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164화 (164/612)
  • < 남궁세가(1) >

    실버어레스트의 길드장 퓌렌트의 죽음.

    유세현이 손짓하자 지면이 매섭게 흔들렸다. 이전 프라비아에 발생했던 지진과는 한차례 다른 세기의 진폭이었다.

    -쩌저적.

    “뭐, 뭐야?”

    주민들의 당황 섞인 음성이 이곳저곳에서 빗발쳤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지진을 겪어봤지만 땅이 갈라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던 탓.

    유세현이 한 번 더 손짓했다.

    희생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져, 지금껏 고고한 자태를 뽐내던 건물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실버어레스트의 상징, 은빛사슬의 문양이 새겨져있는 돌덩이가 유세현의 발꿈치 아래로 굴러와 툭 부딪쳤다.

    그가 현재 파괴한 건물은 실버어레스트의 본사였다.

    “이, 이게 무슨...”

    몇몇 주민들이 놀란 눈이 되어 잔재를 쳐다봤다. 그들에게 있어서 건물의 붕괴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곳도 이제 위험한 거 아니야?”

    “...에이...설마...지금까지 괜찮았는데 왜 이제 와서...”

    그 말에 반응하듯 지면이 요동쳤다. 이윽고 일자로 갈라져 둘로 나뉘는 지면.

    갈라진 곳은 정말 우습게도 사람들이 다니는 도로 정중앙이었다.

    “미, 미친!”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저편으로 도망치자, 유세현은 그제야 지형 제어 권능을 해제했다.

    방금 전의 일은 편안한 삶에 익숙해져버린 제국인들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저 먼 치에 떨어져 지켜보고 있던 이한별과 이용석의 눈가가 잔잔히 떨렸다.

    그들은 현재 이강호에게서 대략적인 내용을 들은 상태였다.

    “후우...산 넘어 산이네요 한별씨.”

    “그러게요...”

    튜토리얼부터 지금까지. 이 세계에 도착해 단 한 번도 편히 쉬는 날 없이 보낸 그들이다.

    비록 안 좋은 일을 겪었지만, 그들은 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다. 더는 미친 듯이 강함을 추구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역시는 역시.

    붕괴 된단다. 나아가지 않으면 죽는단다.

    “던전을 돌아서 강해지세요.”

    때문에 유세현은 그들에게 던전의 독점을 권했다.

    그들보다 더 뛰어난 인재가 어딘가 있을 수도 있었지만,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연줄도 없는 이상 투자는 믿음직한 지인에게 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자금은 이걸로 해결하시기 바랍니다.”

    “...세현씨는 어디 가시는 건가요?”

    “강호와 합류하는 데로 타 지역으로 이동할 겁니다.”

    유세현의 말에 이한별은 살짝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또 만날 수 있겠죠?”

    “예, 물론이죠.”

    많이 강해진다면, 2차 튜토리얼때처럼 나란히 나아가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

    유세현을 바라보고 있는 이한별의 눈빛을 본 이용석이 시선을 유지하며 김주희를 향해 중얼거렸다.

    “세현이 인기 많은데? 관리 잘 하지 않으면 위험 하겠...”

    허나, 그는 말을 채 끝낼 수 없었다.

    강한 살기가 미간을 꿰뚫듯 쿡쿡 찌른 탓.

    깜짝 놀란 이용석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려는 순간 김주희가 그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하하, 선배님...”

    웃고 있지만 미묘하게 씰룩거리는 입가.

    동시에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서서히 들어간다.

    “지금은 그것보다도 앞으로의 일에 대해 걱정하는 게 우선 아닐까요?”

    대응할 수 없는 엄청난 완력이었다.

    장난이랍시고 말했던 이용석은 그 순간 깨달았다. 입을 완전히 잘못 놀렸다는 것을.

    “하하...그, 그렇지? 하긴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시죠?”

    “무, 물론이지. 나, 나는 언제 너처럼 강해질 수 있으려나? 하하하!”

    힘이 서서히 풀리자, 이용석은 식은땀을 닦았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살짝 쥔 것일 수 도 있겠으나, 이용석의 입장에서는 괜히 어깨가 작살날 뻔했다.

    그는 재차 다짐했다.

    앞으로 그녀 앞에서 유세현과 이강호, 둘의 연애사에 대한 건 결코 꺼내지 않기를.

