말을 쥐가 듣는다면, 개방 사람들은 이 새와 쥐가 하는 말을 듣는다고 불릴 정도였으니까.

    허나, 지금에 이러서는 그것도 다 옛말이었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현재, 그들은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정보를 얻지 못하는 중이었다.

    “자네가 요새 떠오르고 있는 신출내기라는 건 알고 있네. 양의궁제와 비겼다고 했지? 내 생각에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웬만한 교인에게는 절대 당하지 않을 것이네.”

    똑같은 거절.

    현 상황에서 교인들이 침공이라도 하지 않는 한 도움을 받아내는 것은 역시나 불가능한 것이다.

    그 이후 이강호는 다른 문파를 돌아다녀 봤지만 결국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다음날이 찾아왔다.

    * * *

    “김주희. 오늘은 언제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그 영감님께는 가지마라.”

    “예, 알고 있어요.”

    김주희가 입맛을 쩝 다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겠다는 말을 차라리 하지 말걸.

    비록 빙공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수많은 대화를 나눈 현재 그녀는 부모보다도 빙제에게 더 마음이 갔다.

    ‘나중에 잘 말하면 이해해 주겠지. 그래보이셔도 내치진 않으니까.’

    그때, 유세현이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강호가 태양신공을 전부 전수받을 때까지 마땅한 낌새가 보이지 않으면 그냥 포기해.”

    “예?”

    “언제까지고 잡혀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내가 봤을 때 넌 할 만큼 했어. 아니면 추후에 다시 도전하던가.”

    “...예. 알겠어요.”

    잠시 망설이던 김주희는 아쉬움을 머금으며 수긍했다.

    유세현은 종이책 하나를 손에 얹어주었다.

    한 순간 크게 커지는 김주희의 눈동자.

    “선배님 이건?”

    “그래, 사천당가의 비급서야. 정말 운 좋게 얻었다. 최고의 독공이라니까 응용하면 많이 좋을 거야. 가지고 있다가 추후 마음 정해지면 써라.”

    “...고마워요 선배.”

    김주희가 포켓 속으로 비급서를 집어넣었다. 유세현의 시선이 오른편을 향했다.

    저 멀리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는 남궁시영과 남궁표가 보인다.

    마침내 떠나는 것.

    ‘이제부터 시작인가.’

    대개 여행자들은 해가 떴을 때 출발하기 때문에 둘과의 식사 시간은 일부러 아침으로 잡았다.

    거절하면 어쩌나 했지만, 둘은 다행이도 거절하지 않았다. 아니 되려 셋이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아침을 먹자고 꼬리쳤다.

    어제 일을 떠올리자 오한이 전신을 감싼다.

    당운룡과 강태월은 나쁜 인품을 지닌 이는 아니었지만, 취향이 다른 만큼 정이 안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소가주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여행길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예, 그럼 나중에 또...”

    이윽고 남궁표가 떠났다. 얼마 뒤 나타난 두 사람이 유세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하, 세현공. 내가 왔소.”

    유세현은 둘과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남은 시간동안은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유세현으로서는 단순히 시간을 끌 생각으로 한 말이었지만, 당운룡과 강태월도 떠날 생각이 없었는지 이를 잘 받아주었다.

    당운룡은 세가의 모든 사람들을 잃었을 때 강태월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강태월 또한 당운룡을 많이 의지했다고 한다.

    거기서 아름다운 사랑, 혹은 성 정체성이 눈 뜬 모양이었다.

    덕분에 무공서를 탈취당한 것도 아직 눈치 채지 못한 모양.

    아니, 어쩌면 큰일을 겪은 뒤 무공에 아예 관심을 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아까부터 그들이 자꾸 내뱉고 있는 대화의 주제가...

    도발적인 강태월이 유세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서 말인데 세현공. 거리낌이 없다면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떻겠나? 좋은 경험이...”

    유세현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날릴 뻔했다.

    “하하, 죄송하지만 저는 그쪽 취향이 아니라...”

    그렇게 버티길 3시간.

    정오쯤 되어 점심을 먹어야 될 때쯤 객잔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피로 얼룩져있는 무복과 군데군데 나있는 생채기.

    너무도 뻔한 3류 스토리였기에, 익히 짐작하고 있었던 일행은 표정하나 안 바뀌는 반면, 남궁시영의 얼굴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검풍대주님!”

    경신술을 펼쳐 순식간에 달려간 남궁시영이 쓰러지는 남성의 몸을 부축했다.

    “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서, 설마?”

    “크...크윽...마, 마교 놈들이...”

    무척 비통한 표정.

    유세현은 이 순간 검풍대주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었다.

    배우 뺨싸따구 후려치는 연기 때문은 아니었다.

    당운룡과 강태월. 이 둘과 대화를 나눌 바에는 차라리 싸우는 게 나을 것이었기에.

    불편한 자리를 단번에 박차고 일어난 유세현이 허겁지겁 남궁시영을 향해 뛰어갔다.

    “무슨 일입니까!”

    “그, 그게 오라버니께서...”

    남궁시영은 남궁표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안전부절 못했다.

    “개, 개방에 이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겠어요!”

    이에 검풍대주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크...크윽...소, 소용없을 겁니다.”

    “예?”

    “지, 지금은...누구도 움직여주지 않을 겁니다. 저희가 당할 정도라면 더더욱...”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정파는 제 한 몸 가누기 힘든 반면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은 마교는 쌩쌩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이곳까지 전력으로 뛰어왔단 말인가.

    검풍대주는 은연중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시영을 따라 구하러 가라고!

    뻔히 보이는 의중을 숨기고 유세현이 낮은 어조로 물었다.

    “적의 수가 몇 명이나 되죠?”

    “스, 스무명 정도입니다.”

    “수준은? 스텟으로 말씀해주세요.”

    “그, 그건 잘...기습을 당해서...”

    검풍대주는 말을 무척 잘했다. 확실히 기습을 당했다면 실력과는 무관하게 당할 수 있으니까. 남궁시영의 눈이 이강호와 검풍대주를 번갈아봤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실례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그러는 것이었다.

    유세현은 이강호에게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이강호가 입을 열었다.

    “검풍대주님.”

    “크...예.”

    “앞장서실 수 있겠습니까? 위치는 어디죠?”

    “칼의 협곡입니다. 제,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좋습니다. 바로 가도록 하죠.”

    이강호의 말에 남궁시영이 거절하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정말 감사합니다.”

    일행은 곧바로 무기를 장비하러 객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막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당운룡이 유세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듣자하니 마교 놈들이 행패를 부린 모양이군요.”

    “의리가 있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우리도 도와 드리리다.”

    유세현은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역시 이놈들은 성품이 그리 나쁘지 않다.

    다만 여러 의미로 무서울 뿐...

    검풍대주를 선두로 그들은 빠르게 도시를 빠져나갔다.

    < 이중트랩(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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