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86화 (86/612)
  • < 쟁탈전(3) >

    굳건하던 대지가 맹렬히 요동치고 모래폭풍이 휘날린다.

    발산된 천마의 무공은 앞을 가로막는 적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모든 것을 먹어치워 나갔다.

    퍼펑!

    터나가는 사지와 쥐어짜듯 뿜어져 나오는 혈류.

    아비규환이 일어날 새는 없었다.

    적들은 그야말로 일순간,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단번에 으스러졌으니까.

    이것은 그나마 축복받은 죽음.

    “키아아악!”

    재수 없게 범위에서 살짝 벗어나 있던 적들은 이어지는 후폭풍에 몸이 찢겨져나가는 고통을 그대로 맛보아야만 했다.

    스스스.

    그렇게 한차례 빛이 수그러든 후였다.

    공허한 바람이 유세현의 머리칼을 스쳐지나갔다.

    굳건히 서있는 그의 앞으로는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확일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터지고 짓이겨져, 더 이상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된 육신의 파편조각 뿐.

    함성과 비명이 서로 얽히고설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 전장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고요히 가라앉았다.

    지금 이 순간, 두 종족의 시선은 너나할 것 없이 유세현을 향해 집중 되어있었다.

    현재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오직 하나.

    괴물.

    무수한 군세에 막혀 카르차만에게 장법이 닿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유세현이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외쳤다.

    “이강호!”

    파바밧!

    그 순간 도움닫기를 한 이강호의 신형이 유세현의 옆을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지면에 최대한 낮게 밀착하여 공기저항을 줄인 그의 육체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코인을 흡수해가며 일자로 쭉 달려 나간다.

    저 멀리서 휘둥그런 눈이 되어있는 거구의 고블린 카르차만을 향해!

    “키, 키릭! 이, 인간을 죽여라!”

    “카르차만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넋이 반쯤 나가있던 고블린들은 뒤늦게나마 깨닫고 외쳤다.

    허나, 이강호는 이미 카르차만에게 거의 근접한 상황.

    이강호는 곧장 미늘창에 내재되어있는 스킬, 발화를 사용함과 동시에 카르차만의 목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생전 처음 보는 대규모 광역 스킬에 잠시 넋이 나가있던 카르차만이 깜짝 놀라 양날도끼를 치켜세워 방어했다.

    그간 인간을 학살하며 착실히 올려둔 스텟 덕에 간신히 반응이 된 것!

    이강호가 살짝 혀를 찼다.

    아주 조금만 빨랐더라면 단숨에 목을 벨 수 있었을 터인데.

    챙!

    이윽고 카르차만이 이강호의 창을 튕겨냈다.

    참격을 방어한 그의 두 눈은 어느새 학살자의 눈으로 돌아와 있었다.

    “키아아! 인간 따위가!”

    이윽고 함성을 내뱉은 카르차만의 난도질이 시작되었다.

    그는 우월한 스텟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힘을 이용해 이강호를 압박해 들어갔다.

    단 한 번의 공수로 자신의 스텟이 훨씬 우위라는 것을 단번에 깨달은 것.

    용기 있게 쳐들어 온 것이 제법 가상하지만, 그럼에도 카르차만은 그 어느 때처럼 승패가 나는데 채 1분이 안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허나.

    슈우욱!

    카르차만이 휘두른 양날도끼가 애꿎은 허공만을 계속 가른다.

    이강호는 물 흐르듯 유연한 움직임으로 공격을 흘리거나 회피하고 있었다.

    서걱!

    덕분에 베여나가는 것이라고는 타이밍 안 좋게 끼어든 아군 고블린 뿐.

    “키륵...왜...나를...”

    동료를 벤 카르차만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이강호의 입꼬리가 순간적으로 씨익 올라갔다.

    지능이 올라갔다는 것은 무수히 많은 장점을 동반하지만, 이렇게 단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이전까지는 동료의 시체를 무심히 밟고 넘어가던 그들이 감정에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합!”

    이강호는 당황한 카르차만의 빈틈을 쇄도해 들어갔다.

    상단 찌르기에서 이어지는 회전 베기.

    공수가 변화하자 카르차만은 필사적으로 방어에 집중해야 됐다.

    신체 모든 것을 활용하는 이강호의 연계공격은 그만큼 매섭고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자칫 집중을 흐트러트린다면 목이 일격에 날아갈 수 있을 정도.

    아무리 불길이 거슬린다지만, 스텟의 차가 있다는 것을 감안 했을 때 그야말로 안 되는 상황이었다.

    카르차만의 광폭한 두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스킬을 지니고 있는 인간에, 이제는 스텟의 우위를 뛰어넘는 실력을 지닌 인간까지.