    ‘아니, 그보다 진짜로 좋아하게 된 건가? 유세현을? 아니면 둘 다?’

    김주희가 둘을 졸졸 따라다닌 이유는 살기 위해서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유세현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뭔가 아련해보였다.

    ‘하긴 그렇게 붙어 다녔으니...’

    영화 같은걸 보면 위기 속에서 없던 애정도 생긴다. 구름섬에서는 실제로 그러한 이유로 연인이 되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런데 말도 못 꺼내본 건가? 저 여우같은 애가?’

    이용석은 피식 웃었다. 그사이 유세현은 이야기를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여기서 이만 헤어지도록 하죠. 지금부터 이전에도 말했듯 혼자서 처리하겠습니다.”

    “흠...같이하고 싶은데...”

    “형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장이 우선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휩쓸기 전에 던전 도세요. 정보는 레피아씨가 전해줄 겁니다.”

    “...쳇! 동생이 그렇게 말하면 어쩔 수 없지. 그럼 일단 다시 그 정보길드로 돌아가면 되는 건가?”

    “예.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고 동생!”

    이태광이 몸을 돌리자, 이용석을 포함한 이들이 전부 뒤따랐다.

    “우리도 가자.”

    “알겠습니다. 군주시여.”

    아퀼라가 잽싸게 달라붙고, 그 뒤를 김주희가 따랐다.

    -쿵쾅 쿵쾅.

    이용석이 아주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 김주희의 마음속은 끓는 용암이 되어 있었다.

    새삼 느끼고는 있었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본 적이 없기에 들지 않았던 확신.

    때문에 지금까지는 단순히 질투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허나, 이강호를 떠올릴 때와 유세현을 떠올릴 때를 비교해본 그녀는 지금 이 순간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이 유세현을 좋아하고 있음을.

    그와 동료 그 이상의 관계가 되고 싶음을.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고백을 한다는 것도 좀 이상했고, 선이 확실한 그가 행여나 거절한다면 서먹서먹해질 수 있기 때문.

    그래서 그녀는 다짐했다.

    모든 게 끝났을 때. 이 마음이 그대로라면 그때 제대로 고백하리라고.

    물론.

    “야! 아퀼라! 옆으로 좀 나와 봐.”

    그 사이 아퀼라가 유세현의 옆에서 찝쩍대는 건 눈꼴 시려워서라도 볼 수 없었다.

    * * *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공급 지부를 제외한 모든 판매지부를 철저하게 파괴해 나갔다.

    그사이 레피아는 정보를 널리 퍼트렸다.

    실버어레스트를 박살내고 다니는 사람은 노예제도에 가족을 잃은 자고, 퓌렌트는 그자에 의해 죽었다고.

    처음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허나, 퓌렌트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곧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실버어레스트 길드원들은 전부 잠적했으며, 노예를 매매하는 귀족들도 현저하게 줄었다.

    그리고 페토리안 지반의 완전 붕괴는 이태광이나 레피아 일행이 던전을 다 돌은 후 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걷고 또 걸었다.

    처음 떨어졌던 장소인 메마른 숲을 지나고 서쪽의 경계를 나눠주고 있는 레일산맥을 건넜다.

    C랭크 상급의 스텟을 지니고 있는 고위 마수가 때때로 출몰했지만, 더 이상 일행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페토리안 지역을 벗어나셨습니다. 지형 조종이 불가능해집니다.]

    공간을 넘어서자 찬 공기가 폐로 쑥 밀려 들려왔다. 또한 일렬로 쭉 늘어져 있는 대나무 숲이 유난히 눈에 띈다.

    동시에 느껴지는 마력덩어리들.

    전부 C랭크 이하의 마력이었지만, 유세현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이곳은 제국인들이 손을 뻗히지 못한 미지의 세계.

    무림인들이 판을 치는 곳.

    “강호야, 갈 곳은 정해뒀어?”

    “물론.”

    이강호를 필두로 그들은 매섭게 숲을 갈랐다.

    * * *

    무림맹.

    9파 1방 5대세가로 이루어진 이 연합은 피가 난무하는 무림의 세계에서 의(義)를 위하여 창설된 집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남궁세가.

    이강호가 접선하려하는 이 세가는 무림인들이 있던 세계인 중원에서는 꽤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정사대전으로 인해 개판이 되어있겠지만.

    “그 세가에 내 옛 동료가 있어.”

    “아...기억나 남궁시영이라는 사람이었나?”

