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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149화 (149/612)
  • < 대마법사 키만 올란드(1) >

    그런 그녀의 생각을 바꾼 것은 이강호라고 불리던 남자였다.

    [파이어 월]

    후웅-

    창대가 허공을 가르자 시퍼런 청염이 두 갈래로 갈라져 쭉 뻗어나갔다. 쌓여 있는 눈도, 빗발치는 눈보라도 그 어떠한 것도 그 불길만은 막을 수 없었다.

    -치지직.

    -키아악!

    꽁꽁 언 들판을 녹기고 설인의 두꺼운 가죽을 불태운다. 이벨린의 눈가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3서클 마법?’

    정통마법은 판도라로 들어서게 되면서 그 대부분이 실전 되었다.

    진리를 담고 있는 마법서를 가져오지 못한데다가, 그나마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고위 마법사들이 악질적인 튜토리얼의 법칙을 버텨내지 못한 탓이다.

    고위 마법사들은 원거리에서는 무척 강했지만, 직업 특성상 늙고 노쇠해 근접전투에서는 그야말로 쥐약이었다.

    같이 이동되었을 스승, 아린 하이워커도 버티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검을 들고 이를 극복하거나 운 좋게 기사와 떨어진 사람뿐.

    이제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자들은 그다지 많지도, 그 수준도 높지 않았다.

    6서클 마스터, 대마법사 아린 하이워커의 제자로서 3서클을 마스터한 이벨린 본인조차도 4서클 바람 마법을 발현하는 것 까지가 한계.

    물론, 20대라는 그녀의 나이를 감안하자면 엄청난 성취도였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는 마법을 배울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3서클의 마법을 사용하다니?

    물론, 가끔 3서클 마법을 구현하는 자는 봤다.

    문제는 화력. 이 정도의 화력은 순수 랭크가 아니고서는 결코 발현 할 수 없다.

    ‘순수 마법을 보상으로 던전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었는데...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지? 거기다가 저 불꽃색은...’

    유적을 열고, 자신을 제압하고, 이벨린의 눈이 이번에는 유세현을 향했다.

    -치지직!

    -쾅!

    검을 휘두르기 무섭게 이곳저곳에 떨어지는 뇌격.

    ‘인챈트? 아니 그런 수준의 위력이...’

    허나,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운디네!”

    “아쿠아 니들!”

    자그만 한 생명체를 확인한 이벨린이 자신의 눈을 비볐다.

    알테리아 대륙에서도 엄청 희귀하다고 알려진 정령술사.

    사실 정령술사에 비하자면 마법사들은 양호한 편이었다.

    그들은 판도라로 오게 되면서 계약이 잘려나가 모든 힘을 잃게 되었으니까.

    이벨린의 동료였던 정령술사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2차 튜토리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런데 어떻게 저 여자가...’

    어느새 설인은 전부 정리된 상태였다.

    “세현아 포켓에서 적당한 검 좀 꺼내 줘봐. 아무리 봐도 설인 가죽을 가져가야 될 것 같다.”

    “어? 나도 딱 그 말 하려 했는데.”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군부대에서 근무한 유세현은 추위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혹한기 당시 분침호의 자리가 좁아 침낭도 못 피고 잤을 때의 그 끔찍함.

    어찌나 추운지 단 한순간도 잠들 수 없었으며, 감각이 흐려져 행여나 동상이 걸린 것은 아닌지 맘을 졸여야만 했다.

    물론, 지금은 증가한 속성저항력 덕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지만, 아무쪼록 더 추워지는 것에 대비는 해야 된다.

    이강호가 큰 가죽 하나를 통째로 이벨린에게 던져주었다.

    “쓰세요.”

    “......”

    입장 상 안줘도 아무 말도 못할 터인데, 이런 호의라니.

    이벨린은 저편을 바라봤다. 던전이라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광활한 대지가 쭉 늘어서 있었다.

    * * *

    “후우...후우...”

    벌써 며칠을 이동해온 것일까?

    그들은 그간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과 맞부딪쳤다. 설인, 그보다 상위 종족인 예티.

    그리고 화이트울프까지.

    그 중에서 화이트울프들는 정말 강했다.

    C랭크 최상급의 힘을 지니고 있는 그들은 특성상 우르르 몰려다녔는데, 하울링이란 스킬은 안 그래도 강한 육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었다.

    -캐갱!

    마지막 화이트울프를 베어버린 유세현이 입을 열었다.

    “후...끝이 없네. 강호야 이 길 언제 끝날 거 같냐?”

    “글쎄...”

