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94화 (94/612)
  • < 접촉(3) >

    슈우욱.

    지면에 낮게 밀착하여 달리는 그들의 육체에 거친 바람이 일렁였다.

    이 상태의 속도라면 숨어있는 팀 헤르메스의 인원과 맞닿는데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먼 치에 떨어진 높은 나무위에서 시야 확대 아이템으로 일행을 주시하고 있던 제이미의 입에서 당황 섞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헉! 이, 이게 무슨!”

    게릭의 말처럼 소수인원으로 구름섬을 누비고 있는 인원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신기한 일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 뭐가 있을지도 모르는 구름섬에서 저렇게 질주를 하다니.

    설마, 이 감시를 눈치 챘다는 것인가.

    이제 막 포탈에서 내려온 자들이?

    이는 레어 등급의 탐지스킬이 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젠장.”

    “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이곳과 맞닿습니다.”

    “크...”

    제이미가 입술을 질끈 곱씹었다.

    그들이 이러한 행동을 취함으로 인해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단 두 가지뿐이었기 때문.

    병력을 물려 모른 체 하거나 아니면 직접 나가서 가로 막은 뒤 대화를 해보거나.

    웬만해선 접촉하지 말라고 게릭이 대놓고 충고했었던 만큼 보통이라면 전자를 선택하는 게 맞다.

    허나, 저들은 친했던 칑탄을 살해했을지 모르는 용의자들.

    “일단 막아선다.”

    “...흠 그건 별로 좋지 않은 생각...”

    제이미의 선택에 옆에 있던 부관 론의 입에서 떨떠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작 3명이서 구름섬을 활보하는 정신 나간 놈들을 일단 막아서겠다니, 아무리 인원이 많다지만 등골이 싸하다 못해 시리기 그지없다.

    “제이미님 그러지 마시고 일단은 모른 척 보낸 뒤에 어느 포탈로 향하는지를 파악하는 편이 더...”

    “시끄러워. 그럼 늦어. 그리고 우리 팀 헤르메스야. 어? 일단 내가 혼자 막아볼 테니까 넌 빨리 애들 이곳으로 집결시키기나 해!”

    이윽고 나무를 내려간 제이미는 그들이 다가올 동선에 서서 대기했다. 뒤따라 내려온 론이 막 황급히 이곳저곳에 명령을 전파하고 있을 때였다.

    스륵 스륵.

    풀숲 저편에서 마침내 유세현 일행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이미는 재빨리 그들을 불러 세웠다.

    “잠시 멈춰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팀 헤르메스의 제이미 그롬웰이라고 합니다! 현재 특수한 임무를 수행 중에 있습니다!”

    후웅!

    매서운 속도로 움직이던 세 명의 육신이 갑자기 정지했다.

    멈춘 발끝으로 잔잔하게 흩어지는 바람.

    상황을 유도했던 이강호가 재빨리 제이미의 전신을 훑었다.

    고블린의 가죽을 소재로 한 듯한 레더아머와 부츠 그리고 각반까지.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복장을 주시하던 이강호의 시선이 어느 한군데서 잠시 멈춰 섰다.

    왼쪽 가슴위에 달려 있는 견장.

    견장에는 보랏빛이 감도는 자그만 한 수정이 박혀있었다.

    사용자가 보고 있는 것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레어 아이템.

    비록 남길 수 있는 기록시간이 짧은 게 흠이지만 상당히 희귀하기 때문에 본래 6개월 차 생존자가 지니고 있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게릭이 만약을 위해 제이미에게 빌려준 물건.

    만약 경고하는 것을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면 정식적인 절차를 밟을 수 있는 빌미를 주는 것이 되었으리라.

    ‘역시 가지고 있었군.’

    이강호는 모른 척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이언연합의 이강호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이강호...!’

    이름을 들은 제이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요새에서 출발하기 전 게릭을 통해들은 2명의 용의자 중 한명.

    안타깝게도 증거가 없기 때문에 제이미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추스르며 유도심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갑작스럽게 앞길을 막아선 점 무척 죄송합니다. 지금 저희는 팀원을 살해한...”

    그러자 이야기를 전부 경청한 이강호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수고가 많으십니다. 꼭 잡으셨으면 좋겠네요.”

    “......”

    “그럼 저희는 갈 길이 바빠서 이만...”

    일행은 곧장 제이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당장 증거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당당히 할 수 있는 행동.

    제이미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렇게 유도심문을 한다면 무슨 반응이 있기 마련인데 반응은커녕 그 흔한 말실수조차도 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막연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되는 상황.

    손을 뻗어 길을 차단한 제이미가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아직 세분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흠...뭔데요?”

    “지금 세분께서는 저희 용의자 리스트에 올라와 있습니다.”

    “예? 용의선상이요?”

