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113화 (113/612)

< 게릴라전(1) >

저벅저벅.

그 말을 끝으로 유세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이탈했다. 주위에 있던 라플레시아를 전부 도륙해놓은 덕에 방치된 남자가 허무하게 죽는 일은 없으리라.

딱딱딱.

유일하게 살아남은 남성의 턱이 마비와는 별개로 위아래로 빠르게 부딪쳤다.

덜덜 떨리는 어깨와 온몸을 찐득히 적시는 식은땀.

그는 단신으로 부대원들을 몰살한 이강호가 괴물이라 생각했다. 허나 유세현과 마주한 순간, 그것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정하나 내비치지 않는 그 눈동자는 무엇인가가 달랐다.

죽음을 가득 담고 있는 듯한, 마치 사람이 아닌 느낌.

눈동자가 경고를 하고 있었다.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고.

딱딱딱.

그는 마비가 풀리고도 한동안 공포에 몸서리쳤다.

* * *

유세현은 한동안 말없이 숲을 나아갔다. 그런 그를 뒤따르고 있는 이강호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처리방식. 그럼에도 그는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직접 에단을 죽였다.

이는 스스로의 손을 더럽힌 것.

긴 정적이 이어졌다. 이 흐름을 깨고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몸을 돌려 이강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은 유세현이었다.

“왜, 아무 말도 없이 혼자 갔냐?”

“그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목적을 위해 피해를 입히지도 않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무리 친할지언정 반발심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또한 자칫 잘못했다가는 신뢰에 금이 갈 수도 있다.

신뢰의 기준에는 행동 양식도 포함 되어있으니까.

허나.

“앞으로는 같이 움직여.”

유세현은 이강호가 염려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유세현은 그저 안타까웠다.

도대체 어떤 경험을 했길래 항상 열정을 쏟아내며 불타던 그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해온 그가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일까.

“혼자서 모든 부담을 껴안지 마라. 같이 가기로 했잖냐.”

“......”

이강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자신을 무조건 적으로 믿어주는 자가 또 있었던가.

이벨린 발디안, 남궁 시영, 에반 비텔스바흐.

돈독했던 세 명의 동료도 이러지는 않았다.

또한 유세현은 이미 두 번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무엇이 두려워 말하지 않았던가.

상념에 차있던 이강호는 그 순간 깨달았다.

말을 하지 않고 홀로 움직인 것은, 최후의 인간성까지 가슴에 묻은 자신을 행여나 그가 경멸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래, 고맙다.”

“고맙긴 뭘. 내가 받은 게 더 많은데.”

그들은 다시 포탈 근처로 돌아와 취침을 한 뒤, 6층으로 올라갔다.

* * *

팀 아돌프 리더, 에단의 죽음은 막 진정되어가는 인간 진형에 또 다른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살아남은 남성은 고블린이 습격이라 증언했고, 심각함을 확실히 인지한 인간진형은 곧바로 대응책 마련에 들어갔다.

우선은 경계인원들을 대폭 늘렸다. 마음 같아선 적을 미리 발견할 수 있는 경계초소를 따로 구비하려 했지만, 효율성이 너무 떨어지고 습격당할시 전멸의 위험이 다분하기 때문에 취소되었다.

그 이후 그들은 고블린의 동선을 파악하여 직접적인 공격을 가했다.

쟁탈전이나, 던전에서 조우할 당시에만 전투를 지르던 것과 달리, 먼저 습격을 행한 것이다.

꼬리를 물고 무는 싸움이 이어진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가 사망자수가 이전에 비해 30%나 증가하기에 달했다.

생존자 진형은 단순히 판도라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닌, 살아남기 위해 정말 목숨을 걸고 분투했다.

허나. 그럼에도 주둔지의 괴멸 이후 한번 기울어진 저울추를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1층, 2층, 3층, 4층, 5층.

무려 5개의 층계 중 인간측이 유리한 곳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이렇게 버티는 것도 빨리 대책을 마련했기 때문.

허나, 이변은 갑자기 발생했다.

단 세 명.

장장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고블린들을 피해 6층의 몬스터란 몬스터는 깡그리 죽이고 다닌 유세현 일행에게서.

* * *

“모, 모두 후퇴하라!”

흑인 남성이 외침과 동시에 생존자들의 우르르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검에서 뇌전을 내뿜고 있는 흑인 남성의 등 뒤로는 엄청난 수의 고블린이 맹렬히 추격해오고 있었다.

생존자가 고작 100명밖에 되지 않는 것을 감안 했을 때 무려 두 배에 달하는 병력!

