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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103화 (103/612)
  • < 물빛의 사원(3) >

    저벅 저벅.

    동서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는 4개의 통로 중, 유세현 일행이 위치해 있는 남쪽을 제외한 3개 통로에서는 고블린들이 계속 줄지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정렬 하기 앞서 중심부에 위치 해 있는 한 고블린에게가 무릎을 꿇는 행동을 취했는데, 아퀼라는 누가 따로 명령하지 않았음에도 제 3의 눈을 움직여 그 포인트를 놓치지 않았다.

    수정구슬을 쳐다보는 이강호의 눈매가 점점 날카롭게 변해간다.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턱에 상당히 조악한 화질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수정구슬에 비치고 있는 고블린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사람만한 큰 키와 상당히 날렵해 보이는 몸.

    대족장 레콰이크.

    ‘역시 와 있었군.’

    추측은 완전히 들어맞았다.

    온 정신력을 집중하여 마력의 크기를 살핀 유세현이 슬쩍 게릭을 흘겼다.

    눈이 빠져라 수정구슬 주시하고 있는 그는 고블린들의 물량에 압도 되어 넋이 반쯤 나간상태였다.

    하기야, 이것이 당연한 반응이긴 하다.

    유세현이 지니고 있는 스킬을 모르는 그의 입장에서는 적들에게 발각 당하는 순간 목숨은 거의 없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유세현이 그 틈을 타 이강호에 귀에다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저 중간에 있는 놈 D랭크에 무척 가까워.”

    “...역시 그렇군.”

    “어떻게 할 거냐? 저놈 말고도 D랭크 이상인 놈들이 꽤 있어.”

    “흠...”

    이강호는 잠시 망설였다.

    마음 같아서는 보스를 잡은 뒤에 나올 아이템을 강탈하고 싶었다. 허나, 그러기 위해서는 유세현의 능력이 무조건 필요했다.

    과연 그가 한다고 할지.

    “넌, 어떻게 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그렇기에 이강호는 유세현을 향해 되물었다. 이런 건 모름지기 스킬 사용자의 판단이 중요한 법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세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전을 위해서면 빠지는 게 맞겠지만...이곳에서 나오는 아이템 상당히 좋겠지?”

    “응.”

    그들은 이곳에 당도하기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석판을 사용했다. 이는 팀이 나눠져 있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모을 수 없는 양이었다.

    또 더 나아가 구름섬 5층을 누빌 수 있는 스펙을 지닌 그들이 무려 3주라는 시간이 걸렸다.

    만약, 고블린 쪽에서도 고층계 인원들이 나서지 않았다면, 시간이 장난 아니게 소비되었을 것이다.

    공들인 시간으로 보나, 석판의 양으로 보나 사실상 아이템의 질은 보장이 되어있는 상황.

    “좋아, 그럼 강탈만 시도해보자.”

    “오!”

    “뭘 그리 놀래냐...”

    물론, 이전의 유세현이었다면 당연히 물러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허나, 그는 이강호에게 판도라의 실체를 들었다.

    단순한 생존에서 이기기 위한 싸움으로 의미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기기 위한 싸움을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지만 좋은 아이템과 스킬로 우위에 설 필요성이 있다.

    유세현은 휴식을 취하거나 할 때마나 틈틈이 과거에 대해 물어봤었다.

    어떻게 지냈냐. 상황은 어땠느냐.

    그리고 여지없이 이야기를 듣게 되는 날에는 그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 다시 한 번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은 무척이나 강하지만, 과거에는 무척이나 나약했던 이강호.

    그는 매일 같이 살얼음판을 걸었으며, 전투를 하는 매 순간 일생일대의 고비였다.

    그랬던 이전에 비하자면 이것은 사실 성공률이 높은 쪽에 속한다.

    자신에게는 1일 1회라고 하지만 비장의 스킬이 제법 많이 있었으니까.

    대화를 끝내자 중간부터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던 게릭이 경악을 터트렸다.

    “너, 너희들 대체 무슨...자, 장난이지?”

    “......”

    일행은 그저 지긋이 게릭의 얼굴을 응시하는 것으로 답변을 했다.

    그것에서 진심을 느낀 게릭이 김주희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기, 김주희! 너 이 둘에게 뭐라고 말 좀 해봐라! 이건 아무리 봐도 아니잖나! 개죽음이라고!”

    “선배님들이 한다면 하는 거예요.”

    “...뭐? 아니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건...”

    “한다면 하는 거라고요.”

    “...갓 댐.”

    다부지게 답하는 김주희의 말투에서는 맹목적인 신뢰가 느껴졌다.

    게릭의 턱이 떡 벌어졌다.

    진즉 미쳤다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아이템을 위해서 사지로 들어갈 생각까지 할 줄이야.

    ‘서, 설마 날 미끼로? 아니, 분명히 살려준다고...아니, 이런 상황이라면...’

    뇌가 과부하를 일으키며 사고가 정지 한다.

    그 후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패닉.

    순간적으로 버려질 것을 떠올린 한 게릭이 유세현을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그, 그럼 나에게도 계획을 말해줘!”

