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154화 (154/612)
  • < 공방전(2) >

    한 문장 한 문장,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해 책을 읽어나가는 이벨린의 눈에는 이채가 잔뜩 어려 있었다.

    재료의 선정, 이어붙이기, 배합까지.

    키메라를 제조하기 시작한 처음부터 하나하나 꼼꼼히 저술해서 그런지 레이커드만의 키메라 제조법은 이제는 실전된 정통 마법서처럼 그 내용이 무척 깊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한 단서.

    ‘아...그래서!’

    그녀는 기쁨에 차 유세현을 쳐다봤지만 아쉽게도 밤이 깊어 잠들어있었다.

    깨 있는 사람은 경계를 취하고 있는 김주희와 이강호 뿐.

    교대 한 뒤 일러주리라 생각한 그녀는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나갔다. 단서는 끝부분에 있었기에 책을 완전히 독파하는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실로 오랜만에 드는 충족감을 느끼며 이벨린이 책을 덮은 순간이었다.

    [레이커드만의 비법서를 독파하셨습니다. 스킬, 키메라 제조술을 익힐 수 있습니다.]

    [제약: 어둠의 마력 사용자.]

    ‘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이 아이템 자체가 스킬 코인이었단 말인가?

    ‘아니, 그건 아니야.’

    스킬코인이었다면, 즉시 흡수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지 않았다.

    -꿀꺽.

    이벨린은 침을 삼켰다.

    무려, 레전더리 등급의 아이템.

    이는 그녀가 배운 정통마법과 똑같은 등급이었다.

    단, 소모적인 마법과 달리 지속적으로 군단을 지니는 것이 가능하니, 그 효용성은 가히 이루어 짐작할 수 없다.

    가지고 싶다. 익히고 싶다라는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허나, 아쉽게도 그녀는 어둠의 마력사용자가 아닐뿐더러 책의 주인도 아니었다.

    “세현아, 교대 시간이다.”

    “으...추워.”

    때마침 기상한 유세현이 팔을 문질렀다.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냉기 속성 저항력이 상당히 높아졌다지만, 잠을 자게 되면 신체의 특성상 온도가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유세현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이벨린의 옆으로 다가갔다.

    “진척이 있나요?”

    “아, 예. 알아냈어요.”

    “오, 진짜요? 설명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이제 더이상 그쪽이 중요한 게 아니었지만, 이벨린은 일단, 알아낸 바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레이커드만의 키메라로 일으킨 구울이 오래가는 이유는, 마력을 한곳에 잡아둘 수 있는 특수한 주머니를 체내에 이식 시켜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구울은 어둠의 마력이 육신의 전체에 퍼져있어 동시다발적으로 소비가 이루어지지만, 키메라는 한곳에 뭉쳐 있다가 필요시에만 사용하기 때문에 더 폭발적인 움직임이, 그리고 쓸모없는 소비를 현저히 줄일 수 있

    다.

    ‘한곳에 잡아 둔다라...’

    문득 아키몬드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돌이켜보면 놈의 언데드는 자신이 일으킨 것과 달리 마력이 한곳에 집약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뛸 수 있었던 건가.’

    단순히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모르고 있던 사실.

    “하지만 세현씨,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아요.”

    “예? 그게 무슨...”

    “세현씨는 혹시 이 저술서를 끝까지 읽어 보셨나요?”

    이벨린의 물음에 유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대충이라도 이해가 가야 읽어볼 터인데, 당최 뭔 내용인지 알 수 없으니 전혀 손을 댈 수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언젠가는 도움이 될까 막연한 생각을 가진 채 책을 지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벨린이 차분히 입을 뗐다.

    “세현씨 잘 들으세요. 이 책...”

    내용을 듣는 유세현의 눈빛이 점점 날카롭게 변했다.

    * * *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나는 군요.”

    유세현은 장장 다섯 시간에 걸쳐 속독을 이용해 저술서를 독파한 상태였다. 허나, 이벨린의 말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흠...어느 정도 이해를 해야되나보네요.”

    “......”

    유세현의 얼굴에 살짝 실망감이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키메라는 살아있는 생명체였기에, 한번 마력을 주입시키면 먹이를 이용해 마력의 자급자족이 가능하기 때문.

    아무튼 레이커드만의 저술서를 지금 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기에, 유세현은 마력을 뭉쳐 주입시키는데 힘을 썼다.

    마력을 느끼고 보는 것부터 애초부터 잘 맞아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난이도가 의외로 쉬운 것인지, 컨트롤은 생각보다 쉬웠다.

    -크르르르.

    팔, 복부, 심장, 머리.

    이교도들과의 조우까지는 아직 이틀 정도의 여유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그는 실험 삼아 여러 군데에다가 마력을 부여했다.

    그중에서 제일 효율이 좋은 것은 복부였다.