고블린들의 평균 스텟이 많이 높아진 만큼, 생존자들은 도망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으아악! 사, 살려줘!”

고블린에게 발을 붙잡혀 넘어진 남성이 비명을 토해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몰려든 고블린들이 남성의 육신을 도륙했다.

푹! 푹!

잘린 단면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내장이 튀어나온다.

“캬하하하! 죽여라! 대 족장 레콰이크의 이름 아래 전부 씨를 말려버려라!”

“가자아! 캬캬캬!”

맹렬하게 포효를 발산하는 고블린들의 사기는 어느새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서걱.

푹.

계속해서 아비규환이 이어진다.

흑인남성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다.

“제기랄!”

그도 그럴 것이 5층에 들어선 이번 주에만 벌써 2번째 당하는 습격이다.

첫 번째 기습에서 그들은 무려 10명의 팀원을 잃었다.

고층계 인원 한명 한명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따졌을 때 어이없는 손실이었다.

“젠장...할 수 있는 게 도망뿐이라니...어쩌다가 이렇게...”

팀 헤르메스의 꼴이 말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콰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숲에서 발산된 검붉은 빛이 추격하던 고블린들을 휩쓸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불길의 벽.

“키아아악.”

고블린들을 괴로워하며 죽어나갔다.

도망치던 흑인남성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저건 설마?

이윽고 숲에서 세 명이 튀어나왔다. 흑인남성은 자신도 모르게 환희에 찬 탄성을 토해냈다.

“저 자식들은!!”

무려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소식이 없어 비명횡사 한 줄로만 알고 있었던 신예.

그런 그들이 사실 살아있었다니.

암흑투기가 공간을 장악하자, 장거리 폭격에서 살아남은 고블린들은 좀처럼 비실거리며 힘을 쓰지 못했다.

서걱.

촤악.

검과 창을 휘두를 때마다 맥없이 쓰러져 나가는 고블린들.

흑인남성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얼마나 강해져야 저렇게 압도적으로 적을 짓밟을 수가 있단 말인가.

스르륵.

유세현이 루베르크를 차분히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들의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고블린들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주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고블린들을 도망치려 했었으나, 단 한 마리, 단 한 마리도 이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코인을 흡수한 세 명이 천천히 생존자들을 향해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게릭.”

“유, 유세현! 이강호! 김주희! 역시 살아있었던 건가!”

너무도 당연한 말인지라, 유세현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고블린 측에 쫓기던 거 같던데. 진형 상황이 많이 안 좋나?”

“상황?”

반문한 게릭이 으득 이빨을 갈았다. 최근 시달려온 것만 생각하자면 뼈를 갈아 마셔도 부족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

“큭. 알았다.”

게릭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라면 이때를 틈타 6층으로 나아가야 했지만 그보다도 이들에게 현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고 생각한 탓이다.

“너희가 사라진 뒤, 팀 아돌프의 리더, 에단이 고블린들에게 당했다. 이에 우리 요새는...”

내용을 들은 유세현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는 반면, 김주희는 살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3개월 전 이강호가 예측한 결과와 너무도 비슷하게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설마설마하고는 있었지만, 이정도로 딱 들어맞을 것이라는 것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한 것.

경청하고 있던 이강호가 입을 열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군.”

“그래. 상상 이상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대응을 늦게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아무튼 지금 3~4층은 완전히 전쟁터가 됐다. 그래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너희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지?”

조심스레 묻는 게릭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중했다.

그들의 무력 수준을 확인한바 이미 판도라로 나아갈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상 그것을 뛰어넘었다.

그렇지 않고서 저 흉폭하고 강한 고블린들을 저리 쉽게 제압할 수는 없으니까.

만약 그들이 이 전투에 참여 한다면 양상은 크게 뒤바뀔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이 탱자탱자 놀아도 할 말이 없다는 것.

“우리는 이제부터 고블린 격퇴에 나설 참이다.”

“격퇴! 진심인가?”

게릭의 외침에 옆에서 흘겨 듣고 있던 생존자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어떻게 격퇴할거지?”

“게릴라전을 치를 생각이다.”

게릴라전은 대개 적의 척후에 은밀하게 숨어들거나, 은엄폐하고 있다가 급습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 마치 방금 행해졌던 전투처럼.

“게릴라! 혹시 팀을 꾸릴 생각은 없는 거냐? 팀을 꾸린다면 훨씬 더!”

“아니, 방해만 된다. 하려면 너희가 해야 돼.”

“우리는 충분히...”

