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 초한전 (2)
(202/210)
202화 : 초한전 (2)
(202/210)
202화 : 초한전 (2)
2022.10.15.
홍옥 졸 하나가 옆으로 비켰다.
‘어떻게?’
이를 본 진천우가 두 눈을 찌푸렸다.
청옥 졸이 먼저 움직였으니 그다음 홍옥 졸이 움직이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진천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앞을 바라보다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맑고 푸른 청옥으로 이뤄진 여러 종류의 기물들밖에.
‘하지만!’
진천우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푸른 현판을 조작했다.
슥!
그러자 이번에는 처음 움직인 청옥 졸의 반대편에 위치한 다른 졸이 옆으로 움직였다.
잠시 뒤, 맞은편 홍옥 졸이 움직였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있을 수 있을 법한 포진.
‘이래도?’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조금 양상이 달라졌다.
-히이잉!
마(馬)가 몸을 일으켰다.
단단한 청옥을 깎아 만든 날렵한 준마 위에 올라탄 기병이 검을 뽑고 앞으로 달려갔다.
기병은 정확히 앞으로 한 번, 그리고 대각선 방향으로 한 번을 움직였다.
만약 졸이었다면 무려 세 번이나 움직여야 할 거리를 한 번에 훌쩍 뛰어넘었다.
과연 기동성을 중시한 기병다웠다.
그런데 그 직후, 상대편에서 더한 게 튀어나왔다.
‘상(象)!’
기병의 말은 졸의 배가 넘는 크기였다.
허나 장기판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저것의 크기는 말의 배의 배를 넘는 거대함을 자랑했다.
-뿌오오오!
고혹적인 색감의 홍옥을 깎아 만든 집채만 한 크기의 코끼리가 장기판 전체를 뒤흔들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놀랍게도 코끼리는 말보다 훨씬 멀리, 그리고 훨씬 재빠르게 움직였다.
“…….”
진천우는 장기판 가장 안쪽에서 순식간에 제 눈앞까지 다가온 그것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코끼리가 얼마나 큰지, 그 위에 타고 있을 병사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는 상대의 거대함에 겁을 먹기는커녕, 도리어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런 식인가?’
진천우가 적의 성향의 파악을 끝마쳤다.
슥.
-히이잉!
그는 곧바로 앞서 움직인 기병을 다시 내보냈다.
기병의 장점은 기동성.
이것을 십분 활용하면, 기병 하나로 적의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 기병을 막기 위해 적이 취할 방법은 극히 제한적이다.
하나는 졸을 잘 활용해 방어를 굳혀 아무리 기병이라도 함부로 설치지 못하게 하는 것.
허나 진천우는 상대가 그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뿌오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적은 기병을 막기 위해 졸을 움직이지 않고, 두 번째 방법을 사용했다.
쿵! 쿵! 쿵!
코끼리 병사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녀석은 금방 조금 전 앞으로 나간 기병의 턱밑까지 접근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뿌오오오오!!
코끼리가 제 고개를 오른쪽으로 깊게 꺾더니, 잠시 뒤 고개와 함께 꺾인 긴 코를 사정없이 왼쪽으로 휘둘렀다.
퍽!
그로 인해 말 위에 타 있던 기병이 녀석의 코를 맞고서 그만 낙상하고 말았다.
-히이잉!
쫄지에 주인을 잃은 말이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허나 녀석의 수난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쿵!
기병을 날려버린 코끼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히이잉!!
그 무거운 발걸음에 낙마한 기병은 그대로 장기판 밖으로 떨어졌고, 완전히 주인을 잃은 말은 큰 충격을 받은 듯 그대로 몸을 바짝 숙여버렸다.
이로써 진천우는 제 진영에 불과 둘밖에 없는 귀중한 기병 중 하나를 잃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안타까워할 겨를도 없이 바로 푸른 현판을 사용해 다른 기물을 조정했다.
슥!
놀랍게도 이번에 움직인 건 맨 처음 홀로 앞으로 나아갔던 졸이었다.
그 졸이 옆으로 몸을 돌렸다.
그 앞에는 조금 전 기병 하나를 박살 낸 바로 그 코끼리가 있었다.
