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방전(1) >
걷고, 또 걷고, 계속 걸어야만 하는 행군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 피부를 꿰뚫는 강추위와 엄청난 양의 눈은 저조한 체력을 지니고 있는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인에 불과한 스텟을 지니고 있는 성인들은 빠르게 지치게 만들었다.
고작 1km를 갔을 뿐인데 마치 100km를 걸은 듯한 느낌.
더 나아가 언제 갑자기 등장할지 모르는 몬스터들은 마을 주민들을 항상 불안에 떨게 했다.
“할아버지 언제까지 걸어야 돼? 나 다리아파.”
“나두! 나두! 쉬다 가면 안돼?”
아이들의 투정은 그야말로 덤.
일행은 주민보다도 몇 발 더 앞서가 경로에 위치한 몬스터들을 처리해나갔다.
그렇게 걷기를 일주일 째, 아직까지는 어찌어찌 순조롭게 남하하고 있었다.
“이상태가 계속 유지됐으면 좋겠어요. 선배.”
“그렇지. 하지만...”
유세현은 알고 있었다. 이 상태가 결코 계속 지속될 수 없음을.
그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지만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 * *
주위가 어둠만으로 가득 찬 침침한 공간.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곳은 새빨간 교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서 있는 단상의 위였다.
그 아래로는 무수히 많은 인원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은 채 절을 하고 있었다.
“마신 루시뷀트님의 강림을!”
“마신 루시뷀트님의 강림을!”
귀신들린 마냥 중얼거리는 신도들.
단상에 서 있던 남자가 차분히 주위를 훑어보더니 낡아빠진 마법서와 지팡이를 든 양손을 치켜세웠다.
“마신 루시뷀트께서 내게 또 다시 말씀하셨다! 한 날 한시에 태어난 두 명의 아이를 바쳐라!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는 두 아이의 피가 땅으로 물드는 순간, 마신께서는 우리를 구제해주시기 위해 친히 이곳에 강림하실 것이
다!”
“마신 루시뷀트님의 안녕을!”
“안녕을!”
교주는 신자들의 열띤 외침 속에서 유유히 퇴장했다.
아무도 없는 장소, 교주의 방에 들어서자 그가 쥐고 있던 마법서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크크. 너의 연설은 언제 들어도 멋지군.]
“후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보다 너를 이곳에 강림시켜주면 나의 부탁은 꼭 들어주는 것이겠지?”
[물론이다. 악마는 계약을 어기지 않아. 원하던 것이 분명 노르페움 왕국인들의 완전한 멸망이었지?]
“그래, 맞아.”
[크크크. 확실하게 이행해주...]
-끼익.
“교주님.”
마법서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문이 열림과 동시에 뚝 끊겼다. 교주, 마벨 차윈이 고개를 쓱 돌려 신도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드디어, 놈들을 발견했습니다.”
“호오, 그렇게 찾아도 안보이더니. 어디에 숨어있었지?”
“그게, 숨어있던 걸 찾아낸 게 아니라 그들이 이동을 개시했습니다. 마수들을 여러 번 보냈으나 전부 격퇴된 상황입니다.”
“격퇴 되었다고?”
마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많은 몬스터들을 마법사 혼자서? 사방에서 덮쳤다면 아무리 놈이라고 해도 지켜낼 수 없었을 텐데?”
“그, 그게 도움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누구에게? 기사단? 아니, 놈들이 도울 리가 없을 텐데.”
“예, 기사단도 여전히 아이를 노리고 있습니다. 다른 자들로 추정 됩니다.”
“흠...얼마나 강하지?”
“그게,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추종자들이 말하길 별 힘도 써보지 못하고 한순간에 당했다고 합니다.”
“상당한 힘을 가진 조력자라는 말이군...”
마벨이 턱을 짚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블러드 베어 300마리를 내어주겠다. 그리고 집행자들을 모이게 하라. 마신 루시뷀트의 이름 아래 내 친히 힘을 하사하리라.”
“알겠습니다.”
신도가 물러나자 마벨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가문을 몰락시킨, 모든 것을 빼앗은 노르페움 왕국.
이제는 자신이 모든 것을 빼앗을 때였다.
* * *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
“기사단? 아니면 이교도?”
“둘 다.”
지금까지는 정찰을 나온 이교도의 병력만 잘라먹었다.
큰 타격을 받은 기사단은 좀 더 신중을 기했기 때문.
