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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92화 (92/612)
  • < 접촉(1) >

    천막의 내부.

    팀 헤르메스의 게릭 잭슨은 제이미가 수거해온 시체 3구를 바라봤다.

    물에 퉁퉁 불어 쥐파먹듯 듬성듬성 구멍이 나있는 육신.

    식인 물고기들에게 파먹힌 그들은 이미 사람이라 부를 만한 제대로 된 형태조차 갖추고 있지 못했다.

    나름 볼 것 못 볼 것 다 봤다 자부하던 게릭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심하다. 무척이나 심하다.

    이 정도라면 사실상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

    그저 3명이 동시에 발견되었다는 것에 근거하여, 그들이 실종된 세 명이 맞을 것이라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게릭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제이미를 향해 말했다.

    “핏빛강에서 찾은 건가?”

    “예. 발에 돌을 묶인 채 물 아래에 가라 앉아 있었어요. 만약 주위에서 전투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찾지 못했을 거예요.”

    “...역시 주도면밀하군.”

    단순히 땅에 묻거나 훼손하여 이곳저곳에 퍼트릴 수도 있었을 터인데.

    이는 분명 로널드와 비슷한 탐지스킬을 가지고 있을 자를 고려하여 취한 행동이리라.

    1개월 차답지 않은 치밀함.

    허나, 게릭을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이뿐 만이 아니었다.

    ‘핏빛강에서 전투가 이루어졌다고?’

    확실히 핏빛강은 아이언연합으로 가는 근처에 위치한다. 허나, 가는 길목이 전부 풀숲으로 이뤄진데다가 그렇게 가까운 편도 아니기에, 의도적으로 방향을 꺾지 않는 한 도달하기 어렵다.

    즉 이 뜻은.

    ‘설마 추격을 깨닫고 일부러 유인했다는 건가?’

    고심하는 게릭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갔다.

    본래라면 섬의 지리도 모를 1개월 차 새내기가 그런 방법을 고안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사실상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칑탄으로 추정되는 시체를 지긋이 보고 있던 제이미가 부득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이 사건을 일으킨 범인 어쩌실 건가요? 당연히 처리하실 거죠?”

    팀원을 살해한 자는 반드시 찾아 멸한다.

    이것이 표면상 드러나 있는 팀 헤르메스 규칙.

    허나, 이것은 이례적인 일인 데다가 처음 생각해둔 게 있던 만큼, 게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우선은 보류한다.”

    “...왜, 왜죠? 이런 경우가 생겼을 때는 여지없이 추격대를 꾸려 처리하는 게...”

    제이미가 흥분하여 소리쳤다.

    게릭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추적대를 꾸려 잡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

    그들은 이미 주둔지의 보호를 받고 있다. 또한 이 시체는 마땅히 증거라고 할 수도 없기에 딱히 몰아갈 방도도 없다.

    그녀도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야 제이미 머리 좀 식혀라. 너 설마 지금 네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이 진심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지만 팀원이 살해당했는데...”

    “그래? 그럼 지금부터라 다짜고짜 주둔지에 쳐들어가 가서 난동이라도 피울 생각이냐? 팀 아돌프와 팀 솔져가 참 좋아하겠군. 그리고 너 말이야 범인이 누군지는 알아?”

    “...아.”

    제이미의 눈이 살짝 파르르 떨렸다. 그러고 보니 수색 명령만 수행했지 이사건의 전말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범인이 누구죠?”

    “누구긴 누구야? 괴물 같은 놈들이지.”

    거짓말은 결코 아니었다.

    1개월 차가 1년차 스텟을 지닌 생존자를 죽인순간부터 이미 말이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허나, 이것을 일일이 설명해 납득시키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릴뿐더러 믿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게릭은 그냥 이쯤에서 말을 끝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야, 그리고 잘 생각해봐라. 칑탄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까지 당했어. 네가 나선다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내가 부를 때가지 잠자코 기다려.”

    “...후...”

    심경을 들어내듯 제이미에게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허나 그것도 잠시. 제이미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알겠어요.”

    “그래, 이만 돌아가 봐라. 수고 많았다. 아! 시체는 그냥 알아서 처리하고.”

    “예...”

    제이미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시체를 수거해 천막을 빠져나갔다.

    게릭은 대기하고 있던 이한철을 곧장 불러 세운 뒤 의자에 앉기 무섭게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확인해봤나?”

    그에게는 에드워드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의 접촉을 대비해 100여명의 새내기들을 붙여 아이언연합으로의 잠입을 명한 바가 있었다.

    애초부터 아이언연합은 절차에 굉장히 관대하기 때문에 게릭처럼 팀의 중추멤버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면 쉽사리 통과가 가능했다.

    지금 이한철은 이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이한철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천막을 살펴봤는데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럼 사냥을 나갔다는 말이네?”

