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맹주 (1)
(124/210)
124화 : 맹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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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 맹주 (1)
2022.04.16.
“뭣?!”
“무슨 헛소리를!!”
사방에서 황당해하는 소리가 들렸다.
왜 아니겠는가?
맹이 독을 풀다니.
무슨 그런 망발을!
허나 모든 지원자가 똑같이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
제갈민이 입을 닫고 눈살만 찌푸렸다.
“음……!”
종리우도 마찬가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문왕의 재기를 지닌 현소는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잠깐, 사부라면…….”
곧바로 뒷말을 삼켰다.
본 맹의 총군사 자리를 맡을 정도면, 그간 온갖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도 남았다.
현소는 그의 제자가 된 지 한 달밖에 안 됐지만, 그만하면 충분히 사부의 진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물론 설령 그 말이 참이라 해도 지금 진천우의 행동은 있을 수 없는 짓이었다.
맹의 시험 중에 맹이 독을 풀었다고 소리치다니!
그야말로 맹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
그러나 그 말이 완전히 부정당하지 않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미 첫 시험에서 총군사가 제 제자를 집어넣은 게 밝혀졌다.
이를 들은 다른 지원자들은 총군사의 제자가 인맥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처럼 시험으로 정당히 실력을 평가한다는 사실에 되레 기뻐했다.
게다가 그 성적이 꼴지에서 딱 한 칸 위라, 부정을 의심하는 이도 없었다.
하지만 제갈민과 종리우는 그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둘은 첫 시험이 사실은 시험이 아니라 진법에 대한 강의임을 눈치챘다.
거기서 맨 마지막으로 나왔다는 건, 총군사의 제자가 시험을 가장한 진법 강의를 끝까지 수강했다는 뜻.
무엇보다 용납할 수 없는 건, 총군사가 자신들조차 제자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으로 삼으려 한 점이다.
이는 원래부터 다소 독선적이고 편협한 성향인 종리가는 물론이고, 언제나 고매한 학처럼 달관하는 제갈가의 자존심마저 짓밟는 행위였다.
‘확실히…….’
‘믿기 힘들긴 하지만, 어쩌면…….’
그랬기에 그 둘도 완전히 의심을 걷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은 깊어졌다.
“어?”
“왜 저러지?”
그런데 그 둘은 앞선 시험에서 나란히 최상위 성적을 거둔 이들.
심지어 가문 역시 무림에서 가장 이름난 제갈세가와 종리세가였다.
이들이 은연중 맹을 불신하는 태도를 보이자, 처음에는 진천우의 말을 부정하던 다른 지원자도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랬다.
진천우가 푼 진짜 독은 바로 ‘맹에 대한 불신’이었다.
이는 금세 지원자들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큰일이군.’
결국, 지켜보던 심사관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이대로 계속 놔둘 수 없었다.
그의 권한으로 상처 봉합까지는 무리지만, 적어도 벌어진 상처가 더 덧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만!”
심사관이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사방에 퍼트렸다.
안 그래도 싸움은 소강상태였다.
지원자들이 의아한 얼굴로 심사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어서 빨리 답을 알려달라는 학당의 학생을 연상케 했다.
물론 심사관은 답을 안다.
허나 자신이 답을 알려준다고 저 학생들이 그대로 수긍할까?
‘아마 안 그러겠지.’
오히려 의심만 깊어질 터.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하나였다.
‘어쩔 수 없군.’
“이것으로 두 번째 시험을 끝마치겠소!”
웅성웅성!
드디어 시험이 끝났지만, 지원자들의 의문은 더 커졌다.
누가 봐도 밝히기 싫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시험을 끝낸 꼴이다.
당연히 이를 심사관도 모르지 않았기에, 그는 지원자들을 향해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본 맹에 상주하는 당가의 사람들을 부르겠소.”
“아아!”
“그렇군. 당가라면!”
사천당가.
당가는 정파의 몇 안 되는 독을 다루는 문파 중 하나지만, 그 실력은 천하에 손꼽히는 독의 명가.
그 당가의 사람이 나선다면, 확실한 답이 나올 터.
그제야 지원자들이 하나둘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데 이는 분명 진천우에게 불리한 상황일 건데?
‘호오?’
그는 당가의 이름을 듣고도 두려워하기는커녕 되레 큰 호기심을 느꼈다.
‘과연 당가가 내 독공을 알아낼 수 있을까?’
정파 제일이라는 사천당가.