    진즉 알아챘으면, 이전 알베타스와 벌인 전투에서도 훨씬 더 잘 싸웠을 터인데.

    스킬의 숙련도까지 빠르게 올라가는 건 덤.

    [언데드 레이즈의 숙련도가 100%가 되었습니다. 권능에 의해 언데드 레이즈의 랭크가 D에서 C로 승격됩니다.]

    [대상자의 육체 활용도가 보다 더 증가 합니다.]

    처음에는 마력만 무지막지하게 잡아먹고 쓸모하나 없던 스킬이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스킬이 되어버렸다.

    눈보라를 나아가고 있는 유세현의 눈앞에 문득 낡아빠진 건물들이 비쳤다.

    인기척이 하나도 없는 것이 이제는 한눈에 보기에도 폐쇄된 마을이었다.

    “놈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대략 10km정도. 이쪽방향으로 쭉 내려오고 있으니 여기 있다가 급습하자.”

    유세현의 제안에 따라, 일행은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폐가가 된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부서진 테이블과 나뒹굴고 있는 식기. 그리고 벽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검격의 흔적은 그 당시 학살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리고 다 부서져 눈보라가 비집고 들어오는 창고에는...

    “아...”

    이 집에 살았던 사람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아이를 안은 채 가슴이 꿰뚫려 죽어 있었다.

    강추위 때문에 부패가 거의 진행되지 않아서인지 애절한 표정이 너무도 또렷이 보인다.

    “심하군요...어떻게 진짜 아이를...”

    “그래도 아이는 행복 했을 것 같네요.”

    “예?”

    김주희의 이상한 반문에 이벨린이 살짝 인상을 구겼다.

    “아버지가 아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거잖아요.”

    “...그건 당연한...”

    “당연하지 않아요.”

    김주희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녀가 재차 중얼거렸다.

    “당연한건 세상에 없어요.”

    “......”

    뭔가 사연이 있는 듯한 말에, 이벨린도 이강호도 유세현조차도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유세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모르듯, 자신도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김주희가 죽은 시신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선배님 이 둘, 근처에 묻어주고 와도 괜찮을까요? 티 안 나게 빨리 다녀올게요.”

    “그래라.”

    허락이 떨어지자 밖으로 걸어 나가는 그녀의 겉모습은 평소와 다름이 없어 보였다.

    * * *

    마벨은 통신용 수정구를 통해 남하하는 자신의 부하들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정구에 대뜸 남녀 한 쌍이 비치자 그는 실소를 머금었다.

    이방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한눈에 봐도 여행자처럼 보였는데, 신도들에게 딱 걸리다니 운도지지도 없는 커플이었다.

    블러드 베어 앞에서 벌벌 떠는 듯한 모습이 굉장히 우스꽝스러워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장난을 칠 시간은 없었기에 신도들은 빨리 처리하고 떠나려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그 순간이었다.

    수정구가 일순간 번쩍 빛나더니 균열이 가기 시작 했다.

    이내 바스라져 가루가 돼버리는 수정구.

    마벨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그는 재빨리 예비용 수정구를 꺼내 가동시켰다.

    제일먼저 보인 것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자신의 신도들이었다. 연이어서 관측자가 움직일 때마다 주위 풍경이 비쳤다.

    마벨의 턱이 살짝 벌어졌다.

    “미, 미친!”

    한창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곳에서는 전혀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자신의 마수들이, 신도들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반응한 것은 마법서였다.

    “뭔가 아는 건가 악마?”

    [...구울화군. 흑마법의 일종이다.]

    “구울! 그렇다면 나 말고도 악마와 계약한 사람이 있다는 건가? 설마 저들도 강림시키기 위해서?”

    [크크크, 그건 걱정하지마라. 그 ‘아이’로 소환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후우...그렇다면 다행이다만. 저놈들은 대체 뭐하는...”

    피의 향연이 계속 이어진다.

    신도들은 조금씩이지만 밀리고 있었다.

    [적인 것만큼은 확실하군. 그리고 구울의 움직임을 보니 마력의 순도도 상당히 높아 보인다.]

    “그럼...”

    [최정예를 데리고 직접 나서라.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을 빌려주겠다.]

    “...어쩔 수 없군.”

    마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느새 전투는 끝나가고 있었다.

    * * *

    “허억...허억...”

    적은 무척 강했다. B랭크를 뛰어넘는 힘과 마력.

    더군다나 블러드 베어라는 놈은 광폭화 스킬이 있어, 암흑투기로 스텟을 낮췄음에도 미친 듯이 날뛰었다.

    거기다가 특수한 힘을 받은 집행자까지.

    진군을 멈추고 방심을 유도해, 처음부터 놈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지 못했더라면 시체가 된 것은 그들 쪽이었을 수도 있었다.