“하지만 성과는 좋지 못하지.”

“큭...”

맞는 말이다. 최근 단체로 공격을 취하려고만 하면, 고블린들은 이미 어디선가 정보를 파악하고 도망치거나 매복을 한다.

더 나아가 스텟 또한 그들이 조금씩이나마 앞서있다.

전략적으로도 질 적으로도 딸리는 것.

“그러니 너희도 이왕 전투를 할 거라면 100~200명으로 이루어진 게릴라전을 치르는 게 나을 거다.”

“큭! 그걸 말이라고...”

게릴라전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배트남 전쟁 때의 예시가 있듯 잘만하면 우위를 되찾아올 수 있으니까.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적의 위치와 지리 등을 빼곡히 알아야 된다.

지리야 1년 넘게 있었던 곳이니 대충 안다고 쳐도, 문제는 정보.

현재 생존자들에게는 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줄 정보원이 따로 없었다. 우선 종족이 달라 틈에 숨어 들을 수 없다.

그렇기에 들키지 않고 탐색을 하기 위해서는 소규모 인원을 운용 해야 하는데, 발각될시 높은 확률로 죽을 것이기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턱을 짚고 있던 이강호가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정보만 알려준다면 할 수 있다는 건가?”

“그야 물...아!”

대답하던 게릭이 눈동자가 번쩍 떠졌다.

맞다. 분명 이 셋 중 누군가에게는 적의 숫자와 질을 파악할 수 있는 특이한 탐지능력이 있었다.

물빛의 사원에서 직접 봤었는데 왜 까먹고 있었던 것인지. 이를 까먹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터다.

“사냥을 나설 때가 아니군...혹시 지금 동행 해줄 수 있겠나? 아마 지금 요새로 돌아간다면 다른 두 팀의 리더도 다 모여 있을 거다.”

“그러도록 하지.”

“좋아. 그럼 바로 이동하도록 하지.”

그들은 지나가는 고블린들을 간간히 죽여 가며 빠르게 구름섬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제 B-10중대와 11중대가 당했습니다.”

“크으...또? 이번에는 어디서? 폐쇄던전에 들어간다고 했었잖아! 뒤치기를 맞을래야 맞을 수가 없을 텐데!”

“그, 그게 폐쇄 던전에 들어가기 직전에...”

쿵!

화를 참지 못한 동양인 남성의 주먹이 바위를 깎아 만든 테이블을 강타했다.

치지직.

힘을 이겨내지 못한 테이블 곳곳에 균열이 생겨났다.

그때, 다른 한명이 천막 내부로 황급히 뛰어 들어오며 또 다른 보고가 이어졌다.

“티, 팀 헤르메스의 게릭님이 요새로 돌아오셨습니다.”

“...뭐? 걔네 6층으로 사냥 나간다고 했잖...설마?”

안 그래도 일그러져 있던 이치하라 쿄타로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일정을 지키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회군을 했다는 것은, 분명 결코 좋지 못한 일을 겪었을 것이기 때문.

“어, 얼마나 죽었대냐...”

“그, 그게 아직은 잘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게 많은 인원이 당한 것 같지는 않아보였습니다만...어쩔지는...”

“후...그래?”

“예, 그보다 게릭님께서 지금 바로 3대 팀 긴급회의를 소집한다고 하셨습니다.”

“...긴급회의?”

“예.”

“후...”

긴급회의에는 그 특성상 항상 좋지 못한 소식이 도사리고 있다. 쿄타로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회의실로 이동 했다.

“어, 왔냐?”

내부에는 먼저 도착한 게릭이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이름 모를 세 명이 앉아 있었는데, 어딘가가 무척이나 묘했다.

“이분들은?”

“3개월 전 회의에서 너도 봤던 사람이다.”

“3개월 전? 그 때가 아마 주둔지...어?”

쿄타로의 눈동자 또한 게릭이 오랜만에 그들을 봤을 했을 때처럼 커졌다.

주둔지 인원들을 살려온 신예.

분명 죽었다고 소문이 돌았었는데.

“팀 솔져의 이치하라 쿄타로입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쿄타로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이는 권위가 하늘을 찌르던 불과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내 간단한 인사를 나눈 쿄타로는 동행자와 함께 차분히 자리에 착석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팀 아돌프의 새로운 리더 체르늬르 일리야가 한 남성과 함께 모습을 비쳤다.

“어...”

무심코 유세현과 눈이 마주친 남성의 몸이 얼음장처럼 뻣뻣하게 굳었다.

< 게릴라전(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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