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121화 (121/612)
  • < 노예상 실버어레스트(2) >

    “뭐, 뭐? 그게 무슨...”

    “큭큭큭. 말 그대로의 의미지. 너희들 이게 뭔지 알아? 이건 말이야 기억수정구라고 하는 건데~너희가 어제 남작님을 쳤던 일들을 생생이 담고...”

    간수는 낄낄 거리며 생존자 일동을 향해 앞으로의 일어날 일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댔다.

    방금 전까지 만해도 미안해하던 생존자들의 표정이 점점 분노로 물든다.

    그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꾐에 완벽하게 넘어갔다는 것을.

    “남작을 개뿔. 당장 꺼내라. 죽고 싶지 않으면.”

    “킥킥킥. 죽고 싶지 않으면 꺼내라고? 크크크크 크하하하하!”

    간수가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아~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유쾌한 농담 이었다. 그러니 그만 눈 깔아라 새끼야. 아마 광역스킬이라도 날릴 생각인가 본데 소용없는 짓이야. 너희 눈에는 이 간이식 감옥이 만만해보이겠지만 사실 그 감옥은...”

    콰과광!

    말이 끝나기도 전 폭음이 이어졌다. 허나, 철창은 까맣게 그을리기만 할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크크크! 멍청한 놈들. 자신들이 아직도 최강이라고 생각하나? 여긴 미적지근한 구름섬이 아니라고. 너희들이 어떻게 메마른 숲에서 무사히 기어나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을 주먹을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던 생존자 일동이 무엇인가 깨달았다는 듯 주위를 황급히 살폈다.

    없다. 없었다. 자신들을 안전하게 이곳까지 이끌어준 두 사람이.

    “네놈들...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키키키. 후회는 무슨!”

    간수는 여전히 낄낄 폭소를 내뱉었다.

    * * *

    “유세현이라고 했었나? 잠시 따라와라. 아! 여자는 여기 남아있고.”

    더는 정중하지 않은 말투.

    험악해진 분위기 속에서 다분히 통보를 내리는 알렌의 주위에는 10명 가량의 인원들이 뒤를 지키고 있었다. 대부분의 인원을 무력화 시켰으니 본성을 드러내는 것.

    “무슨 일이신데 그러시는 거죠?”

    “큭! 내가 너한테 답해줘야 될 짬이냐? 얌전히 따라오는 게 네 옆에 있는 여친 신상에도 좋으니까 그냥 닥치고 말 들어라.”

    “......”

    유세현은 마지못해 일어나는 척했다. 알렌은 그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하기야 아무리 영특해봤자 새내기는 새내기가 아니겠는가. 지금이야 여친 앞이라고 깨나 덤덤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얼마못가 피를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게 되리라.

    끼익. 쿵!

    이윽고 방문이 닫히며 김주희의 눈앞에서 무수히 많은 인원들이 자취를 감췄다.

    남은 것은 단 두 명 뿐.

    성큼성큼 다가온 그들은 김주희 앞에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러면서도 한손은 주머니에, 또 한손은 책상위에 올려 위협을 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3류 양아치들이나 할법한 행동.

    구름섬을 통과한 자들이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을까.

    김주희는 거치 시켜둔 삼지창과의 거리를 쟀다. 약 다섯 걸음.

    아주 약간의 틈만 만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것은 순식간이다.

    “여기 얌전히 지장 찍어라. 그럼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다. 물론 그래봤자 미래는 없겠지만. 넌 지금 네가 어떻게 될지 짐작도 안 되지? 너 노예 되는 거야 노예.”

    “...노, 노예요? 난데없이 그게 무슨...”

    “갑자기가 아니야 이 아르카드제국에는 노예제도가 있거든! 낄낄. 그리고 귀족들은 너 같은 애들을 정말 좋아하지.”

    “키킥, 야 너무 그러지 마라 불쌍하잖냐.”

    “불쌍하긴 개뿔. 당하는 놈들이 병신이지.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다고. 아, 그래서 말인데 너 우리랑 딜하지 않을래? 한 번 하게 해주면 이 길드에 들어올 수 있도록 추천서를 넣어 주도록 할게. 어때?”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말단 중에 말단처럼 보이는 놈들이 추천서라니.

    허나 우습게도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 생긴다.

    때문에 이 방법은 의외로 잘 통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김주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남자들의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가 가득 맴돌았다. 이윽고 고개를 든 김주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말 추천해주시는 거죠?”

    그 가련한 모습은 남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기에는 무척 충분했다.

    그녀는 남심을 휘어잡는 데 도가 튼 여우.

    이정도의 연기는 식은 죽 먹기다.

    “크크큭! 물론이지. 우리가 그 정도로 못 돼먹지는 않았다고.”

