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84화 (84/612)
  • < 쟁탈전(1) >

    쟁탈전까지 남은 시간은 약 14시간.

    천막으로 돌아온 그들은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다.

    비축해둔 흙두꺼비의 살을 꺼내 스튜를 끓여먹고, 천 쪼가리로 간이식 샤워실을 간단히 만들어 샤워도 한다.

    샤워의 순서는 이강호, 유세현, 김주희 순으로 이루어졌다.

    운디네는 이강호와 유세현이 샤워할 때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물을 고루 뿌려주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허나, 김주희 때는 조금 달랐다.

    “야...물 제대로 안 뿌리냐?”

    “아~씻어봤자 어차피 거기서 거긴 게. 그냥 대충하면 안 되냐? 볼 것도 없는 게 하는 건 참 많아요.”

    “...이게...”

    김주희의 눈꼬리가 다분히 치켜져 올라갔다. 허나, 운디네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계속 비아냥거릴 뿐이었다.

    전투시를 제외하고는 매번 발생하는 사소한 신경전.

    이강호와 유세현은 이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들은 앞으로의 상황이 대충 예상이 되었다.

    언제나 먼저 시비를 거는 쪽은 운디네였지만, 결과적으로 보자면 언제나 패배를 하는 쪽도 운디네였기 때문이다.

    자그만 한 운디네의 몸을 훑은 김주희가 지긋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남에게 지적을 할 때는 자신을 좀 돌아보고 하시지?”

    “뭐, 뭐가? 내가 어때서.”

    “가슴도 나보다 훨씬 쪼그만 한 게.”

    “...!!”

    운디네의 고운인상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사실 그녀도 김주희에게 밀린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인정하기 싫었을 뿐.

    “샤워, 마저 하기 싫나보지?”

    그래서 운디네는 되도 않는 협박을 했다. 허나, 그런 것이 김주희에게 통할리가 없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운디네가 아닌 그녀였으니까.

    “어쭈? 그거 계약위반인거 몰라? 네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유지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어~”

    “...망할 년.”

    결국 운디네는 다시 얌전히 물 공급 셔틀이 될 수밖에 없었다.

    * * *

    간단히 정비를 끝낸 그들은 내일을 위하여 곧바로 취침에 들었다.

    경계 초번초는 유세현과 김주희.

    아무리 생존자들이 모여 생활하는 주둔지에 들어왔다고 하나, 방심하는 것은 그들의 행동양식이 아니었다.

    둘은 별다른 대화 없이 천막 주위를 살폈다. 그렇게 날이 완전히 저물었을 때였다.

    횃불을 손에 쥔 생존자 한명이 천막근처로 접근해왔다. 김다혜였다.

    경계중이였기에 유세현은 간단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그녀를 맞았다.

    “밤도 늦었는데 여긴 어쩐 일이시죠?”

    “할 말이 있어 왔어. 잠시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김다혜의 시선이 슬쩍 김주희에게로 향했다.

    이야기하는데 시선이 신경 쓰이니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는 의미였지만, 유세현은 당차게 거절했다.

    “경계중입니다. 여기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계?”

    “혹시 모르니까요.”

    “...아. 알았어. 뭐...이곳에서 못 할 이야기는 아니니깐. 세현아 너희 자유팀으로 신청했다며?”

    “예.”

    “그럴게 아니라...”

    그 다음 이어진 김다혜의 말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쟁탈전에 참가하는 팀 라이트의 인원들에게 미리 언질을 해놓을 테니 자유팀을 포기하고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그편이 생존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이유에서였다.

    허나.

    “신경써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왜!”

    “받아야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죠.”

    “...세현아...”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김다혜의 표정은 살짝 울상이 되어있었다. 유세현의 확고한 거절이 새삼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

    “밤이 깊어지고 있으니,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유세현은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알았어...”

    결국 김다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김주희가 이를 신기한 표정이 되어 쳐다봤다.

    그녀는 현재의 상황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세현의 현 성격이 저 여자에게 차여 형성되었다고 치기에는 여자 쪽이 오히려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모습이었기 때문.

    유세현의 강한 스킬과 힘을 보았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김다혜는 아직 그의 힘을 보지 못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처음 봤을 때도 뭔가 이상하게 생각되긴 했는데, 이것은 추리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섰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도달 할 수 없는 해답.

    ‘말해 주시려나...’

    프라이버시 침해였기 때문에 괜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앞섰지만, 김주희는 결국 물어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본인 스스로가 말하기 싫다면 유세현 성격에 알아서 자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기회는 왔을 때 잡는 법.