    “윽...”

    김주희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세현과 이강호는 다행이 치명상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벨린과 김주희는 달랐다.

    이벨린은 한쪽 팔이 잘려 나갔고, 김주희는 좌측 옆구리가 통째로 뜯겨져 나간 상황.

    “괜찮냐?”

    “하아...하아...괜찮아요. 이까짓 거...”

    몸을 일으키려던 김주희가 털썩 쓰러졌다.

    죽지야 않겠지만, 재생이 되어 완치되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 분명했다.

    소수 정예인 그들로서는 엄청 큰 타격이었다.

    이강호가 땀을 닦아내며 유세현을 향해 물었다.

    “키만이 어디까지 도망친 것 같아?”

    “아이들 때문인지 그렇게 많이는 못 갔어.”

    “후우...”

    좀 더 강해진 다음 들어와야 했던 것인가. 지나친 욕심이었던 것인가.

    이강호는 고개를 저었다.

    적은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밍그적거릴 시간은 없었다.

    어떻게든, 클리어하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주희씨는 못 걸을 것 같은데요.”

    “내가 들게.”

    다가간 유세현이 양손으로 김주희를 번쩍 들었다.

    일명 하여 공주님 안기.

    업거나 들쳐 멜 수도 있었으나 그래서는 내장이 바깥으로 삐져나올 염려가 있기에 안전을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

    “윽...죄송해요 선배.”

    “아니야, 적이 너무 강했어.”

    죽을 위기를 겪었지만, 그래도 수확은 제법 컸다.

    이번 전투로 인해 마침내 C랭크를 벗어나 B랭크에 도달한 것.

    더군다나, 힘과 민첩만 B랭크에 도달한 게 아니라, 체력, 마력 저항력 등 고루 갖추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던전을 완전 클리어 했을 때쯤에는 이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을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생존에 성공 했을 때의 이야기.

    도주의 활로를 뚫어줄 김주희가 당분간 전투 불능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단 귀환을 택했다.

    * * *

    한 번의 큰 패배.

    거기다가 성까지 공격당한 노르페움의 의회와 교단은 일을 완벽히 하기 위해 최정예로만 이루어진 집단을 꾸렸다.

    성기사단장 라벨 아디너스가 이끄는 [광휘의 창]

    근위 기사단장 브란 첼벨토가 이끄는 [붉은 십자가]

    그들은 각 개개인들이 B랭크에 달하는 스텟을 지니고 있었다.

    왕과 교주, 각 왕국과 교단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 그들에 각각 명령을 내렸다.

    “근위 기사단장 브란 첼벨토 경은 악마의 추종자들을 감싸는 자들을 멸하고, 그 근원을 제거하라!”

    “기사단장 브란 첼벨토. 명을 받들겠습니다!”

    “광명의 신 디에우스의 종복, 라벨 아디너스여...”

    이어서 곧바로 출정식이 이어졌다.

    그 강대한 마력이 일제히 움직이자 유세현의 어깨가 순간적으로 흠짓 들썩였다.

    “좀 더 발걸음을 빨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영감님. 노르페움에서 최정예 추격대를 꾸린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설마 마력을 감지 할 수 있는 겐가?”

    더 먼 곳에서 내려오고 있는 이교도들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유세현은 굳이 말을 꺼내 으스대지 않았다.

    “나도 빨리 가고는 싶네. 하지만 아이들이...”

    아이들의 수가 너무 많다. 어른은 100명도 안 되는 것에 비해 아이들은 300명이 넘기 때문.

    가끔 제멋대로인 아이들도 있었기에, 통제가 불가능 했던 상황까지 있었던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아르카드 제국군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 이강호가 고개를 저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은 어쩌면 아이들을 죽이는 쪽을 선택 했을 수도 있었다.

    “김주희 상처는 어때?”

    “괜찮아요. 싸울 수 있어요.”

    김주희의 말에 유세현이 새살이 돋은 부위를 검지손가락을 이용해 쿡 눌렀다.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들썩였다.

    “아!”

    “싸울 수 있긴 무슨. 제대로 말해.”

    “...많이 땡기긴해요. 욱신거리기도 하고. 그래도 진짜 싸울 수는 있어요.”

    “알았다.”

    퉁명스럽게 답한 유세현이 레이커드만의 저술서에 시선을 옮겼다.

    밤낮 없이 읽고 또 읽은 덕에 거의 다 읽어가는 중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장을 이벨린이 설명한 순간이었다.

    [레이커드만의 비법서를 독파하셨습니다. 스킬, 키메라 제조술을 익힐 수 있습니다.]

    [제약: 어둠의 마력 사용자.]

    지금껏 이벨린만 볼 수 있었던 문구가 유세현의 두 눈에도 나타났다.

    < 공방전(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