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만남 (2)
(111/210)
111화 : 만남 (2)
(111/210)
111화 : 만남 (2)
2022.03.16.
“술 나왔습니다. 저희 객잔에서 가장 오래된 백주입니다.”
“안주는?”
“지금 요리 중입니다. 요리가 끝나는 대로 갖다 드리겠습니다.”
“알았다.”
“그럼!”
점소이가 바로 물러났다.
행색을 보아하니 무림인 같은데, 이들과 엮여서 그리 좋은 꼴을 못 본다.
무림인의 좋은 점은 그나마 씀씀이가 크다는 점인데, 그것도 여차할 때의 목숨값이라 치면 많은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자는 이미 금자 한 냥을 던져주었기에 그 이상 낼 것 같지도 않았다.
점소이가 빠르게 사라지자, 사내가 눈앞에 있는 잔에 백주를 따랐다.
쪼르륵!
“너도 한 잔 주랴?”
“아, 아닙니다.”
모처럼 술을 건넸지만 녀석은 손사래를 쳤다.
딱히 술이 당기지 않는 듯했다.
그런 제자를 보며 사내가 한마디 했다.
“기억을 잊기 전에도 술은 잘 마시지 않은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술잔을 보니 뭔가가 떠오를 듯 말 듯했다.
희미한 기억 너머로 떠오르는 주향은 지금 눈앞의 백주처럼 향기롭지 않았다.
오히려 거칠고 탁하기 그지없는 향.
잔도 저런 매끄러운 술잔이 아닌 차를 따르는 큼직한 다기였다.
흐릿한 기억 속 그의 맞은편에는 누군가 앉아있었다.
‘누구지?’
지금 맞은편에 앉은 사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유약한 누군가.
얼굴에 병색이 완연해, 잘못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상대.
다만 그자의 눈빛만은 맞은편의 상대 못지않게 강하고 눈부셨다.
‘누구지?’
이런 단편적인 기억은 계속 떠오르는데.
‘도대체…….’
그 상대가 누군지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제 자신의 기억보다 더 자주 떠오르는 상대인데 이리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일 그자를 직접 본다면.’
반드시 잊어버린 기억을 모두 떠오를 텐데.
‘하지만 그자를 만날 수 있을까?’
휙! 휙!
남자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만날 수 있을까가 아니었다.
만나야 했다.
반드시!
단순히 잊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야만 한다는 강한 무언가, 어쩌면 신념과도 같은 감정이 남자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
한편, 그런 남자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생각보다 제자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기억을 잊었다는 놈이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밥 한 끼 먹을 때마다, 길 위를 걸을 때마다 계속 뭔가를 떠올렸다.
그만큼 머릿속에 강하게 박힌 무언가가 있다는 뜻.
-제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다면, 그때는 절 순순히 보내주십시오. 그리해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놈은 당돌하게도 제자가 되라는 제안에 그리 답했다.
-좋다!
사내는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원래 기억상실이 쉽게 낫는 병이던가?’
모르겠다.
애초에 기억을 잊어버리는 병을 본 것도 처음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동굴 밖에서 학수선의를 그리 내쫓는 게 아니었는데.’
적어도 증상을 말하고 얘기나 들어봤을 것을.
‘뭐, 지나간 일을 생각해봤자 의미 없지.’
사내는 골치 아픈 일은 넘기고 당장 해야 할 일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먼저 이놈을 제자로 받아들인 건 꽤 잘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 재능이 있어.’
처음에는 그저 몸이 괜찮은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함께 있는 며칠간, 녀석은 자신이 알려주는 걸 물먹은 솜처럼 빠르게 흡수했다.
‘불과 며칠 만에 기본자세를 모두 익힐 줄이야.’
이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몇 년이 걸리는 일.
제법 재능있는 놈도 한 달은 걸릴 걸 녀석은 불과 며칠 만에 끝냈다.
‘게다가 녀석은 신물의 선택까지 받았지.’
지금 녀석이 품에 안아 든 붉은 천은 수련이 심해져 놈의 몸과 정신이 엉망이 될 때마다 붉은빛을 뿜어 몸을 회복시켰다.