그렇기에 기사단이 그들을 발견하는 것은 조금 더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헌데, 그들은 마치 장소를 알아낸 것처럼 이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진군해오고 있었다.
이교도들은 북서쪽에서.
기사단은 동쪽에서.
“함정이 있는 건 느끼지 못했는데...”
아무쪼록, 지금 중요한 것은 왜 걸렸는지 알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대책!
“영감님 진로를 남동쪽으로 꺾어주세요.”
“그러면 노르페움과 가까워 질 텐데? 설마, 자네들?”
“예, 기사단을 먼저 괴멸 시킬 생각 입니다. 그리고 성을 공격하겠습니다. 그리고 분란이 일어나면 틈을 타 몸을 숨기고 계시거나, 계속 남하 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가 알아서 찾아가겠습니다.”
“...알겠네.”
그들은 몸을 돌렸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아린이 이벨린의 손을 꼭 잡았다.
“누, 누나 또 나가는 거야?”
“응, 그런 일이 생겼어. 또 돌아 올 거야. 그 동안 키만 할아버지 말 잘 들어야 된다?”
“......”
아린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이벨린은 아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주며 재차 말했다.
“우리 아린이는 씩씩하니까 해낼 수 있지?”
“...응. 대신 꼭 돌아 와야 돼?”
“당연하지!”
이벨린이 미소를 짓자 아린도 그제야 웃었다. 유세현이 퉁명하게 말했다.
“이벨린씨 시간이 없습니다.”
“...알겠어요. 지금 갈게요.”
이벨린을 아린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본 뒤 일행을 향해 뛰어갔다.
* * *
기사단의 병력은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거기다가 성기사와 사제들이 추가되어 있었다.
광명의 신, 디에우스를 모시는 교단.
[체르프]
유세현이 앞을 막아서자, 그들 또한 진군을 멈췄다. 최선두에서 있던 남성이 오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당장 그 앞을 비켜라!”
“...진군을 멈추시지요. 아이들을 죽이러 이렇게 우르르 몰려가는 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어조에 기사들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최선두의 있던 남성이 검을 뽑은 순간이었다.
중간에 껴있던 체르모프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길을 비켜라. 지금이라도 비킨다면 이전 공로를 생각해 모른 척 해주겠다.”
“아이들을 죽이는데 정녕 동의하신다는 겁니까? 기사라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가...”
“이교도들을 전부 쓰러트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너무도 당연한 말에 체르모프는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교도들을 제압하려면 희생이 너무도 크다. 대를 위해 소를...”
“결국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남을 희생 시키겠다는 뜻이군요.”
“닥쳐라! 지금당장 비키지 않으면 베어버리겠다!”
결국 체르모프도 검을 빼들었다.
유세현은 주위를 쭉 훑어봤다.
사제, 성기사, 기사. 이미 말을 전부 맞춰놔서 그런지 유세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유세현은 피식 웃었다. 하기야, 애초에 기대도 별로 하지 않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전 준비를 위한 시간 끌기.
유세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측면 눈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이강호가 불쑥 튀어나와 주먹을 내질렀다.
강한 불길이 일렁이며 눈보라를 잠재워 버릴만한 강력한 열기가 사람들을 덮쳤다.
교단이나 기사단으로서는 실로 예상치 못했던 기습이었다.
고작 몇 안 되는 인원으로 일천 명에 육박하는 자신들을 공격하다니!
“모, 모두 회피하라!”
기사단장의 외침에 사람들은 눈 속으로 몸을 날렸지만, 이강호의 위치가 너무도 가까워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끄아아악!”
한순간 재가 되어 사라진 사람들은 사제들이었다.
그들이 신성력을 이용해 버프나, 치료를 한다면 일이 귀찮아 진다.
“네놈들...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히 살아서 이곳을...”
황급히 자세를 다잡은 체르모프의 두 눈이 화들짝 커졌다.
정면에서 날아오는 검붉은 빛!
이어서 트라이던트에서 발현 된 물이 일대를 휩쓸었다. 그 위로 발현되는 이벨린의 빙계 마법!
“프로즌 웨이브!”
뻗어나간 냉기는 그대로 주위를 얼음장으로 만들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 정도!
“큭! 반역자! 아니, 이교도 놈들을 처단해라!”
“광휘의 빛이여! 어둠을 막는 방패가 되어라! 홀리라이트!”
살아남은 사제들이 기사와 성기사들을 향해 힐과 버프를 걸어주기 시작했다.
쇄도하는 검격!
