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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왕 유세현-28화 (28/612)
  • 중간다리(1)

    어찌나 울어 얼굴이 퉁퉁 부은 것이 없던 측은지심도 살아날 지경.

    자신 또한 이강호의 목숨으로 협박을 당하게 된다면 완강하게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유세현은 고심 끝에 살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무력을 직접 체험한 만큼 정말 우연히 다시 마주 친다 해도 그녀들이 적이 될일은 정말 웬만해선 없으리라.

    “두말 안합니다. 우리 앞에서 당장 떠나세요.”

    “...예?”

    “살려준다는 뜻입니다. 단, 옷 한 벌은 주고 가셔야겠습니다.”

    “아, 예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세현의 마음이 바뀔라 옷을 재빨리 내민 여자들은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이윽고 여자들은 마도철 패거리의 옷을 벗겨갈아 입은 뒤 초원에서 모습을 감췄다.

    본래 마음 같아서는 유세현과 이강호의 보호를 받고 싶었겠지만 입장이 입장인 만큼 그냥 떠나간 것.

    이강호가 유세현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그렇게 하다가는 언젠가 뒤통수 제대로 맞을지도 모른다. 조심해라.”

    진심이 담긴 충고였다. 허나, 유세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절대 안 맞아.”

    이 말을 하고 있는 이강호를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은 믿지 않으니까.

    그러니 처음부터 속으면 속았지 믿다가 뒤통수를 맞을 일은 없을 것이다.

    유세현은 곧장 김주희에게 다가가 벗겨진 상체 위에 옷가지를 덮어준 뒤 해독초를 꺼냈다.

    아직 약에 중독된 지 10분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입이 어수룩하게나마 뻐끔뻐끔 움직이고 있었다.

    “서, 선...배...”

    자이언트 머드골렘을 잡고 흡수한 체력코인이 큰 영향을 준 것.

    어쩌면 자신들은 굳이 해독초가 필요 없을 수도 있었다.

    “김주희, 일단 이것부터 먹어라.”

    약초 하나를 통째로 입에 넣어주자, 김주희는 쓴맛 때문에 인상을 구기면서도 끝까지 씹어먹었다.

    약효는 무척이나 빨랐다.

    “선배님...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김주희는 몸이 움직여지기 무섭게 상체가 벗겨져 있다는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이에 유세현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가리키자 그녀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옷을 황급히 주서 입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어찌어찌 상황이 정리되고 야영을 할 무렵.

    이강호가 둘을 향해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이 앞으로는 사람을 죽여야 되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높다.”

    “또 노리는 사람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뜻이지?”

    “이젠 절대 방심하지 않을게요. 선배님!”

    김주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면 이강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이 섬이 지니고 있는 룰...무슨 말인지는 알겠지?”

    “...그렇군.”

    “아...”

    둘은 말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좋던 싫던 법칙에 의해 강제적으로 벌어질 수 있다는 뜻.

    “이젠...저도 할 수 있어요.”

    먼저 대답한 것은 추악함의 끝을 경험한 김주희였다.

    그녀의 눈에는 한층 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유세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표정을 확인한 이강호가 말을 이었다.

    “좋아.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줄 테니 잘 들어라. 두 번은 말 안해.”

    “예. 선배!”

    “말해봐라.”

    그날 이강호는 2차 튜토리얼에서 할일과 주의사항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설명을 했다.

    * * *

    법칙의 섬은 정확히 말해서 2개로 나뉘어져 있다.

    생존자들의 적응을 위한 외부 섬과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온갖 던전이 즐비 하는 내부섬.

    그중에서도 이강호가 가려는 곳은 최악의 난이도로 불리는 마왕의 성이였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우선 내부섬으로 들어가는 중간다리를 통과해야만 했다.

    [중간다리]

    다른 이름으로는 죽음의 다리.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을 이어주는 건널다리 앞으로는 파수꾼이 저마다 한 마리씩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난이도는 랜덤.

