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접촉(2) >
선공은 김주희로부터 이어졌다.
그녀는 정말 온 힘을 다해 그간 어깨너머로 보고 익힌 창술을 쏟아냈다.
찌르고 차고 베기까지.
뻣뻣이 이어지는 그녀의 움직임은 이강호가 보기로서는 무척 어설프기 그지없었지만 무게 중심이라던가 힘만큼은 제대로 실려 있었다.
이는 단순히 눈치레로 창술의 겉모양만을 베낀 것이 아닌, 움직임 하나하나에 대해 많은 고려를 했다는 증거.
“하압!”
후웅!
그녀가 휘두른 창끝이 아슬아슬하게 아퀼라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아퀼라의 눈가가 순간적으로 꿈틀거렸다. 유세현에게 당했던 몽환의 성 때와 달리 컨디션이 최상인 상태인지라, 상대가 자신 있어 하는 육탄전으로 끝을 내 굴욕을 맞보게 해주려 했는데 예상보다도 갭의 차이가 컸던 것이
다.
“칫.”
결국 김주희를 인정한 아퀼라는 주특기 기술인 결계를 구현했다.
길게 늘어지는 새까만 빛과 함께 전후좌우 그리고 상하로 펼쳐지는 50m 가량의 붉은 공간.
이 공간은 몽환의 성 때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공간도약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아퀼라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각오해라 계집.”
전투는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 * *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으로만 보자면 아퀼라가 좀 더 우세했다.
김주희가 재빨리 달라붙어 창을 휘두르면 아퀼라는 재빨리 떨어지고 마법을 날린다.
한 방이라도 맞게 된다면 치명상을 입을 수 있을 만한 화력이었기에 김주희는 몸을 구르든가 던지든가 해서 무조건 전부 피해야만 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빈틈.
아퀼라는 이것을 놓치지 않고 연달아서 마법을 날렸다.
덕분에 조금씩이지만 형세는 점점 아퀼라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호호호. 포기하시지? 더 다치기 전에?”
아퀼라는 스스로의 승리를 예감했다. 허나, 그 순간 분위기가 다시 급반전되었다.
혼자의 힘으로만 상대해 오던 김주희가 이내 운디네를 소환한 것!
혀를 차는 아퀼라를 본 운디네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역 소환 된 후로부터 제법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못 잡았단 말인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한 운디네가 막 서포트를 하려던 참이었다.
무심코 그녀의 두 눈에 가만히 상황을 구경하고 있는 유세현과 이강호가 눈에 띠었다.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결코 아닌데.
‘뭐지?’
운디네는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살폈다.
이전 전투를 벌이고 있던 몽환의 성과는 전혀 다른 지형.
이내 운디네의 견제가 시작되자 밀리기 시작한 아퀼라가 김주희를 향해 침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으~타인의 힘을 빌리다니 비겁하구나!”
“비겁은 개뿔! 그렇게 따지자면 네 몸이 더 비겁...아니, 아무튼 이만 좀 쓰러지고 얌전히 주인님으로 모시기나 해!”
“......”
열심히 서포트하던 운디네의 눈이 게슴츠레 변했다.
주인님이라니?
‘이거 설마...’
운디네는 견제하는 상태를 유지하며 설마 설마 하는 마음으로 유세현에게 다가가 물었다.
“세현 오빠 지금 이게 무슨 상황...”
딱히 숨길 필요도 없었기에 유세현은 간단히 풀어 이야기 해주었다.
그러자 운디네의 입 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내 운디네가 손가락을 튕기자 아퀼라를 견제하고 있던 물줄기가 빠르게 수그러들었다.
맹공을 퍼붓고 있던 김주희가 깜짝 놀라 외쳤다.
“야 운디네! 지금 뭐하는 거야! 제대로 안 해?”
“응? 내가 뭘?”
“아니, 견제를...앗!”
김주희는 날아오는 화염구를 재빨리 피했다. 지면을 데굴데굴 구른 그녀가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운디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릿한 미소가 맺혀있는 얼굴.
김주희는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운디네가 모든 사실을 알아차린 것을.
‘아...망했다.’
안 그래도 최근 운디네를 한번 골린 적이 있다. 언제고 한방 제대로 먹일 줄을 알았는데 하필 이런 상황에서 카운터 펀치를 날릴 줄이야.
김주희의 어깨에 걸터앉은 운디네의 입에서 스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후후후...결투라는 건 원래 혼자 하는 거지 안 그래? 내가 끼면 비겁하잖아~”
“...운디네. 지금까지 내가 정말 미안했어. 우리 모든 걸 잊고 다시 잘 지내보지...앗!”
