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왕 유세현-69화 (69/612)
  • 도태된 자들의 무덤(1)

    꿀꺽.

    이한철의 입에서도 마른침이 넘어갔다.

    두근두근.

    직접 결투한 것도 아니건만, 심장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매섭게 뛰고 있었다.

    단지 이용석이 무참히 당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이유.

    ‘저 자식...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어...’

    이한철은 유세현의 첫 스킬이 프로즌 디퓨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프로즌 디퓨젼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척이나 간단하다.

    즉, 그는 육체를 강화시키는 그 흔한 능력조차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쓸 필요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친...도대체 스텟이 어떻게 되길래...’

    지금껏 적당히 맞춰 주었다는 것을 깨닫기 무섭게 이한철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능력이 안 되서 몬스터를 독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독점을 안 한 것이었다니.

    아마, 이쪽의 인원수를 생각해서 그런 것이리라.

    그래 마치 제단 때처럼.

    그들은 생존을 위해서라면 이기적으로 악행도 일삼을 수 있게 된 대부분의 생존자들과는 달리, 정말 무서울 정도로 자신들이 정해놓은 행동양식을 지키고 있었다.

    신뢰가 바닥을 기는 이 험난한 세계에서는 그나마 가장 믿을 수 있을 만한 팀.

    이한철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놈들은 결단코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그는 그들에게 가지고 있던 개인적인 감정은 이쯤에서 접기로 마음먹었다.

    향후를 위해서. 앞으로의 생존을 위해서.

    “크윽...크으으...”

    그때, 지면을 데굴데굴 구르던 이용석이 비틀거리며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맹렬한 눈빛으로 유세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느낌.

    “야! 유세혀어언!”

    쩌렁쩌렁한 고함을 지른 이용석이 유세현을 향해 성큼성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이한철은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현재 이용석은 팀의 리더.

    지금 이용석이 유세현을 공격이라도 하는 날에는 팀원 전체가 적으로 인식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뭐가 되었던 결코 곱게 끝나지는 못한다.

    ‘아, 안돼! 막아야 돼!’

    “형 잠깐만 기다...”

    이한철은 필사적으로 외치며 온 힘을 다해 이용석을 향해 뛰었다. 여타 생존자들의 표정 또한 얼음장처럼 굳었다.

    그들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

    허나, 정말 안타깝게도 이용석은 이미 유세현의 앞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유세현이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보기 무섭게, 눈을 부릅뜬 이용석이 외쳤다.

    “내가 졌다!”

    “......”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러나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깔끔한 패배 선언이었다.

    팔을 잘린 순간 이용석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상대가 전혀 못 되었다는 것을, 제단 때보다 차이가 더 벌어졌음을, 그리고 앞으로를 위해서라면 개인적인 악감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당한 이용석은 더 이상 유세현을 일반 학과생이던 유세현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간 봐온 생존자 중, 그 누구보다도 강해지는데 성공한 강자 중의 강자.

    그들은 앞으로 보다 더 강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그간 대해온 태도가 있는 만큼 비록 친해질 수는 없겠지만, 척을 지는 것만큼은 막아야만 했다.

    훗날 그들이 세력을 넓혔을 때,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에 보복 당하는 것은 결단코 사양이었으니까.

    이용석은 속이 무척 좁았지만 그렇다고 미련한 남자는 아니었다.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던 유세현이 말을 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너도 수고했다.”

    이용석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모래바닥에 떨어져있는 자신의 팔을 주웠다.

    그리고 곧장 물로 모래를 헹군 뒤 떨어진 몸에 갖다대었다.

    찌지직.

    떨어져나간 팔의 근섬유가 조금씩 이어 붙기 시작한다.

    “크으윽...”

    이용석은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입을 악물었다. 앞으로 향후 3일간은 이 왼팔을 쓰지 못하리라.

    그때 유세현이 이한철을 나직이 불러 세웠다.

    “이한철 일로 와봐라.”

    “...어? 어...”

    이한철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유세현에게 다가갔다.

    대체 뭐 때문에 불렀단 말인가.

    유세현이 말을 이었다.

    “김주희가 한 게 있는 만큼, 너희 팀에게 두개를 주겠어. 아니면 이것도 결투로 정할래?”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코인을 전부 먹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유세현은 처음처럼 여전히 합리적이고 냉철했다.

    이한철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냥 두개 만 받을 게.”

    “그래라 그럼.”

    두 팀은 이내 아누비스에게서 나온 코인을 분배하고는 포탈을 통해 성의 미로를 빠져나갔다.

    * * *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이용석은 성의 미로에서 얻은 티켓이 사용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무섭게 유세현에게 같이 내부지역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다.

    내부지역에 얼마나 강한 몬스터 들이 있을지 모르는 이상, 뭉쳐 다니는 편이 안전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허나.

