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105화 (105/612)
  • < 폭풍전야(1) >

    그 말투에서는 당혹이라는 감정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 죽어가던 계집이 어찌 이런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김주희의 모습을 살핀 이강호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그는 이 스킬을 과거 여러 차례 본적 있었다.

    바다의 종족 세이렌의 여왕.

    아르우네의 주력 스킬.

    엄청난 양의 물을 조건 없이 다룰 수 있기에 인류는 그녀를 상대할 때 무척 애를 먹은 바가 있다. 꾀를 내어 지상으로 유인하지 않았더라면 사실상 못 잡았을 인물.

    “김주희 너 이 스킬을 어떻게...”

    “후우 후우.”

    김주희가 갑자기 거친 호흡을 토해냈다. 정령화 이후 공격받은 적이 없는 것 치고는 상당히 벅차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에 이강호를 포함한 셋은 김주희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유세현과 이강호의 눈이 더욱 날카로이 변했다. 지금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지금 끝내야 한다.’

    김주희가 원래대로 돌아가면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의 승기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모든 것을 걸 때였다.

    “세현아 ‘그거’ 사용가능하냐?”

    게릭을 의식한 이강호가 조심스레 묻자 유세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15초. 그 이상은 무리야.”

    “오케이.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지?”

    “한번쯤이라면...”

    “좋아. 그럼 페르도라의 움직임을 최대한 잡아줘. 그리고 게릭.”

    “말해라.”

    “넌 남은 모든 마력을 사용해서 최대한 광범위하게 뇌격을 날려라. 최대한 빈틈이 생기도록. 절대 마력을 아끼지 마라 다시 말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다.”

    “...알았다.”

    순식간에 내려지는 지시.

    차분히 답하는 게릭의 눈에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강호가 마지막으로 김주희를 향해 말했다.

    “김주희 저 둘이 틈을 만들면 네가 페르도라를 잡는다.”

    할 수 있겠냐, 괜찮겠냐 등의 말은 묻지 않았다.

    유세현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지금은 그녀가 무조건 해낼 것이라 믿고 움직여야 되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김주희가 손을 들어 올리자 흑빛의 물이 점점 한곳으로 뭉치며 커다란 창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말없이 페르도라를 응시했다.

    조금 전부터 점점 머리가 깨질듯 아파오기 시작했었는데 이강호의 신뢰 섞인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모르게 한결 나아진 느낌이 들었다.

    넷은 곧 자세를 다잡았다.

    이에 칼륀과 페르도라 또한 침착하게 무기를 치켜세웠다.

    평소 경박함을 내보이던 칼륀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도 무척 진지했다.

    저 여자 때문에 상황이 돌변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자신들이 당한다.

    “칼륀, 흑색의 검을 지닌 놈부터 잽싸게 처리한다.”

    “...알았어.”

    뚝.

    천장에서 맺혀있던 물방울 하나가 지면으로 떨어지는 것을 신호탄으로 그들은 이동을 개시했다.

    선두는 유세현과 게릭!

    유세현이 모든 마력을 전부 쏟아 부어 암흑투기를 시전하자 칼륀의 몸이 잠시 움찔거렸다.

    동시에 두 마리의 고블린들을 향해 날아가는 뇌격.

    콰과광!

    고블린들은 재빨리 양옆으로 흩어져 회피함과 동시에 반격을 하려했다.

    허나.

    “풍참...”

    슈우욱!

    콰과광!

    “...큭!”

    무수히 많은 물의 화살이 두 고블린에게 빗발쳤다. 어찌나 양이 많은지 회피하기에도 급급한 상황.

    그렇게 짧게 이어진 공격이 멎자, 유세현과 게릭의 검이 페르도라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페르도라는 빠르게 시미터를 횡으로 세워 방어를 취했다.

    트드득!

    “이놈들이!”

    팅!

    신성의 힘 덕에 암흑투기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페르도라가 그 강한 힘으로 두 사람의 검을 튕겨냈다. 허나, 이것은 틈을 만들기 위해 두 사람이 일부러 유도한 것이었다.

    슈우욱!

    “헛?”

    유세현과 게릭이 뒤로 빠지기 무섭게 사방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창을 확인한 페르도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단 한 개뿐이었을 터인데.

    창의 면적이 돌기둥처럼 너무 넓어 마땅히 피할 공간이 없다.

    “큭!!”

    쿠구궁!

    결국 갈길 잃은 페르도라의 몸이 허공에 붕 솟구쳤다.

    무방비 상태를 각오하고 도약을 한 것!

    페르도라는 풍참격으로 장거리 공격을 요격하기 위해 재빨리 주위를 살폈지만 공격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날아왔다.

