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 괴인의 호의 (1)
(134/210)
134화 : 괴인의 호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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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 괴인의 호의 (1)
2022.05.09.
“음……?”
소천마가 눈을 떴다.
눈앞에 낯선 천장, 아니 낯선 동굴이었다.
‘어디까지 떨어진 거지?’
정신이 들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 난 건, 나락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끝없이 아래로 떨어졌지만, 산공독 탓에 내공이 전혀 모이지 않았다.
-지독한 놈!
머릿속으로 이 함정을 만든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그 녀석은 자신을 죽일 생각인 걸까?
아니지.
애초에 그럴 각오로 함정을 만들게 강요한 건 자신이었다.
그래놓고 조금 위기에 처했다고 놈을 원망하는 건 옳지 않았다.
이 순간, 자신이 할 일은 하나였다.
슥!
소천마는 눈을 감고, 허공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우우웅!
그렇게 정신을 집중하니 내공이 모였다.
픽!
그러나 곧바로 산공독의 효과로 다시 흩어졌다.
“…….”
우우웅!
허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픽!
몇 번을 시도해도 계속 흩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몇 번으로 안 되면, 몇십 번, 몇백 번 시도하면 그뿐.
휘이익!
‘아직 바닥까지 시간이 남았다.’
나락은 정말 깊고 깊었다.
허나 나락은 진법의 효과나 환상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현실.
반드시 그 끝은 단단한 바닥일 게 분명했다.
거기에 닿기 전에 어떻게든 다시 내공을 일으켜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죽는다는 거지?’
사느냐 죽느냐.
나쁘지 않다.
애초에 소천마는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다.
우우웅! 핏! 우우웅! 핏!
그녀는 쉬지 않고 내공을 모으고 흩어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결국 끝이 다가왔다.
휘이이이잉!!
바람 소리가 강해졌다.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이 바닥과 부딪혀 다시 올라오는 현상.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
죽느냐 사느냐!
소천마는 위기에 강했다.
우우웅!!
끝내 그녀는 산공독의 효과를 이겨내고 내공을 모았다.
그러나 그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더 모을 수도 있지만, 이제 바닥과의 거리는 불과 십 장.
더 모을 시간이 없었다.
우우웅!!
소천마가 곧바로 한 줌의 내공을 양손에 두르고 그대로 바닥을 내려쳤다.
천마수(天魔手)!
천마신공의 원초 중 제 일초.
위대한 초대 천마가 사용한 원초 천마신공은 하나하나가 절기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천마수는 원초 천마신공 중 가장 간결하고 날카로운 일격.
이렇게 끝없이 떨어지는 와중에 반탄력으로 몸을 떠올릴 때에는 보다 묵직하고 웅장한 공격이 어울렸다.
허나 그것들을 당장 펼칠 시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펼칠 내공이 한참 부족했다.
콰쾅!!
잠시 뒤, 천마수는 바닥과 부딪쳐 커다란 굉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소천마는 그 굉음과 함께 위로 솟구쳤다.
‘서, 성공…….’
성공했다.
비록 양팔이 으스러지는 격통을 느꼈지만, 어쨌든 목숨을 건졌다.
허나 그 직후, 지니고 있는 내공을 모두 소모한 나머지.
쾅!
튕겨서 올라간 몸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어떻게 최대한 낙법을 펼쳐 충격을 분산했지만,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에 그 충격을 완전히 흘릴 수 없었다.
결국, 소천마는 그 직후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
여기까지가 자신이 기억하는 마지막 장면.
“뭐, 일단 살았으니 됐다.”
그녀는 지난 일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온몸이 엉망이 됐지만, 어쨌든 살았지 않은가?
죽지 않고 살았단 것만으로 대만족이었다.
그리고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우우웅!
목숨 걸고 내공을 모았기 때문일까?
원래부터 대단했던 그녀지만, 현재 소천마의 내공 장악력은 나락에 떨어지기 이전과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느낌만으로도 전의 배 이상 된 듯했다.
‘내공 장악력뿐 아니라, 다른 감각도 월등히 상승한 것 같고.’
“일어났나?”