    생존자들은 다리를 건널 수 있는 권한을 얻기 위해 파수꾼이 주는 시련을 통과해야 했지만, 이 시련은 때때로 잔혹무도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점은 하루에 한번 씩 리셋이 되어 다음날에는 새로운 시련을 받을 수 있다는 것뿐.

    “후우...2명만 더 오면 이번 조건인 100명이 넘는군요.”

    “이번에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시련을 줄지...이번에는 꼭 통과해야 되는데...”

    한 남성의 말에 주위 사람들의 인상이 구겨졌다.

    이틀 전 파수꾼이 낸 시련은 한 사람당 타인을 각 4명씩 죽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거부를 했고, 다음날이 되자 새로운 시련을 받았다.

    문제는 시련의 난이도가 더 지랄 같아졌다는 것.

    파수꾼은 그들에게 5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바이벌을 할 것을 지시했다.

    사람들은 또 거부했다.

    이렇게 여기서 3일을 허비하는 동안 남은 시간은 2주로 줄었다.

    갈 길이 얼마나 먼지 모르는 생존자들로서는 마음이 자연스레 조급해 지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

    한 시라도 빨리 조건을 충족 시켜야만 했지만, 인원수만큼은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 저기 온다!”

    문득 숲을 본 한 남성이 외쳤다.

    생존자들의 이목이 단번에 남자의 손끝으로 집중되었다.

    미모의 여성 한 명과 커다란 방패를 등에 짊어진 남자 둘로 이루어진 소규모 그룹이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파수꾼이 깨어납니다.]

    트드드득.

    건널다리 옆에 위치해있던 커다란 나무가 잠시 으스스 떨리더니 이내 지면에서 뿌리를 뽑고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파수꾼 데스크라토스.

    썩은 나무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파수꾼은 판도라의 내무 숲 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쥬레이족을 본 따 만든 것이었다.

    [다리를 건너고 싶은 자들이여. 시련을 받을 준비는 되었나.]

    갈라진 틈사이로 매서운 눈을 뜬 데스크라토스가 물었다.

    “예.”

    생존자들은 그간 당한 것이 있는 만큼 욕지 꺼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은 만행을 저지르진 않았다.

    왠지 여기서 쓸데없이 입을 나불거렸다가는 왠지 더 더러운 시련을 받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

    아니나 다를까 생존자들을 흘긴 데스크라토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재미가 없어졌군. 흥미가 떨어졌다. 5명. 총 5명만 나에게 바친다면 앞으로 보내주도록 하지.]

    “...!!”

    생존자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 숫자가 무척이나 차이가 난다.

    [어떻게. 시련을 받을 것이냐?]

    “어떻게 하죠?”

    생존자들은 의견을 나누었다.

    이렇게 좋은 조건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고 희생은 안 된다면서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위에 지인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극구 거부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여태까지 시련의 내용으로 볼 때 희생은 불가피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나아질 수도 있잖아요?”

    “그러다가 안 나아지면?”

    결국엔 분란이 일어났다.

    파수꾼은 재미있다는 듯 그것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한마디를 넌지시 덧붙였다.

    [참고로 난 이것보다 더 좋은 조건을 다신 내걸지 않을 것이다.]

    “큭!”

    [어떻게 할 것이냐. 1분의 시간을 주마.]

    쐐기를 박는 말.

    데스크라토스는 한번 잠들시 다음날이 될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즉, 기회는 지금뿐.

    한 남성이 외쳤다.

    “그냥 해! 하겠어!”

    [나는 과반수로만 움직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지?]

    “......”

    [30초 남았다.]

    “할게요.”

    “나도! 찬성한다.”

    생존자들은 결국 하나 둘 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악마같이 벌어진 데스크라토스의 입에서 기괴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좋다. 수락되었다. 열심히 해보도록.]

    말과 동시에 생존자들의 눈앞에 알림창이 나타났다.