김주희는 황급히 다시 땅을 굴렀다.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아퀼라의 공격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이대라면 다 이긴 판을 말아 먹게 생긴 상황.
어떻게든 빠른 설득이 필요했다.
“운디네. 우리 이럴게 아니라 딜을 하자! 유지시간 10분 더 늘려줄게 어때?”
“흐음...고작?”
“으으으! 15분! 더 이상은 안돼!”
“흐음. 부탁하는 자세가 바람직하지 않은데?”
“으아아아! 너어!”
김주희는 당장에 폭발하기 직전인 반면 운디네는 무척 신이 났다.
이런 상황이 아니고서야 언제 김주희를 몰아붙일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위기에 빠진 김주희의 머릿속에 별안간 번개폭풍이 휘몰아쳤다.
깨달음을 얻은 김주희가 해탈한 표정이 되어 시를 읊듯 중얼거렸다.
“나의 소중한 친구 디네야...”
“야. 정신 나갔냐? 갑자기 왜 그래? 그리고 내 이름은 디네가 아니고 운디...”
느끼함이 가득 담긴 말에 소름이 끼친 운디네가 양팔을 황급히 비볐다. 허나, 김주희는 그 입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내 심정을 몰라주는 네가 무척 슬프기 그지없단다.”
“아니, 이년이 하다 하다 안 되니까. 감성을 팔고...”
“디네야 너 근데 혹시 그건 알고 있어?”
“뭘?”
“지금 내가 저 서큐버스를 제압 못하면, 쟤를 봉인하고 있는 이 팔찌가 선배님들에게 간다는 거.”
“...?!”
운디네의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유치원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의미하는 바가 무척이나 간단했기 때문.
운디네가 양손에서 아쿠아 에로우를 쏘아대며 외쳤다.
“야! 이년아! 그런 건 미리미리 말했어야지!”
“그러게 심통 안 부리고 그냥 도와줬으면 좋았잖아!”
이윽고 둘의 협공이 재개되었다.
운디네가 발현한 마법이 아퀼라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김주희의 창이 쇄도해 들어간다.
이전보다 보다 한층 더 완벽해진 연계.
마음이 한데 뭉친 둘은 정말 이상하리만치 강했다.
전세가 단번에 역전된 아퀼라의 입에서 침음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라면 패배는 확정적이다.
“쳇! 계집에게 들러붙는 건 딱 질색이지만...”
결국 아퀼라는 감춰두었던 능력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을 갉아 먹는 것으로 대상자를 심연의 나락으로 빠트리는 서큐버스의 메인 스킬중 하나.
“나이트메어.”
순식간에 나타난 아퀼라가 손을 뻗기 무섭게 김주희의 의식이 늪으로 가라앉았다.
* * *
김주희는 그 누구에게도 가족사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말해봤자 좋을 것 하나 없던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억지로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잔혹 무도한 폭력과 폭언.
그로인해 생긴 멍든 몸과 부서진 마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이후에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부서진 가구와 흐느낌뿐이었다.
폭력이 무섭다. 아픈 것이 싫다.
이것이 그녀가 1차 튜토리얼에서 좀처럼 싸우지 못했던 이유.
그리고 지금 그 장면이 김주희의 앞에서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아버지와 맞고 있는 어머니.
반항을 해보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폭력은 더욱 거세진다.
이윽고 어린 김주희에게까지 이어지는 물리적 피해.
다 자라지 못한 몸이었기에 무척이나 아팠다. 또한 턱 막힌 듯한 가슴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후후...”
최대의 트라우마를 꺼낸 아퀼라는 악몽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는 김주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까지 왔다면 거의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조금만 있으면 그녀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리라.
그녀는 차분히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허나, 정말 이상하게도 김주희는 무너져 내리지 않았다.
‘뭐지?’
깜짝 놀란 아퀼라는 그녀의 의식을 살폈다.
‘아퍼...괴로워...’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허나.
김주희는 더 이상 폭력 그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더욱 신경 쓰고 있는 무엇인가에 의해.
‘도대체 뭐 때문에?’
트라우마란 직접 경험한 악몽 그 자체. 본래라면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아퀴랄는 우선순위를 찾아내기 위해 그녀의 의식에 더욱 파고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는 발견했다.
김주희를 지탱 해주고 있는 빛이자, 나락으로 떨어드릴 수 있는 어둠을.
아퀼라의 눈동자에 두 사람이 비쳤다.
마왕님과 또 다른 남자.
김주희는 이 둘에게 버려지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고 있었다.
‘후후...두려워하는 게 이런 거라니.’
약점을 알아낸 아퀼라가 악몽을 조작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김주희의 기억 파편 속에 위치해 있던 이강호에게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말이야 사실...”