    “죄송하지만, 그건 불가능 할 것 같네요.”

    “뭐? 왜? 설마 증표가 부족한 거...는 아닐 텐데.”

    “예, 그건 아니죠.”

    “...흠.”

    이용석은 유세현 일행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킬이 있는 곳을 또 아는 건가?’

    말이 안 되는 말이긴 하지만 이강호가 있는 한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다. 그는 이곳에 막 도착했었던 처음에도 뭔가 남달랐으니까.

    이용석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230:06:30]

    약 9일 하고 반나절.

    내부미로가 최종지점인 만큼 다소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상 방심할 수는 없는 시간이었다.

    또한 행여나 동행한다 해도 유세현 일행은 스킬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기로 곧바로 결정을 내린 이용석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조심해라. 세현아.”

    “예. 수고하세요.”

    유세현을 인정 했음에도 마지막까지 반말을 하는 것은, 그의 마지막 남은 얄팍한 자존심이었다.

    파앗!

    이내, 증표를 티켓으로 바꾼 이용석의 팀이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러자 이때까지 줄곧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김주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와...놀랬어요. 선배님.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순식간에 태도를 싹 바꿀 수가 있을까요?”

    “......”

    둘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그랬었던 당사자가 바로 자신의 앞에 서 있었기에.

    자신이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더니,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

    “가자.”

    그들은 이내 아이템을 사들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유세현 일행은 이틀 간 2개의 미로를 더 돌았다.

    몬스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중복된 증표를 주었기 때문이다.

    파앗.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강호가 능숙하게 바뀐 환경을 살폈다.

    주위는 빌딩이 무척이나 많이 솟아 있었다.

    때문에 언뜻 보면 죽은자들의 도시처럼 보이지만, 간격이 보다 더 빽빽하게 이루어져 길을 만들고 있는 것이 그 차이.

    이곳은 노란색 티켓을 사용할 수 있는 회색의 미로였다.

    유세현이 차분히 말했다.

    “이번에는 무조건 당첨이겠네.”

    “그렇지.”

    미로는 총 6군데이지만, 모든 증표를 얻기 위해서 사실 그곳을 다 들를 필요는 없다.

    붉은색 증표는 푸른색 증표와, 노란색 증표는 녹색증표와, 주황색증표는 남색증표와 항시 짝을 이뤄 나오기 때문이다.

    즉, 운만 좋다면 3번 만에 증표를 다 모을 수 있는 것.

    그러니, 그들이 아직까지 증표를 다 모으지 못한 것은 순전히 운이 안 따라 준 탓이었다.

    그들은 첫발은 좋았으나 끗발이 별로 좋지 못했다.

    노란색 증표를 손에 쥔 유세현이 이강호를 향해 말했다.

    “이번 아이템은 내가 살게.”

    “그래.”

    유세현은 곧바로 상점을 불러내어 몬스터 탐지 아이템을 구입했다.

    “디텍트.”

    허나, 아이템을 사용해도 마땅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경과된 만큼, 주위에 위치해있던 몬스터가 생존자들에게 싹 죽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단은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 봐야 상황을 알 수 있다.

    살짝 한숨을 내쉰 유세현이 말을 이었다.

    “흠...이거 잘못하다간 지도 못 구입하는 거 아니냐?”

    “...그럴지도”

    결단코 계산착오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이강호로서도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가 작용한 것이다.

    유세현이 이전 방을 너무 빠르게 완전 클리어 한 것.

    그 덕에 생존자들은 이강호의 예측보다도 훨씬 빠른 기간 내에 미로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불안한 만큼, 몬스터를 필요이상으로 잡아 증표를 넉넉히 모아갔을 것이다.

    작은 날개 짓 아니, 큰 날개 짓이 부른 거대한 나비효과.

    “일단가자.”

    “알았어.”

    이강호는 굳이 유세현을 탓하지 않았다. 중간지점에서 14일 이내에 만나야 된다며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한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게 30m쯤 나아갔을 때였다.

    왼쪽 옆에 위치해 있던 빌딩의 창문 사이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둘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아무래도, 누가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다.”

    “...오케이”

    “알겠어요. 선배.”

    이전 일러준 적이 있던 만큼, 둘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이강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렇게 되면 굳이 애써서 몬스터를 찾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이강호는 곧장 상점을 열어 증표를 사용해 한 종류의 아이템 여러 개 구입했다.

    -사냥꾼의 다트

    효과: 적중 시 1시간 동안 사냥감의 위치를 드러냅니다.

    범의 아가리로 들어올 적을 위한 혹시 모를 선물.

    그들은 이강호의 지시에 따라 모른 척 골목처럼 좁은 길을 계속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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