“깜짝아!!”
감각이 상승하긴 개뿔!!
‘내가 이렇게 지척 거리까지 누가 다가온 것도 몰랐다니!?’
팟!
그녀는 황급히 몸을 날려 괴인과 거리를 두고, 곧바로 자세를 취했다.
언제든 천마수를 뻗을 수 있도록.
“…….”
“…….”
고수는 실제로 손을 섞기 전에 먼저 기세를 드러낸다.
서로 드러낸 기세를 확인함으로써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고, 어떤 공격을 어떻게 펼쳐야 가장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눈앞의 괴인은.
“……뭐 하는 건가?”
“…….”
“……벙어리인가?”
“…….”
“쯧, 고와 보이는 처자가 안 됐군. 그동안 고생 많았겠어.”
“…….”
“나이는 몇인가? 딱 보기에도 내 아들과 비슷한 나이 또래 같은데?”
‘뭐지?’
자신이 이렇게 대놓고 기세를 드러내는데 상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자, 되레 소천마가 당황했다.
어떻게 내 감각을 속이고 지척까지 다가온 거지?
그게 가능한 경우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첫째는 현 천마처럼 자신을 한참 웃도는 고수일 경우.
두 번째는 바위나 나무처럼 한없이 무위자연에 가까운 자일 경우.
둘 다 전혀 평범한 경우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리 봐도 그냥 평범한 범인 같지?’
물론 굳이 상대의 특징을 찾자면 찾을 수 있었다.
‘장신에 체구도 나쁘지 않지만, 얼굴이나 분위기를 보면…….’
군데군데 귀태라고 해야 하나?
차분하고 청아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어둡고 습한 동굴에서조차 그가 앉자 마치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학관처럼 느껴졌다.
소천마를 당황시킨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째서일까?
‘왜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 계속 드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전에 만난 적 없는 자다.
허나 계속 그의 선한 얼굴을 바라보면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이런 느낌은 느껴본 적 없었다.
그래서일까?
소천마는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슥!
그때, 괴인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휙!
소천마의 몸이 이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그녀의 손이 급하게 내뻗는 그 순간.
“마시게.”
우뚝!
앞으로 뻗은 손을, 괴인의 목줄기가 아닌 그가 내민 투박한 나무 그릇 쪽으로 간신히 옮겼다.
나무 그릇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투명한 녹색 액체가 담겨있었다.
“차?”
“난 항상 찻잎을 휴대하거든. 자네의 심신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걸세.”
‘한눈에도 당황한 게 보였던 걸까?’
소천마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초면인 자에게 이리도 쉽게 감정을 읽히다니.
평소 자신답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후룩!
보통 때라면 당연히 의심했어야 할 차를 아무 의심 없이 한 모금 넘겼다.
뒤늦게 소천마도 자신이 반드시 했어야 할 의심을 하지 않은 걸 깨닫고 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저자는 너무 이상하다.
이상하게 저자와 함께 있으면,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한다.
거기다 이상한 점은 또 하나 있었다.
‘이 차…….’
정말 평범한 차다.
오히려 굳이 따지면 아주 하품의 차였다.
소천마는 금지에 갇히기 전까지 교주의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랐다.
천하에 손꼽히는 명차는 모두 맛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정체 모를 장소에서 다기조차 아닌 투박한 그릇에 담긴 볼품없는 액체가 왜 이리도 맑고 고아한 향을 풍기는 걸까?
“맛이 어떤가? 괜찮지? 내가 이래 봬도 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우리 거든.”
괴인이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차가 담긴 그릇을 앞으로 내밀었다.
후룩!
소천마가 이번에도 군말 없이 차를 마셨다.
이건 정말이지 독을 의심하는 시간조차 아까울 맛이었다.
그녀는 차를 세 번이나 얻어 마신 뒤에야 그가 여기 있는 이유와 정체를 물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유? 그냥 약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다 보니 여기로 왔다네. 그런데 그만 길을 잘못 들었는지 벌써 수년째 여기에 갇히게 되었지.”
“수년째 여기서 갇혀있었단 말입니까?”