    “저...선배님.”

    “왜?”

    “저...김다혜씨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전 여자친구.”

    김주희가 말을 미처 끝내지 않았음에도, 유세현의 입에서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진짜 별것도 아니라는 뜻이 된다.

    김주희가 반쯤 안도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조금 이해가 안되는 게 있어서 그런데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혹시 선배님이 차신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거야...”

    여자반응을 보며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김주희는 차마 그렇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유세현의 쓴웃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김주희의 입이 꾹 다물어지는 것을 확인한 유세현이 별 대수롭지 않은 듯 툭 말을 내뱉었다.

    “내가 차였어. 멋지게.”

    “......”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묵을 깬 것은 김주희였다.

    “바보 같은 여자네요.”

    진심을 담아 하는 말이었다.

    김주희는 여태까지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돈 때문에 남자를 이용해 먹으려고 했었던 만큼, 남자 쪽도 그녀의 얼굴과 몸매만 봐왔었으니까.

    반면, 유세현은 달랐을 것이다.

    김다혜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한없이 진지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여파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게 된 것일 테고.

    두근두근.

    이상하게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기뻤다. 그가 이렇게 말을 해준 것이.

    분명 맨 처음 만났을 때라면 별 대수롭지 않는 이야기일지언정 결단코 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강호 이외에는 그 누구와도 사적인 대화를 섞지 않았으니까.

    이는 아주 미세하게나마 그의 마음속에 들어갔다는, 아니 인정받았다는 증거.

    김주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떤 일이 생겨 둘이 헤어졌는가는 그녀에게 있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김주희 교대시간 됐다. 들어가 봐.”

    “예! 선배!”

    “...목소리 좀 줄여라.”

    “...죄송합니다.”

    김주희는 고개를 푹 숙여 반성하는 자세를 취했다.

    허나, 천막으로 이동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반대로 은은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 * *

    6개월 차 생존자들이 모인 공유지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번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을 것인가.

    “모두 지급받은 띠를 오른팔에 둘러 주시기 바랍니다.”

    유세현 일행은 팀 아레스의 담당자가 지급해준 붉은색 피아식별 띠를 착용했다.

    쟁탈전을 같이 진행할 요새의 인원과 차별화를 두기 위해 그들이 특수 제작한 것이었다.

    “지금부터 붉은 골짜기로 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윽고 몇몇 선배 격 생존자를 대동한 팀 아레스가 선봉을 섰다. 팀 라이트는 후미를 맡았다.

    그들은 경계를 삼엄히 하며 이동했다.

    꼭 전투가 쟁탈전에서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디서 적이 기습할지 모른다.

    때문에 미리 언질을 들은 유세현은 마력 탐지에 특히나 더 신경을 썼다.

    마침내 격전이 벌어질 장소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높디높은 능선 위로 한발 앞서 도착해 있던 요새 인원들이 두 눈에 비쳤다.

    꿈틀거리는 모습이 마치 개미군단을 자아낸 듯한 느낌.

    물량으로만 따지자면 주둔지 인원의 약 5배에 달하는 무지막지한 인원이었다.

    유세현은 차분히 그들의 마력양을 살폈다.

    6개월 차로 추정되는 정상적인 마력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섞여있었다.

    요새의 규칙에 의해 강제적으로 차출 된 새내기들!

    “많이 죽어나가겠군.”

    파악을 끝낸 이강호가 한마디 내뱉었다.

    이제, 쟁탈전까지 남은 시간은 약 1시간이었다.

    유세현의 두 눈이 요동치는 마력의 흐름을 따라 반대편 능선을 살폈다.

    그곳에도 개미떼 같은 군단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지만, 큰 차이가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점.

    “캬아아아악!”

    사기 제압을 위한 고블린들의 힘찬 포효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그러자 생존자들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우와아아아아!”

    큰 골짜기를 두고 마주하고 있는 두 군세.

    “지금부터 우리 팀 라이트는...”

    이윽고 여러 팀들이 각자 짜놓은 계획에 따라 흩어지기 시작하자, 자유 팀에 속하는 유세현 일행도 수풀 속으로 몸을 숨긴 뒤 이동을 개시했다.

    스륵 스륵.

    그런 그들의 뒤를 여러 팀이 따랐다.

    마력을 읽어보니 전부 새내기들이었다.

    강제 차출된 만큼, 그들은 그나마 안전한 외각 지역의 토벌을 맡은 것이다.