    당황해하는 이강호의 연기는 평소 무뚝뚝한 것과 달리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이것이 판도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지 한 남자.

    평소 거짓말을 좋아하지도, 하는 편도 아니지만 막상 해야 될 때는 거침이 없다.

    이강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럴리가요? 저희는 잘못한 게 없어요! 혹시 다른 분과 착각한 건 아니신지...”

    증거를 대라, 이유라도 있냐라는 식으로 물어보는 건 머저리나 하는 행동.

    얽히고설킨 그 복잡한 상황을 게릭에게 듣지 못한 제이미는 더 이상 논리적으로 꺼낼 말이 없었다.

    때문에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 뿐.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세 분에서는 확실히 저희 팀 헤르메스의 용의선상에 올라있습니다. 그러니 잠시 동행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저희는 바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갑자기 범죄자 취급을 하시다니 기분이 많이 나쁘군요.”

    “......”

    “동행은 거절하겠습니다. 만약 이 이후에도 동행을 원하시는 것이라면 아이언 연합에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주시길 바랍니다.”

    이강호는 다부지게 말하며 발을 뗐다.

    여기까지가 딱 그가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만약 팀 헤르메스의 권력을 앞세워 억지로 동행을 시키려 한다면...

    제이미의 입에서 기어코 선을 넘는 발언이 튀어나왔다.

    “팀 헤르메스의 이름아래 가게 둘 수는 없습니다. 딱 하루면 됩니다. 또한 만약 범인이 아니시라면 마땅한 보상도 해드리겠습니다.”

    “...흠. 그런가요? 그래도 싫다고 하면?”

    “그렇다면 힘으로라도...읍!”

    습관적으로 말을 내뱉던 제이미가 얼른 입을 닫았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정상적인데다가 살살 맞춰주니 그들이 3명이서 구름섬을 누비고 다니는 괴물이라는 것을 잠시마나 잊은 것이다.

    이강호의 손이 등에 메고 있는 창대로 슬그머니 향했다.

    “지, 지금 저희를 건드리신다면 향후 수습이 불가능...”

    의도를 파악한 제이미가 깜짝 놀라 외친 찰나였다.

    서걱.

    공간을 가르는 살벌한 음색과 동시에 그녀가 바라보고 있던 세상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마치 중력이 바뀌듯.

    “아...”

    중얼거리는 그녀의 두 눈동자로 이강호의 목, 가슴, 발이 느리게 지나갔다.

    이것이 그녀가 숨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

    * * *

    “미, 미친!”

    도망치는 부관 론의 입에서 비명 섞인 욕설이 터져 나왔다. 내심 불안하긴 했지만 그 또한 고작 단 3명이서 팀 헤르메스에게 싸움을 걸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서걱.

    촤악.

    그들의 가하는 일격에 의해 힘없이 쓰러져 가는 팀원.

    숲을 누비는 그들은 그야말로 살인귀 그 자체였다.

    ‘이, 이곳에서 벗어나야 돼!’

    적은 이미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즉 그 뜻은 숨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

    전력질주 하던 그가 발을 한걸음 더 내딛었을 때였다.

    쿠우웅.

    갑자기 알 수 없는 무형이 힘이 육신을 강하게 짓눌렀다. 마치 땅이 직접 육신을 잡아끌고 있는 듯한 느낌.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억지로 들어 올린 론의 두 눈동자에 새까만 검을 들고 있는 한 남자가 비쳤다.

    분명 뒤에 있어야 될 터인데 어떻게 벌써 여기까지 따라 붙었단 말인가.

    론은 그를 향해 필사적으로 외쳤다.

    “사, 살려줘. 우리는 잘못 없어! 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허나, 남자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더 매서운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

    “으아아아! 나, 난 하지말자고 했다고! 그러니깐 살려...”

    서걱.

    유세현은 어설프게 동정하지 않고 일격에 론의 목을 베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팀을 잘못 선택한 것 또한 자신이 책임 져야 될 부분이다.

    아니, 되려 그들과 동행했다면 자신들이 당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절차를 밟으려하지 않으려는 놈들 중 뒤가 더럽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으므로.

    쿠구궁!

    마력을 더욱 쏟아 부운 유세현의 암흑투기가 광활하게 퍼져 일대를 더욱 강하게 짓눌렀다.

    유세현은 함구를 위해서라도 한 사람도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둘 생각이 없었다.

    * * *

    “미친...”

    제이미와의 연락이 끊긴 장소에 도착해 싸늘하게 식어있는 시체를 확인한 게릭과 정예멤버들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켰다.

    팀원이 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맞붙었다면 승산이 없다는 것은 이미 예견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가 이렇게까지 동요하고 있는 이유.

    ‘어떻게 한 곳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이 당할 수가 있는 거지?’