    “간단해.”

    유세현의 말과 같이 계획은 무척 단순했다. 시선을 끌고, 아이템을 강탈해 도망친다.

    추격은 함정을 발동시키는 것으로 길을 차단해 막으면 되니 의외로 간단하다.

    “그, 그게 전부?”

    “그렇지.”

    ‘이, 이놈들은 진짜 미쳤어...’

    눈빛에서 진심을 느낀 게릭은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 품에 안겨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 * *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블린들이 더욱 몰려들었음에도 레콰이크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레콰이크와 고블린들의 시선은 어느 한곳으로 향해있었다.

    중심에 위치하여 원의 모양으로 박혀있는 20개의 수정구슬.

    19개의 수정구슬은 각양각색의 빛을 발산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 1개는 좀처럼 빛을 발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때였다.

    지잉!

    남아있던 수정구슬에 붉은 빛이 번뜩이자 사원 내부 전체가 거칠게 흔들렸다.

    물빛의 제단 최종보스를 불러내기 위한 전제 조건이 클리어된 것!

    슈우우욱!

    구덩이에 고여 있던 새까만 물들이 맹렬하게 솟구쳐 오른다.

    덕분에 일행은 재빨리 구덩이를 빠져나가야만 했다.

    허공에 둥둥 뜬 물들은 이내 의지를 지닌 것 마냥 공터를 향해 날아가더니 빠르게 뭉치기 시작했다.

    점점점 형태를 갖춰나가는 흑빛의 물!

    재빨리 벽에 몸을 밀착시킨 뒤, 고개만 빼꼼 내밀어 공터를 살핀 유세현 일행의 두 눈동자에 삼지창을 들고 있는 거대한 반인반수가 비쳤다.

    -크아아아!

    “쳐라!”

    레콰이크가 창을 들어 올리자 고블린들이 개떼거지처럼 달려들었다.

    서걱!

    촤악!

    고층계 인원들의 무기에 의해 조금씩 분해되어 떨어지는 반인반수의 육체.

    최종보스는 커다란 삼지창을 휘두르며 항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운디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눈앞에 있는 최종보스는 색깔과 형태가 조금씩 달랐지만, 분명 자신이 아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여성체인 자신과는 다른 개체로, 반은 남성 반은 짐승의 형태를 띠고 있는 물의 상급 정령.

    에르토락스.

    “왜, 에르토락스님이 이런 곳에...”

    운디네가 중얼거리자, 이강호가 툭 말했다.

    “저건 네가 아는 그런 게 아니야. 잘 알고 있을 텐데?”

    “...하, 하긴. 그렇지?”

    그간 같이 싸워온 것이 있기에 운디네는 금방 납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그렇다고 찜찜한 기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계속 싸움을 주시했다.

    “캬하하하!”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있던 한 고블린의 무자비한 난자에 짝퉁 에르토락스의 하반신이 일자로 잘려나갔다.

    이것이 고층계 인원들의 힘!

    최종보스를 등장시키는 것이 어렵지, 막상 잡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일도 아니었다.

    -크아! 죽어라!

    궁지에 몰린 에르토락스가 창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운디네가 일으키는 것보다 더한 파도가 용솟음치며 일대를 휘어 감았다.

    직접적인 타격보다는 진형을 무너트릴 때 많이 사용하는 스킬.

    “키히히히! 그 따위 걸로!”

    높이 도약하여 파도를 피한 고블린 한 마리가 바스타드 소드를 내리그었다.

    구별하기 힘든 고블린의 목소리 치고는 새삼 익숙한 목소리였다.

    ‘저 녀석 설마?’

    시선을 집중하는 유세현의 눈동자가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 위엄을 내뿜던 에트로락스의 거대한 육체는 점점 무너져 내리며 그 끝을 고하고 있었다.

    이제는 타이밍을 잡을 시기.

    “키히! 끝이다!”

    이윽고 바스타드 소드가 중심부에 위치해 있던 핵을 정확히 꿰뚫었다.

    젤리처럼 고정되어 있던 물이 순식간에 비가 되어 흩뿌려지는 찰나였다.

    “엄호!”

    말과 동시에 유세현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쿠아 웨이브!”

    곧 거대한 해일이 그의 뒤를 따랐다.

    허공을 밟으며 순식간에 치고 나아가는 유세현.

    “키릭?”

    고블린들은 살짝 넋이 나간 표정으로 순식간에 지나간 유세현을 살폈다.

    그들은 아직까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허나, 언제고 예외는 있는 법.

    그리고 그 예외에는 여지없이 고층계 인원들이 속해있다.

    “키하하하하!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단번에 유세현을 알아본 칼륀이 광소와 함께 여타 고블린들의 머리를 짓밟으며 돌격해왔다. 바로 뒤를 시미터를 든 페르도라가 보좌하듯 뒤따랐다.

    그 이외에도 제법 많은 고블린들이 유세현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상황.

    그 순간 유세현의 전신에서 새까만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아키몬드와 뱀파이어를 궁지로 몰아붙였던 마왕의 스킬.