철컥!
허나 졸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오히려 허리춤의 장검을 꺼내 앞으로 달려갔다.
-뿌오오!
코끼리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비틀었지만, 검을 든 졸병은 믿기지 않는 몸놀림으로 놈의 옆구리에 장검을 박고, 그것을 발판삼아 단번에 놈의 등판 위로 올라섰다.
거기에는 코끼리를 조종하는 병사가 있었지만.
쿵!
졸은 그 병사마저 코끼리에서 떨어트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아마 코끼리 병에게 빼앗았는지, 졸은 처음 보는 긴 만곡도를 하늘 높이 들더니.
콰직!
그대로 그것을 코끼리 등에 박았다.
-뿌오오!
코끼리가 괴로운 듯 세차게 몸을 비틀었다.
그걸로 끝.
털썩!
주인을 잃은 코끼리는 곧 땅에 고개를 숙이며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말았다.
결국, 기병이 있던 자리를 코끼리가 차지하자마자 다시 졸이 뺏어가 버렸다.
이로써 진천우는 기병 하나를 잃은 대신 상대의 코끼리 병을 처리했다.
솔직히 득실을 따지면, 그가 약간 손해였다.
분명 코끼리의 효용도 뛰어나지만, 장기에서 기병은 코끼리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이를 알기에 상대도 망설임 없이 코끼리와 기병을 교환한 것이다.
슥!
잠시 뒤, 상대편 졸이 움직였다.
앞서 기병을 처리하여 얻은 약간의 이익에 만족했는지, 아니면 다른 계책이 있는지 이번 졸은 큰 이변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어쩌면 이대로 격차를 계속 지키려는 걸지도 모른다.
‘그럴 순 없을걸?’
그러자 진천우가 천천히 고개를 위로 올렸다.
자신이 있는 곳과 반대편에는 여전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몇 번이나 상대편 기물이 움직였고, 자신의 기병마저 앗아갔다.
이를 통해 진천우는 제 상대가 누구인지 명확히 파악한 뒤였다.
비록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대.
“…….”
진천우가 조용히 시선을 더 위로 올렸다.
-…….
거기에는 붉은 단상 위, 화려한 휘장으로 가려진 자신의 상대의 모습이 옅게 보였다.
바로 적의 왕.
놀랍게도 홍옥으로 이뤄진 기물을 움직이는 주체는 바로 적의 왕이었다.
즉, 진천우가 승리하려면 단순히 장기의 규칙을 따르는 것을 넘어 정말 적의 왕을 쳐야 했다.
그는 곧바로 졸을 움직였다.
슥!
그러자 휘장 너머의 붉은 왕이 여유롭게 손을 뻗어 수하를 앞으로 내보냈다.
-히이잉!
처음으로 적의 기병이 앞으로 나왔다.
-뿌오오!
그다음 적의 남은 코끼리 병도 앞으로 나왔다.
적의 왕이 차곡차곡 방어를 굳혔다.
그 모습을 본 진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철저히 정석대로만 움직이는군.’
처음 붉은 왕은 매우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그 덕에 자신의 기병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허나 그 또한 정석 중 하나.
붉은 왕이 공격적으로 나선 건 어디까지나 진천우가 틈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틈?
‘내가 첫수에 졸을 홀로 앞으로 내보낸 탓이겠지.’
제한 시간을 모두 사용해 자동으로 움직인 첫 수.
확실히 그것은 좋지 못한 수였다.
그러나 문제없었다.
아니, 문제없게 만들 것이다.
-자, 오랜만에 아비랑 장기를 둬볼까?
진천우는 잠시 오래된 기억을 꺼냈다.
자신이 조물거리는 작은 손을 앞으로 뻗자, 제 기억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아비가 반색하며 그 앞에 장기말을 깔았다.
진천우는 어릴 적부터 아비와 자주 장기를 두며 놀았다.
-어이쿠, 이 아비가 실수했구나.
-어어? 이런 수가 있었나?
-응? ……천우야 한 번만 더 두자꾸나!
정말 자주 뒀었다.
-여, 여보! 아무래도 우리 아들은 장기 천재인가 봐!!
