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둔지(2) >
임시 숙소만 대충 알려주고 헤어지던 이강호가 알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전례였다.
유세현은 최대한 넓게 주위를 둘러보며 길을 익히기 위해 힘썼다.
아이템이나 식량 등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상업지구와 쟁탈전의 정보를 공유하는 공유지구.
그 이외의 지구는 전부 생활 주거지나 내부 경계초소였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해봐야 2년에 불과했으니까.
주둔지의 중심부에 들어선 김다혜가 정면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단층으로 만들어져 있던 지금까지의 건물과 달리 도합 5층의 높이 가량이 되는 커다란 건물 두개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유세현의 얼굴을 슬그머니 흘긴 김다혜가 말했다.
“저기, 왼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내가’ 있는 팀 라이트.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게 팀 아레스의 건물이야. 신원패도 여기서 발급해 주니깐 내일 내가 있는 쪽으로 찾으러 오면 돼.”
“예. 알겠습니다.”
“...세현아 말 놔도 된다니깐...”
“아뇨.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권유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유세현이 단호하게 자르자 여태까지 애써 밝은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오던 김다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찌나 티가 심하게 나는지 유심히 지켜보던 이강호와 김주희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알았어. 그럼 이제 대충 다 둘러봤으니깐 임시 거처로 안내해줄게...”
그들은 곧 외각에 있는 임시 주거 천막으로 향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천막은 하나였다.
어차피 그간 계속 같이 지내왔을 것이 분명하기에 굳이 남녀 차별을 두지 않은 것이다.
김다혜는 일행에게 임시 패를 넘겼다.
안내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한 그들이 천막내부로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김다혜가 유세현의 소매를 붙잡았다.
“세현아 잠깐 나 좀 보자...이번엔 업무가 아닌 개인적으로.”
“......”
진즉 헤어진 마당에 그냥 개인 업무만 보고가면 될 것이 뭐 굳이 사적으로 보려한단 말인가.
유세현은 마땅치 못했던 만큼 잠시 고민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현재 김다혜는 팀 라이트의 일원. 이 주둔지가 아무리 평등하다고 하나, 비리가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거절해서 굳이 밉보일 필요는 없는 것.
유세현은 슬쩍 이강호를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갔다 오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다.
“그럼 갔다 온다. 강호야.”
“그래.”
이윽고 두 사람이 상업지구 저편으로 걸어 나갔다.
둘의 모습이 건물 틈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김주희가 이강호를 향해 물었다.
“선배님! 저 여자 세현 선배의 여자친구 맞죠??”
“정확히는 전 여자친구지.”
“와...진짜요?”
김주희의 두 눈이 화들짝 커졌다. 정말로 의외의 정보였기 때문이다. 여자를 망부석처럼 보는, 아니 더 나아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에게 여자친구라는 생명체가 존재했었다니.
이강호가 볼을 긁적였다.
그는 유세현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동시에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하게 배신당했는지도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강렬한지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현대의 삶이 잘 떠오르지 않게 된 지금에 와서도 까먹지 않고 가지고 있는 기억중의 하나.
뭐니 뭐니 해도 김다혜라는 여자는 그의 일가족이 사고로 죽었을 때 멋지게 이별통보를 날린 대단한 여자였으니까 기억이 안 나는 게 이상한 것이다.
유세현이 지독한 불신증을 갖게 된 주원인.
이강호는 그물침대에 몸을 던졌다. 본래라면 바로 장물을 내놓기 위해 이동하려 했지만, 장물은 그의 포켓 안에 들어있다. 일단은 유세현이 용무를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이다.
김주희가 재차 조심스레 물어왔다.
“선배님. 그런데 세현 선배님 분위기 보니깐 심상치가 않아 보이 던데...”
“일이 있었지. 궁금하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라.”
“옙.”
이런 것은 타인의 입에 거론되어서 좋을 것이 전혀 없기에 이강호는 단칼에 잘랐다.
김주희 또한 이를 눈치 채고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김주희는 김다혜를 떠올렸다. 살짝 청초한 얼굴을 한, 몸매는 생각보다 그저 그런 여자.
그런 평범한 여자를 유세현이 좋아했었다니.
즉, 이 말은 유세현도 이전에는 평범한 남자였다는 뜻이 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녀는 궁금했다.
도대체 유세현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리도 사람을 믿지 못 하게 되었는지.