    김주희가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지면에 박혀있던 물의 창이 부르르 떨리며 상공을 향해 튀어 올랐다.

    순간적으로 지진을 일으키는 페르도라의 눈동자.

    “무, 무슨!”

    한번 사용한 스킬을 또 다시 활용 할 수 있다니?

    이런 공격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했었다.

    “푸, 풍참격!”

    솨솨솨!

    서걱.

    황급히 발산한 참격에 의해 몇몇의 창이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창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뿐더러 갈라진 창 또한 힘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날아왔다.

    물이라는 물질 자체가 페르도라를 죽이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것만 같은 느낌!

    쿠구구궁!

    콰직.

    무수히 많은 물의 창, 아니 기둥이 페르도라의 육신을 짓눌렀다. 곧 푸른색의 피가 물기둥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이것으로 한 놈은 끝.

    이강호에게 발이 묶여 있던 칼륀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그럴 리가...”

    믿을 수 없다는 음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구름섬에 존재하는 최상위 존재였으니까.

    D랭크의 스텟을 넘어선 자. 판도라로 나아갈 자.

    그들은 이 구름섬의 한에서 만큼은 최강이었다.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동급의 힘을 지닌 2년차 뿐.

    그들은 이전과 같이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중간까지는 그러했다.

    그런데 지금 이 꼴이 뭐란 말인가.

    페르도라, 그 냉철하고 강한 페르도라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광기어린 칼륀의 눈동자가 김주희를 향했다.

    “이 썩을 인간 계집이!”

    일을 망친 근원.

    저 계집만 없었더라면 분명 자신들이 승리했으리라.

    “캬아아아!”

    전신의 힘을 폭발시킨 칼륀이 김주희를 향해 나아갔다. 승산이 없음을 깨달은 그의 머릿속은 김주희를 어떻게든 죽이겠다는 이념밖에 담겨져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동귀어진.

    그러나 아쉽게도 칼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화르륵.

    쿠구궁!

    “키랴랴략”

    별안간 발산된 강한 불길이 칼륀의 전신에 휘몰아쳤다.

    연기가 모락모락 일어나고 오징어 타들어가는 냄새가 공간을 가득 메운다.

    새까맣게 그을려 지면에 털썩 쓰러진 칼륀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레콰이크가...너희들을 반드시 죽일...”

    마지막 힘을 다한 독백.

    슈우욱

    쾅!

    김주희가 손을 내리는 것으로 칼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끄, 끝난 건가...”

    코인이 떠오르는 것을 확인한 게릭이 그제야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아직까지도 이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반면 유세현과 이강호는 김주희를 향해 황급히 뛰어갔다.

    심장 부위를 손으로 부여잡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생각 보다 많이 좋지 못해 보였다.

    “야! 김주희! 괜찮아?”

    “하아...하아...서, 선배...괘, 괜찮...윽!”

    답하던 김주희의 몸이 사르륵 옆으로 기울었다. 유세현은 황급히 허리를 굽혀 부축했다.

    트드득.

    액체라는 것이 무색하게 점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김주희의 피부.

    몸에서 떨어져 나온 몇몇의 파편 조각이 단순한 액체가 되어 지면속으로 사라졌다. 또 다른 몇몇은 다시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이, 이건?’

    바닥에 조심히 김주희를 눕힌 유세현은 황급히 그녀의 전신을 살폈다. 자신이 겪었던 마력의 폭주는 아니었으나, 분명 무엇인가가 폭주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대로 계속 진행된다면 김주희의 전신은 단순한 물이 되어 없어질 수도 있는 상황.

    “이강호! 이거 어떻게 해야...”

    “이건 나도 몰라.”

    “그렇다면...”

    “스스로 이겨 내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

    김주희의 몸이 물고기처럼 펄떡이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온몸이 터져나가는 고통에 입술을 악물었다.

    역시, 상성이 맞지 않았던 것인가.

    이대로는 절대 죽고 싶지는 않은데. 아직 뭐하나 제대로 해본 것도 없는데.

    힐끔 뜬 눈동자 속으로 유세현의 얼굴이 비쳤다.

    어느 때나 담담한 모습을 보이던 그의 표정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지금 혹시 걱정해주고 있는 건가?

    “버텨라. 버틸 수밖에 없어.”

    유세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 말은 들은 김주희는 끊어져가는 이성의 끈을 애써 간신히 붙잡았다.

    그렇다. 유세현도 버텼다.

    물론 버티기 위해 요상한 심법을 전수 받았다고는 했다지만 흉흉한 마력에 의해 사지가 터져나간 그에 비해서는 지금 자신의 상태는 양호한 편이었다.