500대 4이라는 숫자는 가히 압도적이기 그지없었다.
허나, 그 순간 유세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키아아아!
그새 접근한 구울들이 성기사들을 향해 날라들었다.
두꺼운 가죽 갑옷을 피해 경추 및 각종 관절을 물어뜯는다.
이전 알림창에서도 보았듯, 언데드레이즈의 스킬등급이 올라간 후로, 구울들의 지능은 아주약간 상승한 상태였다.
더 나아가 강한 추위가 부패를 막아주었기 때문에,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만,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면...
-키아...
달려들던 구울들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게 멈춰 섰다.
강추위로 인해 필요에너지가 높아져 그새 어둠의 마력이 고갈된 것.
허나, 기사단도 상당히 많이 처리한 상태라 마무리하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제 남은 인원은 체르모프와 기사 몇 명뿐.
챙!
강한 힘에 의해 검이 튕겨나가자 체르모프가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다오! 다, 다시는 너희를 찾지 않겠다!”
“...대를 위해 소를 포기한다는 거창한 말을 해놓고 정작 자신은 적에게 목숨을 구걸 하는 건가?”
“......”
유세현의 눈빛이 얼마나 차가워 보이는지 체르모프는 더 이상 말을 있지 못했다.
그 순간, 흑빛의 섬광이 번뜩였다.
-서걱.
목을 잃고 지면에 쓰러지는 체르모프의 육신.
토벌의 대장을 맡았던 기사장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크으으!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
허나, 결과가 이런 것을 어쩐단 말인가.
어느새 그의 앞에도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강호였다.
“나, 나를 보내줘라. 그렇다면 기사의 명예를 걸고 다시는...”
후웅!말이 끝날 새도 없이 참격이 궤적을 갈랐다.
* * *
“후...아직까지는 스무스하네.”
유세현은 모든 마력을 사용해 구울을 일으켜 성을 공격했다.
차마 공격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들은 공격이 끝나고도 당분간 병사를 파견하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매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이교도의 병사뿐.
이놈들만 잡으면 일단은 한시름 놓는 것이다.
-키이이...
그때 이동을 하던 구울들이 또다시 움직임을 멈춰 섰다.
유세현은 지긋이 혀를 찼다.
안정적인 전투를 위해서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이 마력소비량을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하는 것!
“해도 거의 저물었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고 내일 다시 이동하자.”
키메라를 되살렸을 때 일반 구울보다 오래갔던 것을 떠올린 그는 행여나 단서를 얻을 수 있을까 레이커드만에게서 얻은 키메라 제조법을 펼쳤다.
전문용어가 많이 사용되어 있어 유세현이 당장 이해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었다.
그때, 문득 옆쪽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벨린이 곁눈질로 책을 흘끔흘끔 흘겨보고 있었다.
‘맞아...이 여자 천재랬지. 호기심도 많고.’
이벨린은 그가 언데드들을 되살렸을 때 적잖이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네크로맨서, 흑마법사도 정령술사처럼 마족과의 계약이 끊기면서 실전된 존재였기 때문.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그들과 그녀는 본래 모르는 사이.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고, 유세현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유세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벨린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 책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예? 아, 아뇨. 아니에요.”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 타인의 비법서를 훔쳐본다는 것은 절도와 같은 행동이었으므로 이벨린은 극구 부인했다.
이에,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는 이강호가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유세현의 눈이 번뜩 빛났다.
“아쉽군요. 흥미가 있으면 도움을 받고 싶었습니다만...”
“...예? 도움이요?”
“예, 이 눈보라 때문인지 구울의 마력 효율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전 키메라를 되살린 적이 있었는데 좀 더 유지가 오래됐죠. 그래서 그 비법을 찾아내기 위해 읽고 있습니다만...전문용어가 많아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
“혹시 관심 있으면 빌려 드리고 조언을 구하려고 했습니다만 관심이 없으시다니 어쩔 수 없...”
“그런 거라면 봐볼게요!”
180° 돌변한 그녀가 재빨리 제조법을 받아들었다. 유세현은 실소를 내뱉으며 마력의 흐름을 읽었다.
지금까지 이교도들이 이끌고 있던 몬스터가 힘, 민첩 등 기본 스텟이 높고 마력이 적었다면, 이번 적은 강한 마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상 스텟이 얼마나 높을지는 미지수.
‘만만치 않겠군.’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쓰레기를 마구마구 퍼붓고 있었다.
< 공방전(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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