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98화 (98/612)
  • < 덫(1) >

    “인간! 네놈들은 나 칼륀이 반드시 죽이겠다! 알겠나? 반드시 네놈들을 씹어 먹...”

    퇴각하기 시작한 고블린과 일행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며 괴성의 크기가 점차적으로 줄어든다.

    그렇게 10초가 지나자 고블린들은 이내 시야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간신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생존자들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지면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끄, 끝난 건가.”

    차마 믿기지 않는 다는 음색.

    그럴 만도 했다.

    딱 1분. 북이 울리는 시간이 딱 1분만 늦었더라면 페르도라라는 고블린에 의해 이곳에 있는 인원 대부분의 목이 떨어져 나갔을 테니까.

    쿠구구구!

    거친 땅울림이 느껴진다.

    땅에 꽂아 넣은 루베르크를 지지대로 하여 간신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유세현의 두 눈에는 이곳을 향해 몰려오는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마침내 지원군이 당도한 것.

    “괜찮으십니까?”

    “버, 버틸 만합니다.”

    격전지에 도착한 고층계 인원들은 간단한 물음과 함께 입은 피해를 파악 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 유세현 일행에게도 흑인 남성이 한 명이 조심스레 접근해왔다.

    여타 팀원의 얼굴 대부분을 모르는 유세현으로서도 제법 익숙한 얼굴.

    팀 헤르메스의 게릭 잭슨이었다.

    그가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는 그대로 손을 지긋이 들어 올렸다.

    “또 뵙게 되는군요. 유세현씨.”

    “거기까지...더 이상 접근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이~저는 그저...”

    “거기까지라고 분명 말씀 드렸습니다.”

    “......”

    어차피 그들과 헤르메스는 이제 거의 완전한 적.

    체력을 약간이나마 회복한 일행은 곧장 병장기를 치켜세웠다.

    주위 사람들에게 적대하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주는 것은 별로 좋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접근을 허락하는 것은 더더욱 미련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그가 지친 세 명의 목을 순식간에 딸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을지.

    아니, 정확히 지금 이 상태로는 스킬이 없다 해도 위험하다.

    게릭이 서운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에이~저는 그냥 잠깐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만...”

    “대화는 그 자리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

    입을 살며시 닫은 게릭의 예리한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주변을 훑었다.

    처리하기에는 지금이 절호의 찬스건만, 대놓고 죽이기에는 방금 전 그들이 떠든 말 때문에 주목하고 있는 인원들이 너무 많다.

    영특한 놈들.

    주위 팀원들이 전멸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게릭은 웃는 모습 그대로 몸을 획 돌렸다.

    등 뒤로 이강호의 목소리가 지긋이 울려 퍼졌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 새끼들이...’

    신경을 박박 긁는 말에 움직이던 게릭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셋을 주시했다.

    기류를 타고 흐르는 미묘한 신경전.

    ‘빌어먹을 놈들...두고 보자.’

    게릭은 이내 가던 길을 계속 나아가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토마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어 물었다.

    “저...이강호씨 아니, 중대장님...”

    “쟁탈전도 종료 됐으니 이젠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 예. 그런데 저 사람. 아무리 봐도 팀 헤르메스의 게릭 잭슨 같은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 말에 이강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지금 이것은 그가 유도한 상황이었다.

    사이가 안 좋다는 것을 밝힌 이상, 간단히 이야기를 꾸며 미리 언질을 해둔다면 이상한 소문이 돌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옹호해줄 가능성이 높다.

    이번 쟁탈전에서 이강호의 카리스마와 실력을 본 그들은 완전히 넘어 왔을 것임으로.

    모름지기 팔은 안으로 굽는 법.

    “간단한 불화가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으로 넘어 온지 얼마 안 된 건 알고 계...”

    그는 주둔지로의 이동이 개시 될 동안 그렇게 잠시 동안 이야기를 지어냈다.

    * * *

    주둔지로 돌아오기 무섭게 입은 피해에 대한 연설이 이어지자 한데모여 내용을 듣는 생존자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나가기 시작했다.

    피해의 수준이 심각을 떠나 가히 절망적이었기 때문이다.

    무려 3/5에 달하는 인원들의 죽음.

    그리고 빼앗긴 석판.

    본디 고층계 인원이 저층계 인원에게 간섭한 이러한 전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와주기 싫다던가 등의 그럼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결코 아니다.

    저층계 인원들도 결국에는 강해져서 판도라로 올 것이기에.

    되려 인망을 쌓아두면 나중이 편할 수도 있다.

    허나, 그들이 이러한 장점을 배제하고도 저층계 인원에게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훨씬 근본적인 데에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의 앞길만 살피기에도 급급하기 때문!

