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비무 (2)
(157/210)
157화 : 비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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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화 : 비무 (2)
2022.07.02.
“……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렇군요.”
현석이 거한에게서 필요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개중 상당히 비밀스러운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를 통해 현석은 거한이 원래는 높은 지위였음을 유추해냈다.
‘어쩌다 여기 갇힌 거지?’
궁금증이 일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품에서 죽통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네?”
거한이 죽통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질문에 대답하면 술을 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분명 그리 말했지만, 폭력으로 거한을 무릎 꿇린 이상 정말 술을 내줄 이유는 없었다.
그게 바로 사파인의 자세였다.
허나 현석은 달랐다.
자신은 사파인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약조와 별개로 내가 당신에게 술을 주고 싶습니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 한다.
그러니까 현석은 사파인이면서 사파인과 다르고 그러면서 정말 사파인 같은 괴상한 태도를 취했다.
쪼륵!
하여간 그는 죽통을 열어 그 뚜껑에 화주를 따랐다.
죽통째로 내줬다간 틀림없이 거한이 한 모금에 거덜 낼 것 같아 그리했다.
“안심하십시오. 이 한 잔만 마시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죽통에 있는 술을 다 마셔도 됩니다.”
“가, 감사합니다.”
“?”
거한은 어째서인지 내미는 뚜껑을 두 손으로 받았다.
이를 본 현석이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만큼 술이 정말 고팠구나 싶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거한은 잠시 자신이 받은 술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런 싸구려 화주를 받았었다.
-마셔라! 마셔!
거한의 눈이 잠시 흐려지고, 시야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렸다.
벌써 수년째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이곳의 주인.
원래 련과 별개로 자신만의 흑도방파를 이끌었던 그는 우연히, 아니 아주 운 나쁘게 괴물과 시비가 붙었다가 영혼까지 털린 뒤 이곳으로 끌려왔다.
괴물은 자신의 입에 싸구려 화주를 네 병이나 강제로 입에 붓더니 그대로 제 수하가 되라 말했다.
거절하면 죽인다고 하니, 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것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원래라면 변방 흑도 무리의 수장으로 썩었을 자신을 무려 천하를 삼분하는 련의 당당한 무사로 만들어줬는데 무슨 불만이 있을까?
‘그보다 어째서 이 녀석을 보고 그분이 떠오르는 거지?’
겨우 이딴 싸구려 화주 때문에?
‘아니, 아니다.’
슥!
거한이 다시 눈에 초점을 잡고 고개를 내렸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이상 차이 나는 청년.
얼굴도 곱상한 게 제 주인과 영 딴판이다.
‘하지만.’
딱 하나, 제 주인을 떠올리게 하는 게 있었다.
‘조금 전의 그 눈빛.’
순식간에 자신의 무릎을 꿇리고 자신을 내려다볼 때 보였던 그 차가운 눈빛.
그런 눈빛은 련주의 제자들도 짓지 못했다.
오직 이곳의 주인만이 지을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이자의 눈에서 보았다.
‘하하, 내가 무슨 생각을…….’
이 얼마나 엉뚱한 생각인가.
이런 핏덩이 같은 청년을 두고, 지금 천하를 좌시하는 절대자를 떠올리다니.
가당치 않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후!”
거한이 낮게 한숨을 토하며, 뚜껑에 담긴 화주를 단숨에 넘겼다.
“크으!”
오랜만에 들이키는 술.
예상대로 이 정도 양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술은 좋았다.
쪼륵!
현석이 다시 뚜껑에 화주를 따랐다.
정말 죽통에 있는 술을 다 주려는 모양.
‘그러면 나야 좋지!’
거한이 곧바로 두 번째 잔을 입에 털었다.
쪼륵!
세 번째도 거침없었다.
쪼르륵!
“마지막입니다.”
“벌써?”
“아쉽게도 이 죽통에는 딱 네 잔 마실 양이 전부입니다.”
달리 말하면 두 명이 두 잔씩 마실 양.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현석이 머릿속에 누군가를 떠올리려던 찰나.
철컹!