    고블린 쪽에서도 새내기들을 차출해 왔을 테니까.

    수백의 새내기들은 넓게 퍼진 진형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나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와아아아아아!”

    “캬아아아아악!”

    쟁탈전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함성이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풀숲 사이로 터져 나오는 괴랄한 음성.

    “키릭! 인간이다! 공격해라!”

    “죽여라! 이전에 받은 수모를 되갚아라!”

    이에 생존자들도 지지 않고 외쳤다.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모두 B-1포메이션으로!”

    “예!”

    그렇게 두 진형으로의 길이 이어지는 능선의 뒤편으로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되었다.

    “흐아압! 죽어라!”

    “키릭! 인간 따위가!”

    챙!챙!

    병장기가 맞부딪치며 스파크가 튀고, 파열음이 공간을 메운다.

    힘을 합쳐 맹공을 퍼붓는 새내기들.

    그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고군분투했지만 그 결과는 별로 좋지 못했다.

    E 랭크 40% 가량의 마력을 지닌 고블린들이 새내기 고블린들의 사이에 간간히 껴있었기 때문이다.

    “크악.”

    “무, 무슨...”

    5개월 차 고블린들에게 걸린 새내기들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처럼 쓸려 내려갔다. 만약 이대로 전투가 계속 지속된다면, 이 주위에 위치해 있는 생존자들은 전멸을 면치 못한다.

    “으으...씨발 헤르메스새끼들!! 새내기들 밖에 없을 거라더니! 분명 섞여 있을 것 같다고 내가 그렇게 말을 했는데!”

    분에 못이긴 생존자 한명이 소리쳤지만, 그는 그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서걱.

    섬광처럼 날아온 예리한 시미터가 일격에 목을 날려버렸기 때문.

    고블린은 조소를 흘리며, 자신이 죽인 생존자의 코인을 곧바로 흡수했다. 이윽고 코인의 흡수를 마친 고블린이 재차 시미터를 치켜들며 포효했다.

    “키히히. 전부 죽여라아아!”

    “캬하하!”

    스텟의 차는 곧 힘의 차.

    선배 고블린 덕에 기세가 치솟은 새내기 고블린들은 더욱 신이나 생존자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비등비등해야 될 전선이 고작 몇 십 마리의 고블린들에게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또한 선배 생존자가 있었다면 대응이 가능했을 터인데.

    “미, 미친...”

    “모, 못 이겨. 너무 강해. 전부 물러나!”

    결국 생존자들은 전투를 포기하고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뒤쫓기던 몇몇은 어찌나 급한지 쟁탈전이 이루어지는 지역 범위 밖으로의 도주까지 시도했다.

    그러나.

    [전투가 개시 된지 30분이 경과되기 전까지는 지역에서 이탈이 불가능 합니다. 남은 시간 25:03초]

    쟁탈전의 법칙은 그들에게 이탈을 허락하지 않는다.

    “미, 미친!”

    “크크. 죽어라 인간!”

    선배 격 고블린이 벼랑 끝에 몰린 남성을 향해 무기를 내려치려는 찰나였다.

    슈우욱!

    순간적으로 휘몰아친 싸늘한 광풍과 함께 칠흑의 검이 고블린의 목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너무도 은밀하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인지라 상당한 스텟을 지닌 고블린도 미처 반응하지 못한 상황.

    “키릭? 무슨...”

    서걱.

    결국 십여 명의 새내기를 학살한 고블린은 말도 채 끝내지 못하고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고블린들이 깜짝 놀란 눈이 되어 유세현을 쳐다봤다.

    그 강한 선배 고블린이 대응해보지도 못하고 단 일격에 당하다니?

    허나, 이는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스륵!

    별안간 풀숲에서 튀어나온 김주희가 창을 크게 휘둘렀다.

    공격 범위 안에 있던 새내기 고블린 들의 몸이 순식간에 반으로 잘리며 떨어졌다.

    멍한 눈을 보니,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직 이해가 잘 안 되는 모양.

    “저, 적을 죽여...”

    팀장급으로 보이는 고블린들이 막 명령을 내리려던 찰나였다.

    나무위에서 내려온 이강호의 창이 주위를 순식간에 휩쓸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남은 것이라고는 죽은 고블린의 잔해 뿐.

    “다, 당신들은? 누구?”

    두려움의 떨던 생존자 한 명이 조심히 물었지만, 셋은 그저 말없이 이동을 개시했다.

    코인과 공적치가 되어줄 다음 적을 향해!

    < 쟁탈전(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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