    신물이 잠들어있는 유적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아니, 그냥 다른 세계가 하나 창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방하리라.

    때문에, 이곳은 사실 3명이서 들어올 만 한 장소가 결코 못됐다.

    수천의 군사, 그것도 최소 C랭크 상급에 달하는 정예 병사들이 움직여야 되는 곳을 고작 3명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빠르게 진행이 될 리가 없는 것.

    허나, 그렇다고 클리어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강호가 알기로 이 던전은 일반적인 던전처럼 단순히 보스를 잡고 끝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

    그렇다 이곳은...

    선두에 서 나아가던 이강호가 한발자국 앞으로 발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쿠구궁!

    갑작스레 지면이 푹 꺼졌다. 그 누구도 비명을 외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낭패어린 표정을 지을 뿐.

    “큭! 함정?”

    지긋이 혀를 찬 유세현이 천마군림보를 사용해 허공을 밟았다.

    그는 가까이 있는 순번으로 일행을 받아들기 시작했다.

    이벨린, 김주희, 이강호.

    본의 아니게 어깨에 들쳐 메어진 이벨린의 눈이 다시 한 번 커졌다.

    이곳에 들어와, 그들 덕에 많이 놀란 그녀지만 이처럼 놀란 적은 없었다.

    6서클 마법, 그중에서 최고로 난이도가 높다는 레비테이션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인가?

    과거, 스승 아린 하이워커 조차도 간신히 시전 하는 마법이었다.

    ‘아니야...이건 레비테이션이 아니야.’

    레비테이션은 이렇게 빠르게 가속할 수 없다.

    ‘도대체 이자들은...’

    유세현이 마지막으로 이강호의 옷깃을 낚아챘다.

    이강호가 외쳤다.

    “세현아, 올라가지마!”

    “......”

    굳이 이유를 물을 필요 없이 유세현은 이강호의 말에 들어줬다. 분명 뭔가 있을 테니까.

    구덩이 밑은 치명상을 입힐만한 창이나, 칼날 같은 것이 달려 있지 않았다.

    “선배님, 왜 올라가지 말라고 하신...”

    김주희가 질문을 할 동안 유세현이 주위를 살폈다.

    깊으면서도 넓은 폭.

    구덩이는 아무리 봐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함정이 틀림없었다.

    ‘뭘, 포획하기 위한건가?’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묘한 위화감이 스쳐지나갔다.

    침입자를 죽이려는 던전에서 포획이라니?

    ‘설마?’

    말을 꺼낼 새도 머리 위에 무수히 많은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해를 등지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윽고 그들의 입에서 익숙한 언어가 튀어나왔다.

    “뭐야? 사람이잖아?”

    “뭐? 사람? 놈들이야? 놈들이면 당장 쏴 버려!”

    “아니, 그러기에는 인원이 너무...”

    그들은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은 흡사 진짜 인간 같았다.

    이 던전에 들어온 것은 분명 그들 4명밖에 없을 터인데.

    이벨린은 깜작 놀라하는 반면, 일행은 고개를 다분히 끄덕이고 있었다.

    던전에서 사람을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덕택이다.

    지금 그들의 뇌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하나.

    [마왕성]

    “그렇구나...이 던전은...”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던전.

    “일단 대기할거지?”

    “물론.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 아, 그전에 저들 수준이 어떻게 되는지 파악 가능해?”

    “응...그런데 좀 이상해. 너무 약해.”

    대기에 존재하는 마력과 거의 비슷한 정도.

    이정도면 거의 튜토리얼 수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최상급 던전에서 판도라에 존재할 수도 없는 최하급의 인원이 등장하다니.

    의논이 끝났는지 한 남성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은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마땅히 대답할 껀덕지가 없었다. 이곳이 무슨 세계인지, 어떤 나라가 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

    “저희는 여행자입니다!”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 전부였다.

    “뭐? 여행자? 이 오지에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마을로 이동하던 도중 함정에 걸렸습니다.”

    “마을?...큭! 믿을 수 없군! 소속 국가를 말해라!”

    남자가 말하자 곧바로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 제대로 말하겠냐? 일단 연행하자. 판단은 대마법사님께서 해주실 거야. 허튼수작 부리려고 하면 바로 죽이면 돼.”

    “...하긴. 줄을 내려주겠다! 올라와라!”

    사실, 네 사람에게는 밧줄이 필요 없었다. 제법 높이가 되긴 하지만 벽을 디디며 올라가면 되었으니까.

    “약하다고 했지? 그러면 일단 따라가 보자. 미안하지만 이벨린씨도 계획에 동참 해주셔야 겠습니다.”