갑자기 감옥 문이 열렸다.
새로운 죄수?
아니, 감옥 안으로 들어온 것은 간수들이었다.
그들은 곧바로 현석의 양팔을 움켜쥐며 감옥 바깥으로 끌고 갔다.
“무슨 일이냐!”
거한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감히 죄수 신분으로 간수에게 소리친 거지만, 간수들은 호통치기는커녕 거한을 매우 어려워했다.
역시 그는 평범한 죄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간수 중 하나가 어렵사리 현석을 데려가는 이유를 밝혔다.
“련주님의 명입니다.”
“뭣?! 련주께서 돌아오셨더냐?”
“네, 방금.”
“그럼 반란자들은? 그들은 어떻게 됐지?”
“이번에도 용서받았습니다.”
“뭐?!”
용서라니!
아무리 련주의 성격이 제멋대로라지만, 이처럼 반란을 종용하는 련주는 사도련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런데 련주께서 저 청년은 왜?”
“모르셨습니까? 그는 련주님과 함께 련에 오다 붙잡혔습니다.”
“뭣?! 자네, 련주님과 무슨 사이인가?”
곧바로 모두의 시선이 현석에게 모였다.
사실 그의 정체는 간수들도 궁금해하던 차였다.
현석도 앞서 거한의 설명과 간수들의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수 없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아마도 당신들이 련주라 하는 분은…… 제 사부인 것 같군요.”
“뭣?!”
“네!?”
그의 짧은 대답에, 거한과 간수들이 동시에 두 눈을 치켜떴다.
특히나 간수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그들은 즉시 거칠게 붙잡은 손을 풀고, 현석을 아주 정중히 일으켰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숙여 조금 전 일을 사과했다.
“죄, 죄송합니다. 넷째 공자님이신 줄 모르고 제가 큰 무례를!”
“괜찮습니다.”
현석이 순순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모르고 한 일에 굳이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먼저 물을 게 있었다.
“그보다, 날 데려갈 장소가 어딥니까?”
“그것이…… 대연무장입니다.”
“알겠습니다.”
현석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는데, 옆에 있는 거한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심각한 표정을 말했다.
“넷째 공자는 그리 여유로워할 때가 아니오. 지금 같은 상황에, 게다가 련주의 성격까지 생각하면…….”
“틀림없이 저를 다른 제자와 겨루게 하겠지요.”
“그걸 알면서!”
“겁먹는다고 뭔가 달라집니까?”
“네?”
황당한 반응.
그러나 맞는 말이다.
련주가 하기로 정한 이상, 그건 반드시 지켜진다.
여기서 겁을 먹어봤자 바뀌는 건 없다.
그런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여전히 아무렇지 않아 하는 현석을 통해 깨달았다.
“허허허!”
거한이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아직 많이 멀었구나.’
주군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아직 강제로 련에 끌려왔던 그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는 이 사실을 일깨워준 상대를 바라보며, 마지막 남은 화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맹세했다.
“만일 넷째 공자께서 이번 일을 무사히 넘기신다면, 내 도를 공자께 바치겠소.”
무인이 자신의 무기를 바친다는 건 곧 목숨을 맡기는 일.
함께 있던 간수들이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세상에!”
“설마 광견, 아니, 광혈단주께서 련주님이 아닌 자에게 자신의 도를 마치겠다 하다니.”
련주의 제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다른 장로와 단주들은 그들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적어도 중립을 지키느라 파벌을 짓지 않은 이들을 빼면 모두 그랬다.
하지만 한 사람은 끝까지 고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중립파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가 여기 지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미친놈 투성이인 사도련에서 가장 미친놈, 아니 미친개로 불리는 광견.
그는 어째서인지 현석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이 끌렸다.
본래라면 쉬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석, 아니 ‘조련자’란 직업을 가진 그였기에 이런 일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광견은 현석의 수하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광견은 현석이 이 일을 무사히 넘어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렇다면.
“다녀오겠습니다.”
현석이 느긋하게 그 조건을 해결하기 위해, 감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왔군.”
사도련주, 현석의 사부가 방금 막 지하 감옥에서 나온 제자를 반겼다.