    “맞아.”

    남궁시영은 남궁가의 차녀로서, 아녀자라는 신분답지 않게 무공을 익힌 인물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이들의 비호를 받아, 무림으로 진출하는 것.

    그리고 특성에 알맞는 무공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걔네들 무공전수 안 해준다며?”

    유세현이 말하자, 이강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무슨 뜻인지 유세현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강탈.

    “강호 선배님, 혹시 물 계열 무공도 있어요?”

    “흠...있긴 있지.”

    정확히는 빙공.

    하지만 이강호는 이 무공을 얻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5대세가의 절기를 사용하는 생존자는 본적이 있어도 빙공을 사용하는 사람은 본적이 없기 때문.

    “끙...”

    김주희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유세현이 툭 말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 같은 외부인을 받아줄까? 세가라면 한 가문인거잖아? 거기다가 자존심도 세다며?”

    “그렇지. 일반적으로는 안받아주겠지. 하지만 고수라면 말이 달라지지.”

    “흠...그래도 강자는 우대한다는 건가.”

    “그런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지금 세가 인원들은 상태가 별로 좋지 못 할 거야. 정사대전...내가 예전에 이야기 해준 거 기억하지?”

    “아...”

    그래, 한 번 신명나게 치고 박고 싸웠다고 분명 들은 바가 있었다.

    -스스슥

    문득 저편에서 매서운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강호에게 말해주자 그의 미간이 쓰윽 좁혀졌다.

    “세가의 일원인거 아니야?”

    “흠, 글쎄...도착하기까지는 아직 제법 거리가 남았는데...”

    “그럼, 일단은 가보자.”

    “그 편이 나을 것 같네.”

    일행이 거의 접근했을 때쯤에는 마력의 이동이 멈춘 상태였다.

    ‘마물이라도 만난건가?’

    아퀼라가 재빨리 제 3의 눈을 띄우자, 수정구슬 속으로 장면이 비쳤다.

    사람이 사람을 에워싸고 있는 형태.

    무복을 입은 30여명의 무사들이 5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인원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크크, 오늘은 운이 좋군. 남궁세가의 일원들이라니...얌전히 따라온다면 목숨에 위해는 가하진 않겠다. 물론, 거기 있는 여자는 좀 험한 꼴 좀 봐야 하겠지만 말이야 캬하하하!.”

    “...마교인가. 이제는 숨기지도 않는군.”

    “크큭. 너희들이 알아서 파멸해준 덕분이지!”

    “......”

    조롱에 남궁세가의 일원들이 마력을 개방하며 검을 집어 들었다.

    시퍼렇게 맺히는 강기.

    이에 둘러싼 무사들이 재차 조소를 내뱉었다.

    “크큭! 그 정도 강기는 이제 우리도 사용할 수 있다고?”

    “......”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어 올린 여자를 본 유세현이 이강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강호야 저 여자 혹시...”

    “그래, 맞아. 저 여자가 남궁시영이야.”

    “흠...역시.”

    남궁시영은 B랭크에 육박하는 제법 높은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최소 C랭크 95% 이상.

    적들도 제법 강하기는 했지만, 이에는 미달하는 수준.

    “가만히 있어도 그냥 이길 거 같은데...지금 나갈까?”

    “흠...”

    무공을 지닌 자의 특징은 스텟의 차를 어느 정도 메울 수 있다는 것이다.

    유세현이 암흑투기라는 사기적인 스킬을 지니고 있어서 그렇지 보통이라면 잔뜩 긴장해야되는 것!

    또한 비율은 무려 5대 30으로 1명이서 6명을 상대해야 되는 상황.

    미래를 생각하면 남궁시영이 이곳에서 당할 일은 없을 테지만, 이강호는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이강호가 입을 열었다.

    “위기는 올 거야. 아슬아슬 할 때 나가자.”

    * * *

    “네놈들은 뭔데!!”

    마교의 무사가 발작을 일으키듯 검을 마구잡이식으로 휘둘렀다. 허나, 그 검은 유세현의 갑옷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무사가 무릎을 털썩 꿇었다.

    “마, 말도 안돼...대체 이게 무슨...”

    -서걱.

    더욱 강해진 암흑투기에 짓눌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무사의 목을 순식간에 취한, 유세현이 남궁시영을 돌아봤다.

    “괜찮으신가요?”

    < 남궁세가(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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