사실 그의 놀라운 성장 속도도 신물의 힘이 상당 부분 차지했다.
그러나 남들은 하지 못하는 신물과 반응할 수 있다는 것도 엄연히 재능의 한 부분.
‘이대로라면 몇 달 만에 써먹을 수 있을 수준까지 되겠어.’
사내에게 무려 ‘써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평가받는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눈앞의 남자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그저 아까부터 계속 머릿속에서 떠오를 듯 말 듯한 기억을 어떻게든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슥!
그때, 객잔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
순간, 객잔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검붉은 무복 차림에 등 뒤로 칼을 찬 무인들.
딱 보기에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 객잔에 점소이는 셋이나 되지만 누구도 쉽게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대로 시간을 끌었다간,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무인의 심기를 거스를 터.
어쩔 수 없이 가장 막내 점소이가 떠밀리듯 앞으로 나섰다.
“어서옵셔!”
백주를 가져온 점소이보다 열 살은 더 어려 보이는 아이가 겁에 질린 듯 목소리를 쥐어짰다.
평소 때의 사내라면 이를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점소이의 유난히 떨리는 목소리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그렇다 해도 겨우 눈동자를 몇 초간 내렸다 다시 올리는 정도였다.
“?!”
그런데 한 번 올라갔던 눈동자가 급히 다시 내려갔다.
‘저놈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만남.
다행히 상대는 아직 이쪽을 보지 못했다.
“가자.”
“네?”
사내의 낮은 목소리에 뒤늦게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하면 기억을 떠올릴 것 같았는데!
하지만 어쨌든 눈앞의 사내는 이제부터 그의 사부였기에, 남자는 감히 역정을 낼 수 없었다.
그보다 사내가 드물게 아주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당장 여길 뜬다.”
“네?”
“내게 이 이상 말하게 하지 마라.”
“네.”
남자도 사내와 함께하는 동안, 그가 같은 말을 세 번 이상 반복하는 걸 아주 싫어한다는 걸 알아챘다.
결국 남자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의 뒤를 따랐다.
* * *
“어서 옵셔!”
진천우와 백풍대주가 객잔에 들어서자, 바로 점소이가 반겼다.
“일단…….”
턱!
진천우가 객잔에 들어가자마자 조금 전부터 둘이 이야기한 명물 요리를 주문하려는데, 백풍대주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백풍대주의 얼굴이 제법 심각했다.
-진 공자, 오른편을 보게. 몸은 돌리지 말고! 눈동자만 돌려서!
다급한 전음에 진천우는 순순히 그 말을 따랐다.
‘도대체 뭣 때문에?’
조심스럽게 눈동자만 굴러 오른편을 살폈다.
검붉은 무복 차림의 무인 셋이 객잔 상층에서 식사 중이었다.
-그들 중 가운데의 젊은이를 주의하게.
‘누구길래?’
-혈야방의 셋째 공자라네.
‘혈야방?’
딱히 전음으로 답변하지 않았지만, 백풍대주는 용케 진천우의 생각을 읽고 계속 답해주었다.
-혈야방은 련을 따르는 가장 큰 일곱 개의 사파 세력 중 하나라네.
‘그런 자가 왜 여기에?’
-모르지.
일단 이 근방은 맹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맹의 영역이라고 사파의 무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면 맹이 직접 제재를 할 수 있기에 다소 주의할 뿐이다.
반대로 련의 영역에서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무인이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백풍대주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혈야방의 셋째는 소문난 망나니일세.
잘생긴 얼굴로 여자를 후리고, 술이 들어가면 언행이 거칠어진다.
거기다 혈야방의 위세를 믿어 아무 데서나 검을 뽑기까지 한다.
어째서 그런 문제아가 맹의 영역에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백풍대주는 결정을 내렸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이 자리를 뜨기로.
결코 혈야방의 위세가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까마귀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난 까마귀가 백로의 흰 빛에 샘을 내고,
기껏 맑은 물로 씻은 몸이 까마귀의 날갯짓으로 더럽힐 수 있으니.
-진 공자, 아쉽지만, 명물 요리는 다음에 먹도록 하세.
백풍대주가 조용히 객잔을 빠져나가기 위해 진천우의 팔을 붙잡았다.