    “캬아아아! 포위병력을 제외한 나머지는 계속 인간 추격에 나서라!! 이놈의 처리는 나 혼자 하겠다!”

    이강호를 인정한 카르차만은 마음을 바꿨다.

    장기전을 위한 체력 및 마력 분배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전력을 다해 눈앞의 적을 죽이기로.

    지금 미리 처리 해두지 않으면 추후 그들에 의해 형세가 기울 수가 있다.

    ‘마수화.’

    입을 악문 카르차만이 마음속으로 읊조리자 안 그래도 거대한 그의 육체가 단숨에 부풀어 올랐다. 들어가 있던 주둥이가 쭉 튀어나오고 점점 개의 형태로 탈바꿈 된다.

    이전 김주환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스킬!

    허나, 카르차만의 스킬 사용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화염저항강화.’

    그의 몸이 붉게 물들었다.

    미늘창에서 발산되는 열기는 이제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

    순식간에 변신을 끝낸 카르차만의 입에서 흉성이 터져 나왔다.

    “크큭큭큭. 그딴 불길은 이제 미지근하지도 않다! 각오해라! 인간!”

    바뀌어 버린 관절 구조 때문에 양날도끼를 버린 카르차만은 발톱을 치켜세우고 이강호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마수화에 의해 내구력 스텟이 올라간 덕에 웬만한 힘으로는 타격을 주기 힘들뿐더러, 설사 뚫린다 하더라도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재생능력을 믿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였다.

    ‘지금이군.’

    이강호의 눈이 번뜩 빛났다.

    단 한 번의 완벽한 빈틈.

    그는 이런 빈틈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카르차만이 재생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음에도 일부러 매섭게 압박해 나갔다.

    모든 것을 쏟아 붇게 하기 위해.

    대개 빈틈이란 건 모든 능력을 발휘한 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맹신했을 때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강호는 태양심법을 운용해 만든 화기를 지닌 마력, 염화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고스란히 오른손에 새겨져있는 증표에 있는 대로 쏟아 부었다.

    레전더리와 달리 한계가 명확히 정해져있는 유니크 A랭크 스킬.

    불꽃의 각인.

    허나, 아직은 마력수치가 낮아 그 한계치에 도달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가지고 있는 태양심법과 고유특성은 이 모든 것을 초월시킨다.

    오직 화염 하나만으로 영웅이 된 남자.

    화르륵.

    그의 오른손에서 미늘창의 발화와는 차원이 다른 높은 고열의 불길이 자그만하게 일렁였다.

    힘을 발산하지 않고 있음에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흡사 공간이 일그러진 듯한 느낌.

    미늘창의 열기라고 착각한 카르차만이 외쳤다.

    “크하하하! 그딴 거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니까!”

    다가온 카르차만이 발톱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이강호가 잡고 있던 창을 난데없이 앞으로 툭 던졌다.

    “무, 무슨?”

    카르차만의 눈이 살짝 당황으로 물들었다.

    무기를 버리다니? 전투를 포기한 것이란 말인가.

    스르륵.

    허나, 이어지는 이강호의 행동은 그야말로 기묘했다.

    순간적으로 좌측으로 이동한 그가 허리를 틀어 발톱을 회피하기 무섭게 카르차만의 목을 오른손으로 꽉 움켜쥔 것이다.

    쿠우우웅!

    이내 맹렬한 기세로 불길이 치솟았다.

    “크아아아아악!”

    스킬에 의해 강한 저항력을 지니게 된 피부가 순식간에 타들어가고, 더 나아가 내부 장기를 휩쓴다.

    재생할 틈 없이 산산이 파괴되는 조직세포.

    카르차만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육신의 절반이상이 재가 된 후였다.

    무려 20초도 지나지 않은 찰나에 순간에 발생한 일.

    이강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것을 끝으로 완전히 재가 된 카르차만의 육신은 바람에 휘날려 흩어져 사라졌다.

    “키릭? 무, 무슨...”

    도망치지 못하도록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여타 고블린들의 눈꺼풀이 맹렬히 깜빡였다.

    그들은 아직 이 상황이 잘 이해 되지 않은 모양.

    이윽고 바람에 흩날리던 재가 얼굴에 붙자 고블린들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물들었다.

    떠오르는 샛별.

    모든 스킬을 전부 사용한 카르차만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키, 키릭! 고, 공격해라! 마, 마력이 다 떨어졌을 게 분명하다!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크륵! 모두 달려들어!”

    위기를 느낀 고블린들은 뒤늦게 마나 이강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아직 이강호의 오른손에는 아직도 불길이 제법 남아있는 상태.