그 덕에 진천우는 제법 장기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 * *
쾅!!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
폭발에 휩쓸린 자리는 아주 말끔했다.
폐허더미도, 그 아래 신음하는 자도, 끔찍한 핏자국도 없었다.
그만큼 매우 깔끔하게 모든 걸 쓸어버렸다.
과연 천마가 직접 펼친 전설의 천마신공다운 위력.
“쯧!”
천마가 차가운 시선으로 주위를 훑다, 낮게 혀를 찼다.
설마 이만한 폭발에도 살아남을 줄이야.
“확실히 질기군.”
그러나 그게 다다.
천마의 예민한 감각은, 불사신을 자랑하던 중년인의 생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역시 자신의 마지막 일격이 너무 강한 탓일까?
그게 아니면 먼저 사라진 진천우 일행이 뭔가 저지른 걸까?
‘뭐든 상관없겠지.’
어차피 저놈은 다음 한 수로 끝이다.
슥!
천마가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이 손을 내리기만 하면, 저 지긋지긋하고 재미도 없는 불사신 놈을 끝낼 수 있다.
그래, 이 손을 내리기만 하면…….
두근!
“!?”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천마가 화들짝 놀라며 두 눈을 치켜떴다.
그가 이렇게 놀라는 일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설마 중년인이 그 찰나에 반격이라도 한 걸까?
그럴 리 없다.
저자는 이제 더는 불사신이 아니고, 그저 죽음만 기다리는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녀석에게 아직 여력이 남았다 해도 그것이 결코 천마를 어떻게 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천마를 이만큼이나 기겁하게 만들 존재는 천하에 오직 하나.
……천마 자신뿐.
두근두근!
“하!”
천마가 한 손으로 제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그저 심장만 빠르게 뛰는 게 아니었다.
그의 머리 역시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미친 듯이 돌아갔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역행하며 시야가 돌아갔다.
독? 술법? 기관?
앞서 말했듯 그런 걸로는 천마에게 어떤 효과도 주지 못한다.
오직 천마 자신만이 자신을 상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 현상은 결코 나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여기서 느닷없이 벽을 넘어버릴 줄이야.’
벽?
무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벽을 넘으며 과거의 자신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천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지금껏 천하의 그 누구보다 많고 높은 벽을 뛰어넘었기에 천마가 천마일 수 있었다.
그런 천마가 벽을 뛰어넘었다?
허접하나마 불사신인 적을 부수고 박살 내길 반복하다 저도 모르게 벽을 뛰어넘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천마는 이미 전설상의 경지인 반로환동까지 마친 상태.
여기서 한 번 더 벽을 넘다니.
그럼 그다음 단계는 당연히…….
‘등선(登仙)인가?’
인간이란 경계를 뛰어넘어 신선(神仙)이 되는 단계.
‘아니지. 난 마인이니 신선이 아니라 마선(魔仙)이라 불려야 하겠지.’
마지막 순간이 다가옴에도 천마는 여전히 냉정하고 침착하게, 거기에 약간의 여유까지 더해서, 점차 희미해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진정한 천마였다.
‘그래, 이렇게 가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천마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불사신마저 쓰러트린 이상, 천하에 그의 적수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선계로 넘어가 그곳을 뒤집어보는 것도, 하늘을 꺼꾸러트릴 마로서 나쁘지 않은 선택.
“하……하하하!”
천마가 빠르게 사라져가는 제 몸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원래 몸의 반절 이상이 사라진 그 순간.
“하!”
꽈악!
갑자기 천마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우웅!
간신히 손가락 두 개만 남은 주먹이, 그가 힘을 줌과 동시에 손가락 세 개로 늘어났다.
“안 되지.”
천마가 더욱더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럼 안 되지.”
꽈아아아악!!
그가 주먹에 끊임없이 힘을 주며, 아주 낮게 읊조렸다.
“적어도 내 손으로 다 끝내기 전에는 끝낼 수 없지.”
하늘을 꺼꾸러트릴 마는 모든 무인들의 꿈이라는 등선조차 대수롭지 않은 듯, 아니 거추장스러운 듯 거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