‘만약, 물어보면 대답 해줄까...’
김주희도 이강호를 따라 그물침대에 몸을 눕혔다.
막연하게 드는 생각과 달리, 피로에 찌든 눈은 사르륵 감기고 있었다.
* * *
상업지구를 배회하는 두 사람의 사이에는 오랜 침묵이 맴돌았다.
유세현이야 어차피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고, 김다혜는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윽고, 침묵을 깬 김다혜가 어색하게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네. 2년 만이지?”
“응. 2년 만이지.”
“어때 여기서의 생활은?”
지독하게 정석적이면서도 표면적인 생활 이야기.
유세현은 이 모든 것에 적당히 답했다.
“그럼...스텟은? 어느 정도인데? 40%는 넘어??”
“...그런 것도 전부 보고해야 돼?”
“아...아니, 그런 건 아니고...미안해.”
“아니야, 뭘 그런 거 가지고 물어볼 수도 있지.”
“아니...그런 게 아니고...그때의 일.”
김다혜의 말에 유세현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는 정말 미안해.”
“......”
너무도 뜬금없는 사과.
그녀의 심성이 그리 나쁘지 않은 것을 알고 있던 유세현은 김다혜의 말을 이해했다. 분명 힘든 시기에 갑자기 이별통보를 하고 미국으로 떠난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허나.
“아냐. 다 잊었어.”
모든 것을 잃었던 그 당시, 유세현에게는 그녀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허나, 그녀는 울부짖던 유세현을 뒤로했다. 그렇게 유세현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사람이란 생물은 본디 객관적으로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에 와서는 그저 변명에 불과한 말.
이제는 의미도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유세현은 건성건성 대답하다가 대화를 마칠 생각이었다.
김다혜가 중얼거렸다.
“그, 그게...그때는 떠나야 되는 이유가 있었어...”
“이해해.”
“...무슨 이유인지 알고 하는 말이야?”
“아니, 너는 그런 애였으니까. 안 그러면 갑자기 떠날 이유가 없잖아.”
별로 냉소적이지 않은 합리적인 답변임에도 김다혜는 차가움을 느꼈다. 예전에는 결코 이러지 않았는데.
김다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고민의 빠진 여자의 모습이었다.
이윽고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든 김다혜가 차분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때 나 백혈병이였어.”
“...백혈병?”
“응.”
살면서 한번쯤은 누구라도 들어봤을 만한 병명.
골수 속에 종양세포가 침식하는 이 병은 과거 높은 치사율을 지녔다고 한다.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 와서는 치료가 가능해 졌다고 하나 사실상 완치는 거의 불가능한 불치병.
“...그럼 헤어지자고 했던 이유가...”
“민폐 끼치기 싫었어. 언제 한국으로 돌아올지도 몰랐고.”
“......”
유세현의 입이 굳게 닫혔다. 배신감, 분노, 그런류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그저 어이가 없을 뿐.
고작, 걱정 끼치기 싫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대화도 하지 않고 그렇게 냉철하게 연락을 끊어버리다니.
만약 제대로 대화를 나눴더라면 가족을 잃었던 유세현은 그녀를 따라 미국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 보필했을 것이다.
그녀가 나을 때까지.
홀로 남겨진 유세현은 사망보험금을 받아 제법 물적 여유가 있는 편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취한 행동은 걱정이라는 말로 포장된 이기적인 행동에 불과했다.
만약 그녀가 유세현을 진심으로 생각했더라면 입장이 아닌 심정을 헤아렸어야만했다.
유세현은 김다혜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는 연민도 증오도 그 무엇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래서 병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건 정말 신기하더라고...”
“나았구나.”
“응.”
“잘됐네. 축하해.”
유세현의 말에 김다혜가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을 검지로 꾹 눌렀다.
“이런 곳에 끌려온 마당에 이게 축하해야 될 일인지는 모르겠네...아 맞아. 세현아 난 1년차야.”
“음...그렇구나.”
마력량으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지만 모른척했다.
그는 그저 이 대화를 빨리 끝내고 천막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생존자를 응시하던 김다혜가 말을 계속 이었다.
“그...세현아.”
“응?”
“너희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말이 자유롭지 이곳에서의 생활은 요새보다 훨씬 힘들거든. 타종족의 위협도 많고. 식량도 구하려면 멀리가야 되고. 혹시...괜찮으면...”
김다혜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녀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유세현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간단히 답했다.