회귀 한 것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죽어있던 김주희의 눈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는 동료로서 제대로 인정받았다는 것이 되기 때문.
즉.
“이게 감히?”
지금의 그녀에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쨍그랑!
어린 몸을 하고 있는 김주희가 아퀼라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자 악몽이 깨져나가며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현실의 김주희는 아퀼라의 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
그것을 바라 본 아퀼아의 입에서 당혹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어떻게 고작 일개 인간 따위가 나의 악몽을...”
“몰라!”
쿵!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아퀼라를 지면에 내리꽂았다.
그것으로 길면서도 짧았던 전투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 * *
“맘에 안 들지만 일단 따라 주기는 할게. 어차피 네가 없으면 바깥으로 나올 수조차 없으니까”
아퀼라는 결국 김주희의 존재를 인정했다. 운디네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서 이 요녀가 둘에게 갈 일은 없으리라.
“후...그래 알았으니까. 그럼 일단 들어가 있어.”
팔찌의 사용을 해제하자 아퀼라는 유세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을 끝으로 이내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김주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었다.
폭력 때문이 아니었다. 기억에 등장한 아버지의 광기에 찬 얼굴.
고개를 거칠게 흔드는 것으로 애써 떨쳐낸 김주희가 재빨리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녀는 둘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선배님! 저 해냈어요! 제법이죠?”
“어, 그래. 제법이더라.”
이강호는 사실 김주희가 악몽 스킬에 당했을 때 실패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면역력이 없는 악몽은 그 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허나, 그녀의 정신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고 마침내 이겨냈다.
이는 큰 발전을 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한번 정신계 마법을 극복한 사람은 다른 정신계 마법에도 보다 더 쉽게 대항 할 수 있기 때문.
난장판이 된 주위를 살핀 유세현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야. 일단은 이곳에서 좀 벗어나자.”
“아, 그러자.”
그들은 이내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보낸 뒤 포탈을 타고 2층으로 내려갔다.
공간이 이동되기 무섭게 주위 마력을 파악한 유세현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렸다.
“이, 이건?”
상당한 수의 인원들이 포탈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생각보다 마력양이 높지 않다는 것.
유세현은 재빨리 이강호에게 현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어떻게 할래? 무슨 의도로 있는지 모르는 이상. 내 생각에는 조금 늦어도 3층으로 돌아갔다가 다른 곳으로 내려오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흠...수준이 대충 얼마나 된다고?”
“대략 E랭크 40~50%정도야.”
“6개월 차인가...김주희 서큐버스 좀 소환해봐.”
“예!”
김주희가 재빨리 서큐버스를 소환했다. 곧 이강호가 탐색을 부탁하자 흔쾌히 수락한 아퀼라가 마력으로 수정구슬 하나를 만들어냈다.
“제 3의 눈.”
영창과 함께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개달린 눈알.
서큐버스는 유세현이 지목한 방향을 향해 눈알을 날려 보냈다. 수정구슬에는 눈알이 발라보는 장소가 선명히 비치고 있었다.
눈앞을 이동시켜 숲에 은폐해있는 인원들을 한차례 쭉 둘러본 이강호가 중얼거렸다.
“좌측에 있는 여자를 향해 좀 더 가까이 가봐.”
“더 접근하면 들킬 가능성이 있는데요?”
“상관없어.”
“...그렇다면...”
좀 더 가까이 이동하자 수정구슬의 시야에 여성 어깨에 박혀있는 조악한 엠블럼이 비쳤다.
날개가 달려있는 신발 마크.
“팀 헤르메스군.”
“팀 헤르메스?”
유세현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에드워드의 때의 일이 자연스레 떠오른 것.
그 사이 이강호는 머릿속으로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포탈을 주시하고 있는 팀 헤르메스 인원. 허나, 주시만 하고 있을 뿐 마땅히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일단은 이동해보자.”
“응? 이동? 괜찮겠어?”
“응. 이게 최선이야.”
만약 그들이 일행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길을 터줄 것이다. 허나, 반대로 노리고 있는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간격을 유지하며 이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후자 쪽이라면 3층으로 몸을 내빼는 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었다.
다른 곳에도 포위망을 형성 해놨을 가능성이 다분할 뿐더러 추격스킬을 가진 놈들을 선두로 뒤 따라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
수정구슬로 이동을 확인한 이강호가 살짝 인상을 구겼다. 이렇게 되면 그들이 노리는 것은 오직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지원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가.’
판단을 내린 이강호가 곧바로 말했다.
“유세현. 김주희. 지금부터 전력 질주로 이곳을 돌파 한다.”
< 접촉(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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