    “아, 알겠어요...하게 해드릴게요.”

    “크~역시 현대인들은 쿨해서 좋아!”

    남자들은 그걸 보며 마음속으로 낄낄 웃었다. 살기위해 망설임도 없이 남친을 배신하는 꼴이라니.

    먼저 성매매를 제의한 남성이 동료의 옆구리를 툭쳤다.

    “야, 망 좀 잘보고 있어라. 후딱 끝낼 테니까.”

    “쳇...새끼...빨리 끝내라.”

    “키킥 알았다고.”

    동료가 뒤돌아 나가자 남성은 입고 있던 갑주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멍청한 도적들.’

    김주희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몸을 움직여 삼지창을 집었다.

    “어, 어!”

    일순간 터져 나온 당황어린 외침.

    허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삼지창은 공간을 갈랐고, 남성의 목은 너무도 허무하다시피 땅으로 떨어졌다.

    “뭐, 뭔 일이야!”

    푹.

    김주희는 깜짝 놀라 뛰어 들어온 또 다른 도적의 목도 단 일격에 꿰뚫었다. 이로서 그녀를 감시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그녀는 운디네를 소환하여 얼굴에 묻은 피 정도만 대충 닦아냈다. 몬스터 웨이브를 뚫고 온 덕에 갑옷에 튄 피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

    ‘그럼 이제부터 다시 장부를 찾아볼까...’

    그녀는 생존자들을 잠재울 수 있는 아퀼라를 소환한 뒤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알렌과 수하들, 그들이 이동을 멈춘 곳은 지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숲속이었다.

    유세현은 슬쩍 실버어레스트의 지부를 흘겼다.

    김주희의 실력이라면 지금쯤이면 두 명을 처리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는데 성공했을 터다.

    그렇다면.

    치잉.

    유세현이 먼저 마검 루베르크를 빼들었다. 알렌의 눈가가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네놈...”

    “왜, 이러려고 따로 부른 게 아니었나?”

    “...포위해라.”

    알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따르던 수하들이 바람같이 움직여 유세현의 주위를 빙그르르 둘러쌌다.

    유세현은 한손을 까딱였다. 어차피 그들과의 전투가 무서워 이곳까지 따라온 것이 아니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광역스킬을 난사해 건물을 무너트리지 않을까하는 노파심에 이곳까지 온 것.

    알렌이 으득 이를 갈았다.

    이놈은 역시 마음에 안 든다. 새내기답지 않은 여유로움.

    아까전의 그것도 연기였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위한?

    “네놈...곱게 죽진 못 할 거다.”

    알렌이 고개를 까딱이자 수하들이 동시에 유세현을 향해 돌격했다.

    전후좌우. 빈틈이라고는 전혀 없다.

    만약 도약하여 회피한다면 알렌은 자신이 직접 나서 죽일 생각이었다.

    허나.

    쿠우웅.

    유세현은 땅을 구르지도, 도약하지도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힘에 눌려 움직이지 못하는 수하들을 향해 묵묵히 검을 휘두를 뿐이다.

    “크아악!”

    곳곳에서 비명이 메아리친다. 누구는 차마 입을 벌리기 전에 목이 떨어져나가기도 했다.

    알렌은 당혹스러웠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 뭐야 이건?’

    부들부들 떨리는 사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커다란 손이 몸을 꽉 쥐어 잡고 있는 느낌.

    ‘움직여라 움직여!’

    알렌은 안간힘을 썼다. 허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미, 미친...어떻게...’

    현실감이 들지 않는다. 생동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막 판도라에 도착한 새내기가 어떻게 이런 힘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말이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알렌의 짧은 상념이 끝났을 때는 수하들은 전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땅을 뒹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 뿐.

    저벅저벅.

    새빨갛게 물든 루베르크를 쥔 유세현이 알렌을 향해 이동했다.

    한 걸음 한 걸음.

    평범하게 걷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그 장면이 알렌의 눈에는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알렌은 찰나의 순간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허나, 방도는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해 봐야...

    “사, 살려주십쇼...뭐, 뭐든 하겠습니다!”

    빠른 태세변환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것 뿐.

    루베르크를 땅에 푹 꽃아 넣은 유세현이 살며시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혔다.

    “장부는 어디에 보관하고 있지? 대답한다면 생각해보겠다.”

    생각해보겠다. 이것은 살려줄 수도 있고 안 살려 줄 수도 있다는 뜻.

    허나, 지금의 알렌에게는 그런 것을 따질 여지가 없었다.

    최우선은 목숨.

    추후 실버 어레스트길드에 쫓기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은 살고 봐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혹시 모른다. 지부장과 호위병들이 이놈을 처리해줄지.

    “지, 지부장실에 있습니다!”

    “지부장실?”