    “으으!”

    몸을 웅크린 그녀는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정말 온힘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 물 그 자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을 수 있었다.

    문득 운디네가 떠올랐다.

    입도 거친데다가 상당한 말괄량이지만 그래도 심성은 나쁘진 않은.

    이 물도 사실은 그런 게 아닐까? 폭주를 두려워 한 자신을 짓궂게 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자 물의 반발이 조금씩 수그러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눈앞에 떠오르는 하나의 알림창.

    [유니크 S Rank 스킬 정령화를 익히는데 성공하셨습니다. 물에 대한 친화도가 대폭상승 합니다.]

    보글 보글.

    지면에 흡수되었던 물이 다시 흙에서 분리되어 김주희의 몸으로 되돌아와 육체를 구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뒤, 김주희는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완전히 돌아와 있었다.

    김주희는 몸을 조심스레 일으켰다. 표정이 원상복귀 된 유세현이 툭 말했다.

    “...잘 버텼네. 손 잘려나간 쪽 내밀어봐. 이런건 빨리해야 돼.”

    “아...”

    김주희가 조심히 팔을 뻗자, 유세현은 미리 주워놨던 손목을 잘린 단면에 정확히 갖다 대었다.

    지지직.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붙어가는 손목.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살짝 머쓱한 표정이 되어 볼을 긁적였다.

    “저...선배님.”

    “왜?”

    “그...죄송해요. 선배님께서 목숨 걸고 들고 오신 아이템 제가 멋대로 사용했어요.”

    “아, 그거?”

    유세현과 이강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교차했다.

    김주희가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부터 어차피 반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레콰이크에게서 아이템을 강탈했다는 것. 그리고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네 상태를 보니까 나나 이강호가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고.”

    “...그래도 그거랑 이거는...”

    “목숨까지 걸고 사용했으면서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네가 없었으면 당했을 테니까.”

    유세현은 평소답지 않게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김주희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잠시 지켜보고 있던 이강호가 넌지시 말했다.

    “고비를 넘긴 것 같으니 바로 움직이자. 이젠 돌아가야지.”

    “조, 좋아! 가자고 당장!”

    눈치를 살피고 있던 게릭이 재빨리 거들었다. 정말 기다리고 기다렸었던 그런 말이었다.

    곧 그들은 코인을 분배하기 무섭게 사원탈출을 위해 이동을 개시했다.

    * * *

    털썩.

    온갖 고생 끝에 요새로 돌아오는데 성공한 게릭은 넋이 반쯤 나간 표정으로 그물침대에 몸을 던졌다.

    진짜로 돌아오긴 돌아온 것인지.

    그는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하여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툭툭 쳤다.

    감각이 또렷이 느껴지는 게 확실히 꿈은 아니다.

    미친 듯이 솟구치는 감동의 물결.

    허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게릭님 지금 바로 움직이셔야 됩니다.”

    “후...알았다. 나가지.”

    게릭은 약 한달 동안 실종 상태였다. 더 나아가 데리고 간 병력들은 전멸.

    어떠한 경험을 했을지 모르는 만큼, 보통이라면 약간의 휴식시간을 주고 추궁을 하기 마련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이제 곧 고층계 인원들은 판도라로 떠난다.

    때문에 하루빨리 수장을 정할 필요성이 있는 그들이 게릭을 향해 진상규명을 촉구한 것이다.

    “후...”

    게릭은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차분히 쓸어 올렸다.

    전쟁을 치르고 오니 또 하나의 전쟁이 도사리고 있다.

    자리를 탐내던 사람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분명 엄청나게 물어뜯으리라.

    허나, 그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했다.

    유세현 일행과 이미 말을 맞춰뒀을 뿐더러, 아무리 꼬투리를 잡기 위해 질문을 퍼부어도 그들과 같이 다니는 것 그 이상의 위기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릭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게이트가 열리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10일 뿐이었다.

    * * *

    “칼륀과 페르도라가 당했습니다.”

    수색을 담당한 고블린이 삼지창을 들고 있는 레콰이크를 향해 보고를 올렸다.

    평소 감정을 잘 비추지 않던 레콰이크의 인상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이제는 하다하다 못해 판도라로 향할 그들까지 당하다니.

    이대로 계속 나아가게 된다면 이번 세대의 고블린들은 인간진형에게 모든 것을 먹혀버리게 되는 수가 있었다.

    급습에 이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

    “폴란.”

    “예.”

    “병력을 전부 집결시켜라.”

    “...설마?”

    “선배들이 판도라로 넘어가기 전 인간진형 한곳을 무너트린다.”

    < 폭풍전야(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