    판도라로 향하는 게이트가 열리면, 그곳에서 수많은 마물들이 쏟아진다.

    게이트는 시간이 지나면 닫히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마물을 뚫으면서 나아가야 된다.

    문제는 이 마물이 상당히 강하다는 것.

    때문에 고층계 인원들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장비를 맞추고, 최대한 스텟을 올리기 위해 계속 구름섬 상층부를 돌아다녀야 된다.

    또한 더 나아가서는 인원이 죽지 않도록 관리도 해야 된다.

    계속해서 물밀듯이 쏟아지며 채워지는 저층계 생존자들과 달리 2년차까지 생존하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에 하나가 아까운 고층계 고블린들이 유세현 일행에게 죽은 것은 새삼 큰 손실이라 할 수 있었다.

    “저희 팀 라이트와 팀 아레스는 오늘 일에 대하여 추후...”

    상황 보고를 끝으로 계속 이어지던 연설은 대책방안을 최대한 빨리 마련해보겠다는 것을 끝으로 이내 막을 이었다.

    한데모여 연설을 듣던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천막을 향했다.

    문득 게릭에 대한 이강호의 도발을 떠올린 유세현이 툭 물었다.

    “야, 그 아까 전에 있잖아. 팀 헤르메스의 그...”

    “게릭 잭슨?”

    “어, 맞아. 너 게릭한테 왜 도발을 건 거냐? 이렇게 되면 추적자를 바로 풀 거 같은데...”

    “큭. 그러라고 한 거야.”

    “엉?”

    유세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씨익 웃은 이강호의 설명이 간략히 이어졌다.

    * * *

    생존자 진형의 심각한 타격과는 별개로 살아남는데 성공한 일행들은 눈에 띄게 강해졌다.

    고층계 인원들을 죽이며 양질의 코인을 흡수한 덕에 65%였던 힘과 민첩 등의 주요 스텟이 단번에 75% 이상으로 치솟은 것이다.

    게릭이 부릴 수 있는 인원을 감안하자면 이제는 전면적으로도 충분히 해볼 만 한 상황.

    그는 추후를 위해서라도 미리 담판을 지어 놓고 갈 생각이었다.

    “흐음 그래서 도발을 했다는 거군...”

    “그렇지.”

    “뭐, 할 수만 있다면 후환은 확실히 제거해두고 가는 편이 낫긴 하지...그래서? 정확히 어떻게 처리하려고? 아무리 암흑투기가 있다지만 숫자를 모르는 만큼 전면전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데...”

    “물론이지. 전면전은 좀 더 강해지거나, 정말 최후의 방도로 사용할거야. 내게 생각이 있어.”

    “뭔데?”

    유세현의 물음에 이강호는 둘에게 계획을 간단히 늘어 놨다.

    고블린 있는 곳에 그들을 유인한 뒤 맞붙게 하여 공멸시키게 한다는 것이었다.

    “제법 그럴싸하긴 한데...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냐? 쟤들도 머리가 있을 텐데...”

    “물론. 꽤 쉬워.”

    “......”

    실로 대단한 자신감에 유세현이 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계속 이야기 해보라는 의미였다.

    “일단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행선지를 알릴 생각이야.”

    “...어떻게?”

    “내부 첩자를 이용하는 거지.”

    “첩자?”

    “응. 분명 이 주둔지 안에 있어.”

    유세현이 머리를 살짝 갸웃거리자 이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이언연합의 절차는 허술하기 그지없으니까.

    “분명, 며칠 내로 이 주위를 서성 일거야.”

    “오케이 이해했다. 그때 모른 척 흘리면 되는 거지?”

    “응. 물빛의 사원에 갈 거라고 자연스레 흘려.”

    “물빛의 사원?”

    “응.”

    물빛의 사원은 3층에 위치한 연계 던전 중 최고 규모를 자랑한다.

    들어가는 입구만 해도 10곳이 넘었으며, 통과하기 위해서는 석판 수십 개가 필요하다.

    또한 단순히 입구를 통과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위해서는 석판을 계속 사용해야 된다.

    석판의 부족으로 인해 사실상 끝에 도달한 적이 없다고 알려져 있는 던전.

    아이템 보상이 상당히 괜찮은 만큼 고층계 인원들도 종종 내려와 애용하는 장소였다.

    “흠...그럼 우리끼리는 얼마 나아가지 못한다는 건데 석판이 아깝지 않냐? 몽환의 성처럼 괜찮은 곳을 정해서 클리어하면...”