그의 주위에 상당한 인원이 배치돼 있었다.
모두 사도련의 장로와 단주들.
-알겠습니다.
셋째는 련주의 제안을 수락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가 내건 조건은 이 비무를 련의 주요직이 모두 보는 앞에서 하자는 것.
어차피 련주가 하라고 명하면 거부할 수 없으니, 보다 많은 사람 앞에서 넷째를 꺾어 자존심이라도 지키려는 것이다.
셋째는 자신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물론 련주가 싫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그는 뜻밖에도 그 조건을 순순히 승인했다.
슥!
현석이 고개를 들어 사부를 확인했다.
조금은 놀랄 줄 알았는데, 표정에 큰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련주가 누구인가.
‘놀랐나 보군.’
그는 곧바로 현석의 두 눈에 옅은 파문이 인 걸 눈치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 정체에 대해 들었을 터.
허나 말로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건 감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련주는 녀석의 의문을 친절하게 해결해줄 생각이 없었다.
“드디어 모였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리 크게 말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 련주의 목소리가 연무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굳이 시간을 오래 끌 것 없다.
“싸워라.”
“네.”
스릉!
셋째가 즉답하며 검을 뽑았다.
“…….”
그런데 맞은편에 선 현석은 허리춤의 마도를 뽑지 않았다.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그렇지 않으면 겁에 질려서?
‘그럴 리 없지.’
비록 짧은 시간을 함께했을 뿐이지만, 련주는 누구보다 제 제자를 잘 알았다.
저놈은 저리 침착할 때가 가장 무섭다.
지금도 언제든 바로 마도를 뽑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련주의 제자가 현석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제법 잘 잡힌 자세구나.”
셋째가 한눈에 그것을 꿰뚫어 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여유롭게 현석의 주위를 돌며 틈을 노렸다.
‘멍청한 놈.’
그걸 본 련주가 가볍게 혀를 찼다.
사파 놈이 검을 뽑았으면 바로 달려가 상대의 멱이나 딸 것이지. 저게 뭐하는 짓인가?
‘저놈은 다 좋은데, 저렇게 쓸데없는 머리를 굴리는 게 흠이란 말이야.’
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련주가 없는 사이 그만큼이나마 장로를 모은 건지도 몰랐다.
그러니 여기 보인 이중 셋째의 패배를 예상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비무를 지켜보는 간부들은 련주의 생각과 정반대로, 셋째 공자가 토끼를 사냥할 때도 전력을 다하는 범처럼 신중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셋째 공자는 련주에게서 오 년 가까이 무공을 사사했다.
그에 반해 련이 입수한 정보대로라면, 새로 들인 넷째 공자는 련주에게 무공을 배운 지 반년도 되지 않은 걸로 알려졌다.
그들이 보기에 현석은 분수를 모르고 수레를 막으려 하는 어리석은 사마귀에 불과했다.
스윽!
셋째 제자가 현석을 앞두고 탐색을 이어나갔다.
‘확실히 잘 잡힌 자세군.’
하지만 그뿐이다.
제법 정돈된 기세를 내뿜고 있지만, 그 기운이 크지 않다.
자신과 비교하면, 반의반도 안 되는 수준.
‘처음 비무를 제안할 때, 사부가 확실히 자신하길래 난 또 따로 영약이라도 먹인 줄 알았는데.’
그게 바로 셋째가 경계하던 유일한 이유였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현석에게서는 자신을 뛰어넘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취하는 자세도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과 같은 뿌리를 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내가 이긴다.’
저 고약한 련주 아래서 오 년 넘게 익힌 무공이 저딴 젖비린내 나는 놈에게 꺾일 수 없는 법.
탁!
역시 련주의 제자답게 셋째는 승리를 확신하자마자, 곧바로 몸을 날렸다.
휙!
그가 내지르는 검에 범상치 않은 기세가 담겼다.
이를 지켜보는 련의 간부들은 어쩌면 이 한 수에 단번에 승부가 결정날지도 모르겠다 예상하던 순간!
챙!!
믿을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