“어떻게 하긴 강해져야지.”
그러자 김다혜의 두 눈이 화들짝 커졌다.
생각보다도 격한 반응.
그녀가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뭐? 설마 하루 뒤에 있을 쟁탈전에 바로 참가하려고? 6개월차 쟁탈전은 그 이전거와는 수준이 달라! 달랑 3명이서는 너무 무모해! 너도 지금까지 겪어봐서 알잖아?”
“......”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였다.
6개월 차끼리의 쟁탈전은 과연 어떤 석판을 줄 것인가.
유세현은 대화를 강제적으로 끝내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이유가 있었다지만 어차피 자신과 그녀는 끝난 사이.
아무리 그녀가 팀 라이트의 일원이라지만 필요이상으로 간섭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혜야.”
“응?”
“판단은 우리 팀의 몫이야. 그리고 너도 잘 알잖아. 이겨내지 못하면 어차피 죽는다는 걸. 그래서 너는 그 쟁탈전 안했어?”
“......”
“가볼게. 안내 정말 고마웠어. 내일 패 가지러 가면 되는 거지?”
“...응.”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라.”
유세현은 이윽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돌로 된 의자에 앉아있던 김다혜가 인파속으로 사라지는 그를 묵묵히 바라봤지만 유세현은 그 끝내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 *
유세현이 천막으로 복귀하자마자 일행들은 바로 장물 처리를 위해 이동했다.
헌데, 이강호가 가는 곳은 상업지구가 아닌, 일반 거주지구였다.
팀 헤르메스의 중견간부이던 에드워드가 사용하던 아이템이 제법 등급이 높았기 때문에 경매에 붙이기 위함이다.
유세현이 물품을 내놓자 중매인은 재빠르게 리스트를 살폈다.
행여나 같은 주둔지의 인원을 피살하고 빼앗았는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검과 체인아머, 부츠까지 총 3개의 물품의 검사를 마친 중매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확실히 이런 아이템은 등록되어있지 않군요. 레어 E랭크에 특수 방어 스킬까지...저 같으면 그냥 쓰겠습니다만 왜 굳이 석판으로 바꾸시려는 거죠?”
“코인도 얻을 겸 던전에 들어가서 더 좋은 것을 구해볼 생각 입니다. 강해져야죠.”
이강호가 대충 답하자, 중매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틀 뒤 열리는 경매에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3번 석판과의 교환이 분명하시죠?”
“예.”
“접수되었습니다. 몇 개에 낙찰이 될지는 경매에 와서 직접 보셔도 되고, 바쁘시다면 추후 수령만 받으셔도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중매인의 입가에는 반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판매액의 5%가 그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3번 석판으로의 교환을 의뢰했으니 몇 개 거래가 되지 않는 만큼, 잘 만한다면 5% 이상의 수익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상 일행은 적자를 보는 셈이었지만, 어차피 공짜로 얻은 물품인 만큼 일행은 개의치 않았다.
그보다 지금 더 중요한 것은 당장 내일 있을 쟁탈전.
유세현의 말을 들은 이강호는 내일 있을 쟁탈전에 참전할 것을 선언한 상태였다.
첫 전투로 고블린과 인간 진형의 힘이 서로 비등비등하다는 것을 이미 파악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단지,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적은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는데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는 인원이 고작 3명 뿐이라는 것.
그렇기에 일행은 쟁탈전의 참가 수속을 밟을 겸, 사전정보도 얻기 위해 바로 공유지구로 향했다.
쟁탈전이 일어날 장소의 지형지물을 파악해 둔다면 좀 더 수월히 전투를 이어나갈 수 있다.
지도를 펼친 이강호가 중얼거렸다.
“흠...다행히 평야는 아니네.”
“어떤데?”
“숲과 골짜기가 있어.”
기습 및 매복 등 좀 더 전략적으로 전투를 벌일 수가 있는 것.
이번 쟁탈전의 목표는 골짜기 밑에 위치한 사원의 점령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전면전이 펼쳐지겠지만 그런 것은 어차피 요새 3대 팀이나 팀 라이트, 팀 아레스같은 거대 팀들이 도맡아 줄 것이다.
그렇기에 유세현 일행의 목표는 최대한 적을 잘라먹으며 공로를 채우는 것.
그들은 곧 자유 팀으로 등록을 한 뒤, 공유지구를 나섰다.
< 주둔지(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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