    화염을 발산하여 길게 늘어뜨린 이강호가 제자리에서 한 바퀴 회전하자 달려오던 고블린들은 한순간에 숯검댕이로 변하며 절명했다.

    나약한 그들은 카르차만과 달리 그 흔한 비명조차도 내지르지 못했다.

    “키, 키릭...어, 어떻게...”

    “키릭. 말도 안돼...”

    상당한 피해가 나오자 고블린들이 달려오던 주춤 거렸다. 당연할 일이었다.

    지금 달려들면 개죽음 당할 것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

    그렇게 고블린들이 우물쭈물 하는 사이 이강호는 마력의 흐름을 읽어 생존자들의 상황을 살폈다.

    마력의 이동 경로를 확인해보니 카르차만과의 전투를 치루고 있던 잠깐 사이에도 생존자들은 더욱 뒤로 퇴각한 상태였다.

    유세현이 활약해 주었다고는 하나, 카르차만이 살아있는 이상 승기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일행에게 바로 돌아가고 싶지만, 쟁탈전의 승리를 위해서는 사기를 되돌리는 게 중요한 상황.

    이강호는 생존자들이 위치해있는 방향을 향해 화염을 전부 쏟아냈다.

    그러자 뜨거운 열기를 피하기 위해 고블린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파바밧!

    이강호는 곧바로 그 길을 달려 나갔다.

    이윽고 고블린 틈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자, 고블린과 생존자들의 이목이 한순간 집중되었다.

    그는 이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자세를 다잡은 이강호가 창을 높게 치켜 세우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적장을 쓰러트렸다!”

    “......”

    삽시간에 고요해지는 일대.

    카르차만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이강호가 말하고 있는 적장이 누굴 의미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그게 무슨 말...”

    “그 괴물을 죽였다고?

    생존자들 몇몇이 놀란 표정이 되어 한마디씩 말했다. 그러자 고블린들도 길길이 날뛰었다.

    “키, 키릭?”

    “카르차만이?”

    “거, 거짓말이다! 카르차만이 당했을 리가 없다! 죽여라!”

    허나, 고블린들은 그렇게 외치면서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이강호가 나타난 쪽이 카르차만이 위치해 있던 장소라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던 탓.

    그때였다.

    두둥! 두둥!

    이전에도 한번 들어본 적 있는 익숙한 북소리가 난데없이 울려 퍼졌다.

    생존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이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블린들과 6개월간 전투를 해온 그들은 너무도 잘 안다.

    바로 퇴각 명령.

    “키, 키릭? 저, 정말로?”

    “키릭. 말도 안돼!”

    고블린들 또한 들려오는 북소리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퇴, 퇴각하라! 카르차만이 당했다!”

    “지, 진형을 그대로 갖춰서 퇴각해라!”

    후방에 들려오는 패전보와 함께, 사원을 거의 점령했던 고블린들은 유리한 지형 그 상태를 최대한 유지해가며 재빠르게 골짜기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전까지 궁지에 몰렸던 생존자들로서는 그저 어벙하기만 한 상황.

    고작 한명이 죽었다고 모두 도망치다니.

    허나, 이는 사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유세현의 무공과 이강호의 화염으로 인한 병력손실. 그리고 카르차만의 죽음을 눈앞에서 확인한 고블린들의 사기저하로 사실상 형세는 거의 비등비등 해진 상태였으니까.

    계속 싸우면 분명 인간 쪽이 점점 더 우세해진다.

    “이, 이긴 거야?”

    “서, 설마! 사, 사원을 저, 점령하자! 적이 물러난다!”

    “우와와와와!”

    얻어걸린 생존자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고블린들을 추격함고 동시에 사원을 점령해나갔다.

    반면, 이강호는 차분한 눈으로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방향을 살폈다.

    현 고블린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간부급 고블린.

    구름섬의 막 도착해 전투를 치렀을 때도 그렇지만 형세 판단력이 상당히 좋다.

    보통이라면 몰아 붙였던 만큼,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다가 더욱 피해를 입기 마력인데.

    판도라로 떠나게 될 고위 고블린이 저층계의 쟁탈전에 관심이 없는 것을 감안했을 때, 사실상 1순위로 제거해야 되는 인물.

    이강호는 마력의 크기를 읽어보려 했지만 거리가 닿지 않았다. 유세현이라면 손쉽게 해냈을 터인데.

    이것이 재능의 차이.

    ‘탐지스킬이 시급하군.’

    이강호는 이내 생각을 접고 일행이 있는 장소를 향해 이동을 시작했다.

    < 쟁탈전(3)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