    “아니, 어차피 우린이제 4층으로 올라갈 수 있어. 조금만 더해서 80%만 넘으면 곧바로 5층도 올라 갈 수 있지. 그러니 미련두지 마라. 몽환의 성 때처럼 최종보스를 잡지 않는 한 아무리 좋아 봤자 거기서 거기다.”

    욕심과 집착은 목숨을 잃게 만드는 법.

    판도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버릴 건 버리고 챙길 건 챙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때문에 이강호는 그 어떤 자그만 한 미련도 두지 않았다.

    지금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추후 장애물이 될 팀 헤르메스의 타도와 고블린의 대족장이 될 레콰이크를 처단하는 것.

    어느새 노을이 지는 것으로 길고 길었던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 * *

    일행들은 첩자도 기다릴 겸, 경매장에서 전장에서 얻은 물품을 석판으로 교환할 겸 잠시 주둔지에 머물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쉬는 일 따위는 결코 없었다.

    첫날도 대련, 둘째 날도 대련, 셋째 날도 대련.

    유세현은 이강호의 창술에 대적하며 쓰러지고 일어나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익숙해 질만 하면 시시각각 적으로 창술이 변화하기 때문에 좀처럼 당해낼 재간이 보이지 않는다.

    상대할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창술.

    ‘언제쯤 저렇게 될 수 있으려나.’

    자신 또한 20년이 필요할 것인가.

    김주희와 교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유세현이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오른편에 위치한 풀숲 바로 너머로 한 개의 마력이 느껴진다.

    ‘이건 설마?’

    유세현은 슬쩍 눈동자만 굴려 이강호를 쳐다봤다. 그 또한 느꼈는지 눈빛을 이용해 모른 체 하라는 신호를 발산 있었다.

    “김주희 잠깐 쉬자.”

    “예? 얼마 안 됐는데...”

    “점심시간이잖아.”

    “아~”

    이강호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김주희가 재빨리 육포를 꺼내 분배했다. 유세현은 그것을 질겅질겅 씹으며 연기를 시작했다.

    “야 강호야 근데 다음 장소는 어디로 갈지 정해 둔거 있냐?”

    “아...그거?”

    매끄럽게 이어지는 대화.

    유세현의 눈짓으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한 김주희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선배님 전 그럼 잠시 화장실 좀...”

    “어, 그래.”

    “예~말씀 나누고 계세요.”

    이전 만들어놓은 간이식 화장실로 잽싸게 들어간 김주희가 재빨리 아퀼라를 소환했다.

    냄새 때문에 잠시 인상을 찡그린 그녀는 곧 날개달린 눈을 만들어 김주희가 말하는 위치를 향해 날렸다.

    이내 수정구슬에 포착되는 한 명의 남자.

    얼굴을 확인한 김주희 인상이 살짝이나마 구겨졌다.

    * * *

    “호오~ 정말 이한철이었다는 거지?”

    “예. 선배.”

    “일이 생각보다 쉬워지겠군.”

    김주희의 보고를 받은 이강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자신들의 신상정보를 진즉에 팔아먹었을 게 분명한 만큼, 이한철의 말은 무척 신뢰도가 높을 것이기 때문.

    이렇게 되면 구태여 떡밥을 더 뿌릴 필요조차도 없다.

    남은 것은 덫을 깔고 유인하는 일뿐.

    하루 뒤 움직임을 개시한 일행은 주둔지에서 조금 떨어진 요새로 가는 길목의 풀숲에 은폐했다.

    세상에 100%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 만큼, 만에 하나 이한철이 첩자가 아닐 경우 하려는 짓이 단순한 뻘짓이 되기 때문이었다.

    허나, 아무리 세상에 100%가 없더라도 높은 확률은 대개 맞기 마련.

    반나절이 지나자 이한철 팀이 이동이 포착되었다.

    “좋아. 이제 물빛의 사원으로 가자.”

    “오케이.”

    이한철 팀이 지나가기 무섭게 세 명은 곧장 이동을 개시했다.

    * * *

    건축물들이 물에 반쯤 잠긴 형태를 하고 있는 물빛의 사원.

    이곳에 막 도착한 일행들은 몸을 숨긴 채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는 대군. 그러나 결코 인간의 군세는 아니었다.

    “키륵, 키륵.”

    귓가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목소리.

    여러 갈래로 갈라져 물빛의 사원 내부에 진입하고 있는 존재는 고블린들이었다.

    쟁탈전에서 강탈한 석판을 가지고 사원으로 대규모 사냥을 나선 것!

    이강호의 입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타이밍이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이러면 직접 돌아다니면서 고블린이 위치해 있는 장소를 찾을 필요도 없지 않는가.

    < 덫(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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