    몸이 수십 개가 아닌 바에야 흩어져 도망치는 인원들을 막을 방도는 없다.

    허나, 제이미의 추격대들은 대부분 이 근처에서 전멸했다.

    몇 명이 생존했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

    순간적으로 오한이 게릭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일이 완전히 꼬여버렸을 뿐더러 상대 또한 완전 잘못 건드렸다.

    이제 어쭙잖은 대화로 수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젠장!’

    게릭은 황급히 수색을 개시했다.

    이렇게 되면 제이미에게 붙어있을 기록 장치를 한시라도 빨리 찾아 그들을 아이언연합에서 추방시킨 뒤 처리해야 된다.

    또 기묘하게 종적을 감춰버리기 전에.

    이윽고 30분이 지나자 수색을 개시하고 있던 부대원 한명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찾았습니다!”

    “그래? 기다려 당장 간다!”

    게릭은 황급히 다가가 견장을 살폈다.붙어 있어야할 것이 없다.

    “으으아아악!”

    게릭의 분노 섞인 외침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 * *

    제이미의 수색대를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정리한 유세현 일행은 다가오는 게릭의 팀을 피해 구름섬을 내려왔다.

    주둔지의 입구를 향해 나아가던 유세현이 이강호를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는 팀 헤르메스를 완전히 적이라고 생각해야겠네.”

    “그렇지. 증거를 남기지 않은 덕에 대놓고 수작을 걸어오진 못하겠지만 쟁탈전에서는 조심해야 될 거야.”

    “...한 놈 때문에 괜한 고생이네.”

    “뭐, 원래부터 이런 곳이니까.”

    “으~전 그놈들이 이렇게 대기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선배.”

    “어느 때도 방심하지마라.”

    “예. 선배!”

    셋은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주둔지의 입구 앞에 섰다.

    그러자 유세현을 알아본 경계병들의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지, 진짜로 돌아 온 거야?”

    “허, 이거 진짜 괴물이네.”

    구름섬은 무척 좁다.

    때문에 일행이 몽환의 성 공략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보름 동안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진 상태였다.

    다 져가는 전장을 뒤집은 신예.

    소수의 인원으로 구름섬을 탐험하러 나간 미친놈.

    그들이 발 빠르게 주둔지를 나간 탓에 아직 소문뿐이었지만 얼굴이 알려지는 날도 머지않았다.

    천막에 돌아온 일행은 정말 잠깐 동안 휴식을 취한 뒤, 곧바로 공유지구로 가 얼마 뒤에 있을 쟁탈전에 이름을 올린 후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막 천막에 도착했을 때였다.

    앞에 누군가가 대기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잘 정돈 된 단발머리.

    “세현아!”

    유세현을 발견한 김다혜가 이름을 부르며 황급히 뛰어왔다. 유세현은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이 결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야! 고작 세 명으로 바깥을 싸돌아다니면 어떡해!”

    “......”

    “아무튼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앞에선 김다혜가 유세현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유세현은 무표정을 유지하며 툭 말했다.

    사적인 사유로 온 것이라면 그냥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오신 이유가?”

    “아...그거?”

    “만약 사적으로 오신 거라면...”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이미 한번 냉철함을 경험했던 김다혜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천막으로 들어가려는 김주희와 이강호를 재빨리 붙잡은 뒤 말을 이었다.

    “혹시, 7개월 차 쟁탈전에도 참여 하실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유세현은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강호가 답했다.

    “그럼 이번에도 자유 팀으로?”

    “예.”

    “음, 그렇군요. 사실, 오늘 제가 이곳에 온건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예요.”

    “아...그 어떤? 만약 이전에 권유하셨던 영입에 대한 건이라면 이미 답변을...”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말을 끊은 김다혜가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내용은 무척이나 간단.

    이번 6개월 차 쟁탈전을 벌인 생존자들을 7개월 차에 껴 넣으려고 하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의 발생으로 지휘자 급 생존자들이 많이 죽었다는 것이다.

    즉.

    “세 분이서 팀 하나를 이끌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용병 신분으로 말이죠.”

    “흠...”

    “어떤가요? 자유 팀으로 달랑 3명이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김다혜가 날카로운 부분을 지적하며 파고들었다.

    이강호의 눈이 번뜩 빛났다.

    스텟이 오른 지금 사실상 그녀가 지적한 부분은 별로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팀 헤르메스의 접근을 막을 수가 있다.

    허나.

    “확실히 좋은 제안이긴 하네요. 하지만 과연 팀 라이트의 일원 분들이 저희를 인정해줄지...”

    이강호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김다혜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여러분들은 아직 스스로의 존재감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군요. 지금 이 주둔지에서 여러분들을 모르는 인원은 없어요.”

    < 접촉(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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