그들은 과연 진천우가 이은 독괴의 독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때, 진천우는 그야말로 순수하기 그지없는 독인으로서 당가의 출현에 기뻐했다.
* * *
때마침 본 맹에는 당가의 장로가 머물고 있었다.
그는 오늘 낮에 있던 소식을 듣자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건 재밌군. 아주 재밌어!”
“쯧!”
연신 호들갑 떠는 당가의 장로를 바라보며 총책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저자가 나서다니.’
어째서?
실력이 부족해서일까?
그렇지 않았다.
그자는 당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독인.
그래서 문제였다.
“정말 재밌어!!”
당가를 상징하는 갈색 무복 위로 장로를 상징하는 녹색 장포를 두른 그가 현장을 확인하며 연신 재밌다는 소리를 연발했다.
문제는 그 광경을 입맹 지원자 전원이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다.
‘너무 실력주의인 것도 문제군.’
사천당가의 장로 당휘.
중년을 훌쩍 넘었건만, 여전히 당가의 장로를 맡기에는 젊었다.
다른 가문 같았으면 저 길고 검은 수염의 반 이상은 희게 변할 무렵에야 장로직을 맡았겠지만, 철저히 실력주의인 사천당가는 재작년, 그에게 장로직을 맡겼다.
그만큼 실력은 나무랄 데 없다.
문제는.
“정말 너무 재밌어!!”
‘왜 하필 저 독에 미친 놈만 남아서!!’
당휘는 독에 미친놈이었다.
“당휘 장로, 그래서 어떤 독인가?”
“모릅니다.”
“몰라?”
사천당가의 장로가 모르는 독?!
총책사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나자, 당휘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아, 방금 제가 모른다고 말한 이유는 이 독이 특별히 널리 알려진 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마 흑진초와 적귀염, 그 외에도 최소 다섯 가지 이상의 독을 섞은 것 같은데, 일반적인 중원의 독 조합은 아니군요. 그렇다고 세외의 독도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꽤 잘 만든 독입니다. 그래서 더 재밌는 독이란 소리입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천인공노할 자군! 감히 맹 한가운데서 독을 사용해!”
“네? 왜요?”
총군사가 즉시 화를 내며 독을 사용한 자를 처벌하려는 명을 내리려는데, 당휘가 딴지를 걸었다.
“이건 전혀 위험한 독이 아닙니다. 아니, 사용한 자가 철저하게 위력을 줄였다는 게 맞겠군요. 그러니까 조를 이뤄 싸우는 시험 중에 이 독이 사용됐다고?”
“네, 넷, 그렇습니다!”
당휘가 지원자 중 한 명을 지목해 물었다.
상대는 그 유명한 당가의 장로다.
지원자는 순간 머리가 새하얘져 묻는 말에 답했다.
“그럼 아무 문제 없군. 누가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그 시험에 사용해도 될 만큼 아주 적절히 위력을 줄인 독이네. 아니, 살상력이 전혀 없으니 아예 독이라고도 부르기도 어려우려나? 나 당휘가 사천당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네.”
‘그런 맹세를 왜 하고 있어!’
총책사는 남들의 눈만 아니면, 그 자리에서 당휘를 갈겨버리고 싶을 만큼 그의 뒷통수를 노려보았다.
“허허허, 아무튼 재밌어. 아주 재밌는 독이야!!”
그러나 이 독에 미친 놈은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저 독이 사용됐던 장소를 살피며 연신 입꼬리를 비틀었다.
보아하니, 딱히 범인을 찾을 생각도 없는 모양.
이래서는 다른 독인을 부를 수도 없었다.
그랬다간 맹이 당가를 무시한다는 모양새가 된다.
게다가 당휘가 사천당가의 이름으로 이건 독이 아니라고 선언한 이상, 더는 흉수를 찾을 명목도 사라졌다.
“총책사님, 어떻게 합니까?”
두 번째 시험의 심사관이 곤혹해하며 총책사를 찾았다.
그도 딱히 뾰족한 수는 없었다.
앞의 시험에서 이미 총책사는 제 제자를 몰래 넣은 일로 시험에 크게 관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남은 지원자가 얼마나 남았나?”
“대충 처음의 삼분지 일 정도입니다.”
“겨우 두 번 만에 많이도 떨어졌군.”
“종리세가와 제갈세가의 자제분이 등에 날개 단 듯 날뛴 덕분에 탈락자가 속출했습니다. 게다가 독이 사용됐다는 말에 겁먹고 포기한 지원자도 나와서…….”