    “...예.”

    밧줄을 붙잡고 지면 올라서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노멀 등급도 안 될 것 같은 조촐한 철갑옷과 레어 아머.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잘 달련된 병사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되려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

    “특수한 마력이 담겨있는 화살이다. 허튼짓을 하면 바로 쏠 것이다. 네가 입고 있는 그 갑옷이 얼마나 좋은지 시험해보고 싶다면 한번 수작을 부려보도록...”

    “...그런짓은 안합니다. 대신 무고하면 놔주시는 거겠죠?”

    “...그건 우리가 판단하지 않아! 돌아갑시다!”

    남성이 몸을 돌리는 것으로 이동이 시작되었다.

    * * *

    그들이 향한 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생각보다 별로 떨어져있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일행이 걸린 함정은 아마도 몬스터를 잡기 위해 만들어 놓은 함정인 것 같았다.

    밧줄로 손을 꽁꽁 묶인 채 마을 한복판에 다다르자 꼬맹이들이 순진무구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마력 양을 꼼꼼히 살피며 언제라도 탈출할 준비를 갖춰 놓던 유세현은 그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암흑투기를 발산하면 정신을 잃고 기절할, 아니 목숨이 위태로워질 이들 뿐이었다.

    그가 느끼기에 이 마을에서 강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B랭크 중급 정도에 달하는 막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

    허름한 집 앞에 멈춰서니 문이 털컥 열리며 한 남성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꼬불꼬불한 지팡이와 굽어진 등.

    흰 백발과 긴 수염을 지니고 있는 노인은 유세현이 파악했던 이 마을의 유일한 강자였다.

    설마, 최강자가 등 굽은 노인이라니.

    “인도자이시여, 이들은 함정에 잡혀있던 자들입니다. 판단을 내려주시길!”

    그 말에 노인이 땅을 향해 지팡이를 힘껏 내려쳤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단순한 퍼포먼스같이 보였겠지만, 마력을 느낄 수 있는 유세현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가 모종의 스킬을 사용했다는 것을.

    노인의 눈이 한 순간 커졌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유세현을 바라봤다.

    이윽고 터져 나오는 한 마디.

    “마, 마족?”

    “예?”

    -척!

    잠시나마 내려갔던 몇몇의 석궁이 화들짝 올라간다. 인상을 살짝 구긴 유세현의 눈동자가 이강호를 향했다.

    오해를 산 이상 움직여야 된다고 판단한 것. 이강호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였다.

    “아니, 아니군...마족이 아니야.”

    노인이 말을 정정했다. 그가 성큼성큼 유세현의 앞으로 다가섰다.

    “너, 너무 다가가시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남성의 말에도 노인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네크로맨서? 흑마법사? 아니...그렇다고 치기에는...마력의 순도가...”

    “......”

    “자네 일부러 잡혀왔구만. 자네는, 아니 자네들은 여기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어. 촌장, 이자들을 당장 풀어주게.”

    “예? 하지만...”

    “이들에게 밧줄은 의미가 없네. 이들이 진즉 마음을 먹었더라면 우리들은 이미 끝났을 게야.”

    “...저들이 그 정도라니...알겠습니다.”

    촌장이 밧줄을 풀자, 노인이 명했다.

    “전부 물러나서 할 일들 하시게. 나는 이들과 대화를 해보겠네.”

    “...부디 조심하시길. 인도자께서는 저희의 마지막 희망이십니다.”

    사람들은 걱정 어린 얼굴로 물러나자 노인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허허, 들었던 데로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괜찮겠나?”

    이 던전에 대한, 아니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야 했기에 그들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내부로 들어서자 노인이 간단히 차를 내왔다.

    “아드리나프의 이파리를 말려 만든 차네. 상황이 좋지 않아 대접할 수 있는 게 이정도 밖에 없구만.”

    “...예? 지금 뭐라고...”

    반응한 것은 이벨린이었다. 입이 살짝 벌어진 것이 마치 못들을 것을 들은 표정이었다.

    “허허...아드리나프의 잎이라고 했네. 차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가?”

    “......”

    아드리나프의 잎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풍부한 향에 비해,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서민들도 즐겨 마실 수 있는 차의 종류 중 하나.

    ‘뭐, 뭐지? 단순히 명칭이 겹친 건가?’

    이벨린이 상념에 잠겨있을 때 노인이 말을 이었다.

    “허허,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직 통성명도 못했군. 나는 키만 올란드라고 하네. 자네들의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

    이벨린의 턱이 기어코 떡 벌어졌다.

    < 대마법사 키만 올란드(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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