소천마는 자기도 모르는 새 괴인에게 말을 높였다.
천마에게조차 반말을 일삼던 자신이 어째서 이러는지 그녀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그녀가 괴인의 말을 더 깊게 파고들었다.
‘나나 맹의 추적자들 모두 절벽을 억지로 부숴 적룡의 능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 자는 어떻게 여기로 들어온 거지?’
“응? 자네는 설마 뒷문으로 들어왔나?”
“뒷문?”
“위에 있는 절벽을 통해 내려오는 것 말일세. 거기 높이를 생각하면 보통 무공으로는 엄두도 못 낼 텐데, 처자는 보기보다 훨씬 대단한 고수였군.”
“잠깐, 뒷문이 있다는 말은 다른 통로도 있다는 겁니까?”
“있지. 여기서 십 리쯤 떨어진 마을 뒤편에 적룡의 사당이란 게 있는데, 거기 지하에 비밀통로가 있지. 내가 거기로 들어왔는걸?”
“그런?!”
“아무렴, 이만한 규모의 유적이 절벽에서 떨어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제대로 된 방법만 알아내면 보다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소천마는 처음에는 괴인의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러나 괴인이 자신이 적룡의 능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그 사연과 여기까지 오게 된 경로 그리고 여기로 들어오면서 겪은 여러 이야기를 차례로 알려주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정말 아무 무공도 익히지 않고 여기까지 들어온 겁니까?”
“그렇다니까. 난 그저 평범한 학사 나부랭이라네.”
“어떤 평범한 학사가 이런 곳까지 들어온답니까?”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괴인이 한껏 으스대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하지만 그는 곧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사실…… 모두 내 아들 때문이라네.”
“아들?”
“그래, 내가 못난 탓에, 내 아들이 많이 아프다네. 그래서 그 약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다네.”
“아들이 많이 아픈 모양이군요.”
이때, 소천마가 머릿속에 누군가가 급히 떠올렸다.
“혹시 아들이 몇인지?”
“응? 내 아들은 하나뿐인데?”
“그렇군요.”
그녀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했지만, 아무래도 아닌 모양.
소천마는 진천우를 금지에서 처음 만났기 때문에 그가 아픈 모습은 본 적도 없고,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쓸데없는 의문이 사라지자, 아까부터 정말 궁금했던 것을 괴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약이 필요하길래?”
그랬다.
도대체 어떤 약이 필요하길래, 학사라는 자가 이런 곳까지 온단 말인가?
“글쎄. 일단 공청석유와 금와과, 홍유밀…….”
“네?”
‘이자가 지금 무슨 헛소릴?’
공청석유는 한 방울만 마셔도 다 죽어가는 시체도 일으킨다는 엄청난 영약이었다.
거기다 금빛 개구리 모양을 한 금와과란 과일과, 어른 주먹 크기의 사나운 벌들이 모아 만들었다는 붉은 꿀인 홍유밀 역시 준영약급의 물건이다.
‘한 사람의 병을 고치는 데 그런 것들이 전부 필요하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소천마는 딱 하나, 정말 그런 것들이 모두 모여야만 차도를 보이는 병세를 알고 있었다.
‘절맥인가?’
그녀 또한 구음절맥이라는 희대의 악성 체질을 타고났었기에 그 사정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의 절맥을 구하기 위해 이런 곳까지 직접 찾아오다니.
괴인의 놀라운 정성에 소천마도 가슴 한쪽이 뭉클했다.
한편, 괴인은 그녀의 이런 마음도 모르고, 그저 계속 자신이 필요한 영약의 이름을 읊었다.
“……뇌절초와 만년삼도 필요하지. 아, 하지만 역시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슥!
괴인이 천천히 제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소천마를 지나쳐 하늘을 향했다.
방금 막 그녀가 떨어졌던 나락의 바로 옆.
거기에 웬 어른 머리 크기의 붉고 빛나는 돌이 덩그러니 동공 천장에 박혀있었다.
괴인이 다시 입을 뗐다.
“저기 저 적룡의 심장도 필요하지.”
“네?!”
저게. 그 적룡의 심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