    “예. 그렇습니다. 확인해보니까 주둔지를 빠져나간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팀이랑?”

    “그것까지는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하긴...”

    게릭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뭔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이 구름섬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아이언 연합이 보안을 그렇게 허술 하게 할리가 없다.

    안 그래도 처리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있는데 이래서야 언제 접촉을 할 수 있을지.

    꽉 막힌 것 같은 가슴을 쓸어내리기 위해 게릭이 물을 마신 순간이었다.

    이한철이 조심히 말을 이었다.

    “다만...”

    “다만 뭐?”

    “걔네들의 성향을 봤을 때 두 명...아니 세 명이서 바깥으로 향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뭐?”

    게릭의 눈이 순간적으로 보름달같이 커졌다. 구름섬 최강자라고 할 수 있는 최고 선배 격 생존자들도 그런 짓을 하지 않기 때문.

    “근거 없이 하는 말은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한 번 말해봐.”

    “예. 알겠습니다. 그게 저번에는 별거 아닌 것 같아서 미처 말을 하지...”

    이한철은 이전 이야기를 늘어놓을 적 빼먹고 말하지 않았던 사실 하나를 덧붙여 서술했다.

    그것은 그들이 튜토리얼 동안 줄곧 3명이서 다녔을 것이라는 것.

    “...미로에서 조우했을 때도 그들은 3명 이었습니다.”

    “......”

    게릭의 턱이 살짝 벌어졌다. 죽고 싶어 미치지 않고서야 3명이서 구름섬을 싸돌아다니다니.

    허나.

    ‘만약 사실이라면 이건 기회다.’

    게릭은 눈을 번뜩 빛냈다.

    사냥을 마친 이들이 주둔지로 돌아 올 때 접촉할 수만 있다면, 의외로 사건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탓이다.

    대화를 하여 풀던, 아니면 죽여 없애던.

    새내기의 말이라지만 투자해 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석판을 다 사용해 막연하게 놀고 있는 잉여 병력들이 제법 있었음으로.

    “좋아, 잘 알아들었다. 연합까지 갔다 온 것 수고 많았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한철이 크게 외치자 게릭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1개월 차 중에서 강할 뿐더러 말도 잘 듣고 제법 상관의 기분을 맞출 줄 안다.

    이럴 때는 상을 줘서 더욱 인심을 휘어잡는 것이 인지상정.

    “너 스텟 %가 정확히 얼마나 된다고 했지?”

    “이제 약 33%입니다!”

    “호오. 그 정도였어? 아슬아슬하게 2층도 갈 수 있겠군.”

    게릭은 상황표를 살폈다. 그리고는 별것 아닌 양 툭 말했다.

    “내일 2층 연계 던전으로 출발하는 명단에 네 이름을 넣어놓으마. 제대로 전투는 못하겠지만 가서 2층이 어떤지 좀 맛보고 와라.”

    “...?!”

    이한철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화등잔만하게 변했다.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 게릭을 향해 고개를 90°로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이제 들어가 봐. 갈 때 제이미 좀 다시 불러주고.”

    “예!”

    확실히 게릭의 눈에 들었다고 판단한 이한철은 기쁜 듯 천막을 나섰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제이미가 쏜살같이 내부로 뛰어 들어왔다.

    게릭의 갑자기 다시 자신을 찾을 이유는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제이미 500명을 붙여 줄 테니까. 내가 일러주는 곳을 네가 직접 총괄해 감시해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지?”

    “예, 물론이죠.”

    “이유는 안 들어도 상관없나?”

    “예.”

    제이미가 다 알고 있다는 듯 답하자, 실소를 내뱉은 게릭이 말을 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됐다. 아무튼 네가 감시해줬으면 하는 포인트는...”

    게릭은 엉성하게 만들어진 지도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주둔지에서 그나마 가까운 곳에 위치해, 구름섬의 2층 3층을 오르내릴 수 있는 포탈이 구비되어 있는 장소였다.

    좌표를 확인한 제이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누가 지나가는 것을 감시하면 되죠?”

    “10명 이하의 생존자들.”

    “...예? 10명 이하요? 그게 무슨...”

    순간적으로 말뜻을 파악하지 못한 제이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구름섬에서는 아무리 못해도 최소 100명 이상의 인원이 몰려다니는 것이 정설이기 때문.

    허나.

    ‘쓸데없는 말을 할 사람은 결코 아닌데...’

    제이미는 결국 추가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게릭이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10일 이내에 발견 못하면 철수해라. 다른 방법을 모색할 거니깐. 고블린이랑 코볼트들은 조심하고.”

    “예. 알겠어요. 조건에 맞는 생존자들을 발견하는 즉시 보고 올릴게요.”

    “그래, 미행 붙이는 거 잊지 말고. 웬만해선 접촉하지도 마.”