“그렇군.”
본래라면 꽤 나쁜 결과지만, 총책사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그럼 이걸로 시험을 끝내지.”
“네?”
“어차피 처음 예상했던 합격자 인원이 딱 삼분지 일 수준이 아니었나. 그런데 두 번째 시험으로 그 인원이 걸러졌으니, 굳이 세 번째 시험은 할 필요가 없겠군.”
“그럼?”
“여기서 파하고 저녁쯤에 지원자를 다시 불러들이게. 그걸로 입맹 시험을 끝내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본 맹의 입맹 시험이 처음 예상보다 다소 이르게 끝마쳤다.
한편, 독에 미친 당가의 장로는 여전히 독이 퍼졌던 자리에 머물러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이 독……. 분명 재밌긴 한데,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분명 처음 보는 독인데, 왜 완전 낯설지는 않은 거지?
이 조합, 이 실력 틀림없이…….
“아!”
당가의 장로가 드디어 그 무언가를 떠올렸다.
‘독괴……! 그럼 그의 후인 중 하나가 본 맹에 들어온 건가?’
“큭큭!”
당휘가 그 자리에서 뜻 모를 웃음을 흘렸다.
* * *
“합격자는 앞으로 나오게!”
그날 저녁, 입맹 시험이 끝나고 합격 발표가 이뤄졌다.
상당히 급하게 이뤄진 합격 발표였다.
원래 예정된 삼차 시험과 패자 부활절도 생략됐으니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합격자를 임명하는 장소도 본 맹 구석에 위치한 초라한 회랑이었다.
그러나 합격자 중 실망한 이는 없었다.
거기에서 합격자를 호명하는 이들만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총책사에 우책사, 거기다 백검대 총대주까지.’
무림사에 다소 밝지 않는 진천우조차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서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총책사와 우책사야 말할 것도 없고, 본 맹의 삼대 무력 단체 중 일각인 백검대는,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미안한 일이나 평소 친분을 쌓은 백풍대와는 비교조차 불가한 정예 중의 정예였다.
특히 그런 백검대의 총대주인 백검대주는 맹에서 최고 무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무인이었다.
“입맹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진천우가 주위를 살피는 동안에도 합격자 발표는 계속 이어졌다.
솔직히 좀 놀라웠다.
‘나까지 합격시킬 줄이야.’
-맹이 독을 풀었다!
이는 간단한 시험이었다.
그는 신안에게 따로 추천장을 받은 탓에 딱히 입맹 시험에 목매지 않았다.
그 발언으로 틀림없이 맹의 높으신 분들의 심기가 불편했을 텐데도, 진천우는 탈락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책사 다섯 그리고 무인 여든아홉이 전원 합격했다.
예상보다 공정하고 깔끔한 일 처리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총책사가 자기 제자를 몰래 시험에 넣었다고 했을 때는 조금 실망했는데…….’
합격이란 결과를 받자, 그 실망감이 상당히 씻어졌다.
“여기라고?”
그때, 누군가 회랑 안으로 들어왔다.
상당히 장신의 노인이었다.
그는 새하얀 백발을 단정하게 묶고 흰 장삼을 둘러 마치 도사 같은 면모였다.
그러나 딱 그뿐.
본 맹에는 그 같은 이가 양손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른 지원자들도 노인의 정체를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다만, 합격자 선두에 선 제갈민과 종리우는 달랐다.
그들은 가문의 특성상 맹의 수뇌부의 얼굴을 모두 기억했다.
당연히 본 맹의 정점에 선 이의 얼굴도 모를 리 없었다.
“맹주님 오셨습니까?”
이때, 총책사가 가장 먼저 허리를 굽혔다.
곧바로 지원자들 사이에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일었다.
‘맹주님?!’
‘그 맹주님!?’
‘세상에!!’
진천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놀람은 다른 데 있었다.
‘맹주(盟主)!’
교의 교주, 련의 련주와 함께 현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최고 권력자.
다만 다른 둘과 다르게 맹주는 아주 큰 특징이 있었다.
진천우는 이 사실을 익히 들어 알았지만, 도무지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의안.’
그러니 이 기회에 확인해볼 셈이었다.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고개만 아주 살짝 들어 맹주의 몸을 살폈다.
“!?”
그 직후,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정녕 사실이었다니!’
슥!
그 순간, 맹주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하필 고개 돌린 방향이 지원자 무리 끝을 향했다.
진천우가 여전히 경악한 얼굴로 맹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