    유세현의 손이 슬그머니 루베르크를 향했다. 어제 생존자들이 난동을 피우는 틈을 타 들어가 봤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알렌이 당황하여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지, 지부장의 테이블 뒤에는 숨겨진 공간이 있습니다! 문 바로 앞에 있는 책장의 맨 위, 거기서 왼쪽에서 5번째 책. 그걸 건드리면 문이 열리는 걸 이전 우연히 본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지, 지금껏 자, 장부는 이 지부 어디에서도 본적이 없습니다. 있다면 그곳밖에는...저, 전부 뒤져보시면 제 말이 맞았다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그래서 못 찾았던 건가.’

    어제 또한 체험이라는 명목 하에 제법 지부를 돌아다녔다. 마땅히 발견되지 않아 김주희에게 좀 더 세심히 찾아보라고 시켰는데.

    이렇게 놈이 술술 불 줄은 차마 몰랐다.

    판도라의 길드원들은 구름섬의 팀과 달리 자기가 속한 길드를 아낀다고 들었기 때문.

    역시 불법적인 일을 하는 길드인 만큼, 동료애 또한 다른 길드에 비해 사뭇 남다른 모양이었다.

    무척 안 좋은 쪽으로.

    “책장 맨 위 왼쪽 5번째 책. 틀림없겠지?”

    “예, 예!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목숨만은...”

    유세현의 팔이 슬그머니 검 손잡이를 향했다. 알렌의 입에서 오만 욕이 터져 나왔다.

    “이, 이 개자식아! 살려줄 수도 있다며! 난 속이지 않고 아는 걸 전부 말했어! 그러니 제발 한 번 만...”

    “너도 애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준 적이 없을 텐데.”

    서걱.

    시퍼런 음색과 함께 애걸복걸하게 말하던 알렌의 목이 지면을 데굴데굴 뒹굴었다.

    유세현은 서둘러 내부에 들어섰다.

    각 방을 지키고 있던 인원들은 아퀼라와 김주희의 콤비네이션에 의해 이미 상당수 없어져 있었는데, 유세현은 곧 탐색을 마치고 나오는 둘과 조우할 수 있었다.

    “선배님!”

    “어, 뭐 좀 찾았냐?”

    “아뇨...운디네랑 나눠서 찾고 있는데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아요.”

    “그래? 따라와라 얻은 정보가 있어.”

    “아...옙! 알겠습니다.”

    유세현이 앞장서자 김주희가 졸졸졸 뒤를 따랐다.

    * * *

    쾅!

    지부장실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지부장 라펠은 노예가 될 인원들의 명단을 한창 장부에 적고 있었다.

    “뭐야? 여자는 밤에 들이라고 했을 텐...”

    퍼버벅.

    손쓸 틈도 없이 제압당하는 라펠.

    이 지부의 최강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허무한 결말이었다.

    “네, 네놈들 목적이 뭐냐!”

    빡!

    라펠의 턱주가리를 가격하여 기절시킨 유세현은 알렌이 일러준 책을 살짝 뺐다.

    드르륵.

    그러자 정말 지부장 자리 뒤에 위치해있던 책장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라펠을 질질 끌고 내부로 들어서자 장부로 보이는 책 5권이 눈앞에 비쳤다.

    구름섬에서 판도라로 오는 인원은 6개월에 한 번씩이건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수의 인원들을 노예로 만든 것인지.

    유세현은 책을 폈다.

    아르카드 공통어로 적혀 있지만, 자연스레 번역이 되기에 의미만 일치한다면 읽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름과 신체사이즈, 그 외 특징이나 보유스킬을 등만 기록되어있을 뿐 제일 중요한 팔려간 장소가 명시 되어 있지 않다는 것.

    이래서는 이름을 발견해도 말짱 도루묵 아닌가.

    “김주희 쟤 좀 깨...”

    “옙! 선배!”

    기똥차게 말을 알아들은 김주희가 말도 끝나기 전 물을 한바가지 들이부었다. 라펠은 1초도 지나지 않아 헛구역을 내뱉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커헉! 이게 무슨...”

    쾅!

    유세현의 손아귀 힘에 의해 라펠의 머리가 바닥에 꽂힌다. 유세현은 그 상태를 유지하며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여기 있는 장부가 전부인가?”

    “네. 네놈들이 감히 미쳐 돌아가지고...”

    트드드득!

    라펠의 왼쪽 팔이 기괴하게 꺾여 돌아간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뱉을 뻔 했지만 유세현의 우악스러운 손에 의해 저지되었다.

    지긋이 귓가에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크게 소리 지르면 죽인다. 딴 말해도 죽인다. 묻는 말에만 답해라. 알겠으면 눈을 두 번 깜박여라.”

    < 노예상 실버어레스트(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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