    “당연하죠.”

    “좋아, 그럼 작전권 써줄 테니깐 바로 출발해.”

    “예.”

    이윽고 제이미가 모습을 감추자 게릭은 잠시 침침해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저것 생각할게 많으니 머릿속이 복잡하다.

    당장에만 해도 판도라로 향하는 게이트를 뚫기 위한 회의가 있을 예정이었다.

    그렇게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게릭 잭슨님 회의 시간까지 20분 남았습니다.”

    “쒯 더 뻑!”

    천막 내부에 게릭의 욕이 잔잔히 울려 퍼졌다.

    * * *

    몽환의 성을 클리어 한 일행은 곧장 주둔지로의 귀환을 택했다.

    고블린들을 처리하며 얻은 석판이 제법 남아있었지만, 조금 뒤면 7개월 차 쟁탈전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시간 단축을 위한 효율적인 움직임.

    노을이 지는 것을 확인한 일행들은 발걸음을 멈췄다.

    본래라면 조금 더 이동했었겠지만 해둬야 하는 일이 있던 탓.

    미리 만들어놓은 흙 두꺼비 육포로 끼니를 대충 때운 김주희가 심호흡을 하며 은팔찌를 사용했다. 그러자 팔찌에서 발산된 새까만 연기가 순식간에 주위를 감쌌다.

    “후후...”

    그 속에서 들려오는 농염한 웃음소리.

    보랏빛의 긴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녀는 여전히 여자들의 시기를 불러올 만큼 섹시하고 고혹적이면서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나를 소환한 자가 누구...”

    운디네 때와 같이 아퀼라가 소환자를 찾으려던 찰나였다.

    유세현을 바라본 그녀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불현듯 떠오르는 몽환의 성 때의 기억.

    아퀼라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가 한쪽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서큐버스 아퀼라 라즈베리 존재의 근원인 마왕님을 뵙습니다.”

    “......”

    정말 설마 설마 했었던 반응이었다.

    살짝 당황한 유세현이 슬쩍 이강호를 바라봤다.

    어떻게 된 것이냐 묻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강호는 이에 답할 수 없었다.

    그 또한 이런 경우는 처음 본 탓이었다.

    본래 봉인된 생명체들은 좋으나 싫으나 일단 소환자를 최우선으로 인식하기 마련이다.

    헌데, 그런 법칙이 깨져버리다니.

    ‘설마, 원본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아무쪼록 이 앞으로는 미지의 영역.

    유세현이 차분히 입을 열어 답했다.

    “나는 마왕이 아니야.”

    그러자 아퀼라가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확실히 다른 외관.

    허나, 그 느낌은 분명 마왕 그 자체였다.

    성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시험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퀼라는 다시 머리를 숙이고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그녀는 마왕의 분이 풀릴 때까지 이대로 있을 생각이었다.

    허나.

    “야, 너 이름이 아퀼라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다시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라 아퀼라.”

    “예.”

    “나는 우선 진짜로 마왕이 아니야. 그리고 지금 네가 지금 취하고 있어야 되는 행동은 나한테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것이 아니지.”

    “...예?”

    아퀼라의 큰 눈동자를 깜박였다. 그녀는 유세현의 하는 말의 의미를 아직까지도 명확히 파악되지 않았다.

    유세현이 툭 말했다.

    “너 지금 누가 널 불러냈는지는 알고 있냐?”

    “그, 그야 마왕님...”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아퀼라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유세현과의 마력이 연결 되어 있지 않다.

    현재 이어져 있는 것은...

    “여자?”

    “그래, 나다! 내가 네 주인이야!”

    김주희가 가슴을 당당히 피며 답했다. 아퀼라가 혀를 찼다.

    “감히 너 따위가 나의 주인이라 일컫다니. 가소롭구나. 마왕님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아무것도 못했을 계집이...”

    “뭐? 이런 미친...아니, 싸가지를 봤나! 결국 힘으로 굴복 시켜야 인정 하겠다는 거지?”

    두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김주희가 황급히 언어를 곱게 순화하며 창대를 치켜세웠다.

    그러자 아퀼라가 유세현을 향해 공손히 말했다.

    “마왕이시어 제가 이 여자를 상대해도 되겠습니까?”

    “......”

    꽉 막힌 벽창호 혹은 옹고집.

    마왕 루시뷀트와의 시야가 공유되어있는 만큼, 오해는 미리 풀고 들어가려 했던 유세현은 아퀼라의 아집에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쩌면 착각하고 있는 편이 운디네처럼 들러붙지 않아 더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호호호...마왕님의 허락이 떨어지셨다. 각오는 되었겠지?”

    “뭐? 각오? 넌 오늘 죽었어!”

    이윽고 김주희와 아퀼라가 격돌했다.

    < 접촉(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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