    ‘흑암’

    미각, 촉각, 시각, 청각 그리고 그 잘난 후각이 단숨에 상실된다.

    안개의 범위 안으로 들어와 오감을 잃은 고블린들은 당황하여 허둥지둥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고층계 인원인 페르도라나 칼륀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칼륀 어디 있지?”

    아무리 목청껏 외쳐도 들리지 않는다.

    유세현은 그들을 베어 넘길까 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흑암은 내뿜는 안개의 양에 비례해 어마어마한 마력을 소비하는데 지금은 천마군림보까지 사용하고 있는 상태.

    시간을 끌면 마력이 먼저 다 떨어져버리는 수가 있었다.

    유세현의 두 눈동자에 붕괴한 에르토락스의 몸에서 지면을 향해 떨어지고 있는 여러 아이템들이 비쳤다.

    ‘그래, 아이템에만 신경 쓰자!’

    그는 재빨리 눈을 흘겼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주먹만큼 큰 푸른색 구슬과 삼지창!

    양 방향으로 퍼진 탓에 고를 수 있는 것은 아쉽게도 단 하나 뿐이었다.

    유세현은 불명확한 구슬 보다는 무기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남은 거리는 불과 25m.

    삼지창에 거의 다 다른 순간이었다.

    화르륵!

    몸의 우측에서 불길이 일렁였다. 이강호의 화염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엄청난 열기!

    유세현은 황급히 진로를 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도약한 어느 한 고블린이 삼지창을 낚아챘다.

    서로 교차하는 두 눈동자.

    고블린의 전신을 훑은 유세현은 눈앞의 고블린이 레콰이크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세현은 삼지창을 포기하고 재빨리 구슬을 집어 들었다.

    주위에 있는 코인을 흡수하는 건 그야말로 덤.

    곧 흑암이 주위를 완전히 장악하자 레콰이크조차도 움직임을 멈췄다.

    ‘죽일까?’

    유세현은 잠깐 망설였지만 초심을 잃지 않고 이내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마력이 벌써 바닥을 보인다.

    파바밧!

    유세현은 오감을 차단당해 해일에 휩쓸린 것도 모르는 고블린들을 뒤로한 채 다시 허공을 밟아 잽싸게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허나, 정말 모든 전력을 다해 시전 한 천마군림보는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마력을 잡아먹었다.

    ‘젠장.’

    빠르게 흩어져가는 흑암.

    마력을 계속 불어 넣어 유지해야 되는데 그럴 마력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검은 연기가 오감을 차단한 것을 깨달은 수많은 고블린들이 허공을 향해 바람계열의 스킬을 난사하고 있는 상황.

    결국 유세현은 흑암을 포기하고 천마군림보의 유지에 힘썼다.

    그렇게 출구에 거의 다다를 무렵이었다.

    “놓치지 않겠다!”

    이윽고 흑암이 완전히 풀렸는지 칼륀과 레콰이크, 그 이외에도 무수히 많은 고블린들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이강호는 유세현이 스쳐지나가기 무섭게 외쳤다.

    “이제 뛰어!”

    “으아아아! 미친놈들!”

    이강호의 손에 억지로 붙잡혀 있던 게릭은 놓아주기 무섭게 전력질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서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남다른 의지가 엿보였다.

    불의 화살을 날리는 이강호의 옆을 따르던 김주희가 아퀼라를 향해 외쳤다.

    “아퀼라! 어떻게든 막아봐!”

    “저건...무리야.”

    “10초라도 좋으니까!”

    “후...알았다.”

    한숨과 함께 수많은 군세를 막기 위해 돌아서는 아퀼라. 그녀는 제법, 아니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었다.

    “파이어 레인!”

    등 뒤에서 아퀼라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일행들은 곧 갈림길에 들어섰다.

    게릭이 필사적인 얼굴이 되어 외쳤다.

    “하, 함정! 빨리 함정을 발동시켜!”

    이강호는 대답대신 몸소 실천하는 쪽을 택했다.

    특수한 장치에 창을 갖다 대기 무섭게 천천히 닫히기 시작하는 거대한 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서큐버스가 막을 수 있는 시간은 정말 10초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이강호는 묵묵히 오른팔에 마력을 집중 시켰다.

    “캬아악!”

    그리고는 괴성과 함께 내부로 뛰쳐 들어오는 고블린을 향해 불길을 쏘아냈다.

    범위는 문 전체!

    “나, 나도!”

    게릭 또한 뇌전을 내뿜었다.

    이글거리는 화기와 전격에 좀처럼 접근하지 못하는 고블린들!

    문이 거의 닫혀갈 무렵이었다.

    “캬아아악!”

    “키이익!”

    영문 모를 고블린의 비명 소리와 함께 화염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내부로 파고들었다.

    칼륀과 페르도라였다.

    그들의 손에는 불타 죽은 고블린들이 각각 2마리 씩 들려 있었다.

    땅에 시체를 내던진 칼륀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키키키. 너희들 전원! 오늘 여기서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아라.”

    < 물빛의 사원(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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