    [시련이 수락되었습니다. 5명의 희생자를 데스크라토스에게 바치십시오. 제한 시간은 1시간입니다.]

    “...!! 한 시간?”

    “이런 말은 없었잖아! 생각할 시간은 줘야지!”

    생존자들의 입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데스크라토스는 단 한마디로 모든 것을 잠재웠다.

    [제한시간이 있냐는 것을 너희가 묻지 않지 않았나.]

    “......”

    사람들은 이 썩은 고목을 진심으로 불태워버리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촉박한 시간은 그들에게 험담을 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어떻게 희생자를 정하죠?”

    “후...일단 각 팀에서 한명씩 선출에서 나머지끼리 정하는 게 어떨까요?”“그래서는 사람이 많은 쪽이 유리하잖아요! 솔직히 같이 오기만 했지 누가 팀이 줄도 모르고.”

    “같이 온 게 팀이죠. 아니면 당신들도 사람들을 많이 모아 오던가요. 능력이 부족해서 못살려온 주제에...”

    “지금 모라고 했어요!”

    “왜? 제가 틀린 말했습니까? 혹시 우리 팀원들 전부와 싸우고 싶은 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제 말뜻은...”

    주위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팀원들이 많은 쪽은 이점을 들먹이며 자신들이 유리한쪽으로 언변을 휘두르고 있었고, 수가 적은 쪽은 어떻게든 도덕성을 내세우며 공평한 쪽으로 방향을 이끌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는 시답잖은 논쟁이 30분간 이어지고 있을 때 남성 한 명이 주위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잠시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어? 신승훈씨? 다들 조용히 해보세요!”

    “어...”

    사람들은 잠시 다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영향력을 보니 신승훈이라는 남자는 제법 많은 인원을 살리고 오는데 성공한 사람이 분명하다.

    신승훈이 말을 이었다.

    “이제 30분도 안 남았습니다! 이대로 가면 모두 죽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여기서 저는 제안합니다. 공평하게 가위바위보 어떻겠습니까.”

    “...뭐?”

    “한 사람씩 붙잡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겁니다. 이긴 사람은 빠지고 진 사람끼리 다시 가위바위보를 하는 거죠.”

    신승훈의 논리는 확실히 현대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굉장히 공평한쪽에 속하면 서도 아니었다.

    운에 진심으로 목숨을 걸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던 유세현이 둘을 향해 말했다.

    “만약 이걸하게 된다면 가위바위보의 결과에 따라서. 상황이 바뀔 가능성이 크다.”

    “...상황이 바뀌어요? 무슨 뜻이에요? 선배?”

    “보면 알아. 아무튼 마음은 단단히 먹어둬.”

    “예...”

    결국, 마땅한 꺼리가 없자 신승훈이 내건 가위바위보가 책정이 되고 생존자들은 전부 모르는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지인을 떨어트리는 것보다는 모르는 사람을 떨어트리는 게 훨씬 났지 않은가.

    김주희 또한 대충 아무 사람을 한 명을 붙잡았다.

    제안을 내건 남자, 신승훈이었다.

    “안녕하세요. 신승훈입니다.”

    “김주희에요.”

    발뺌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이름을 교환한 둘은 서로 마주섰다.

    단지 가위바위보일 뿐인데, 심장이 무척이나 뛰었다.

    만약 여기서 계속 지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가위! 바위! 보!”

    외침과 동시에 둘의 손이 앞으로 삐져 나갔다.

    김주희는 바위, 신승훈은 가위였다.

    “꺄아아!”

    생존에 성공한 김주희가 기쁨에 못 이겨 방방 뛰었다. 반면 신승훈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이로서 그에게 남은 기회는 약 4번.

    어차피 그가 죽던 말 던 자신이 알바가 아니었기에 김주희는 얼른 유세현과 이강호를 찾아 돌아다녔다.

    ‘이기셨어야 하는데...’

    왠지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지만 가위바위보는 실력이 아닌 순전한 운 게임. 마음 한 편으로 살짝 불안감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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