우뚝!
“음?”
그런데 꿈쩍하지 않았다.
손에 힘을 더 주었지만, 역시나 움직이지 않았다.
“진 공자?”
팟!
진천우는 백풍대주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상층으로 올라갔다.
어째서?
그가 본 건, 진천우의 눈이 매우 심각하단 것뿐이었다.
마치 잃어버린 소중한 무언가를 방금 막 발견한 듯.
진천우의 눈에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휙! 휙!
진천우가 바람처럼 상층에 올라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히…….’
분명히 보았다.
비록 뒤돌아선 등뿐이지만 익숙한, 아니 절대 잊을 수 없는 누군가의 넓은 등을 똑똑히 보았다.
“진 공자!”
뒤따라온 백풍대주가 조심스럽게 이유를 물었다.
진천우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면서 백풍대주에게 그 이유를 밝혔다.
“현석을 보았습니다.”
“뭐라고? 그 녀석이 여기에? 대체 왜? 아니, 그리고 그놈은 왜 자네를 보고도 바로 달려오지 않은 건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녀석은 절 보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여기서 뒤돌아선 모습을 봤는데. 분명히 봤는데…….”
“그런…….”
백풍대주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위로의 말?
그건 이 상황에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방도를 떠올리자니, 솔직히 정말 여기에 현석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때였다.
“어라? 여기 있던 손님들이 어디 가셨지?”
고개를 돌리자, 이곳의 명물 요리를 담은 그릇을 든 젊은 점소이가 보였다.
그는 빈 술병만 덩그러니 남은 탁자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이 손님들이 음식을 주문해놓고 어딜 간 걸까?
‘측간에 가신 건가?’
하지만 그는 올라올 때 손님들이 나가는 걸 못 봤다.
상층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은 하나뿐.
그 외에 아래로 내려갈 방법이라고는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것 정도인데.
‘미리 돈을 낸 손님이 왜 그런 짓을 하겠어.’
점소이가 그냥 자신이 잘못 봤겠지, 곧 돌아오겠지 하며 가져온 음식을 탁자 위에 놓고 내려가려던 찰나.
“여기에 손님이 있었다고?”
“어? 주문하시겠습니까?”
“여기 누가 있었느냐?”
“네?”
“여기 누가 있었냐니까!”
진천우가 급히 점소이를 붙잡았다.
느닷없이 손님의 외양을 묻는 게 수상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뒤에 서 있는 중년인은 누가 봐도 무림인이었다.
‘젠장, 무림인은 잘못 걸리면 골치 아픈데…….’
어쩔 수 없이 점소이는 자신이 본 그대로 두 사람의 외양을 설명했다.
“현석입니다! 틀림없이 그놈입니다!”
“진정하게! 겨우 그 정도 설명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네.”
“그렇지만!”
백풍대주가 크게 흥분한 진천우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일단 그 두 사람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아내야 한다.
그러자 진천우가 다시 점소이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그 두 사람이 내려가는 걸 못 봤다고?”
“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아서……. 아, 아마 막내라면 알 겁니다.”
“막내?”
“네, 우리 중 가장 어린놈인데, 마침 저쪽 손님들을 안내하느라 계속 상층에 대기하고 있었으니…….”
쾅!
그 순간, 갑자기 뒤편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이런!”
휙!
백풍대주가 급히 몸을 날려, 상층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하마터면 아이가 죽을 뻔했다.
아이가 날아온 방향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혈야방의 셋째와 그의 호위무사가 보였다.
“맹의 무인인가?”
“어찌 무공도 모르는 아이에게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하는가!”
“그놈이 제 의무를 다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내려야 할 벌을 내리는 걸세.”
“벌?”
“그래, 벌. 점소이라면 당연히 객잔을 깨끗하게 청소해야겠지. 그런데 녀석이 안내한 탁자 위로 흙발로 밟은 자국이 있지 않겠나?”
“무슨!”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해도, 겨우 그딴 이유로 아이를 상층에서 떨어트려?
백풍대주의 두 손에 굵은 힘줄이 새겨졌다.
분명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먼저 진천우에게 자리를 뜨자고 말한 건 자신이건만!
‘내 어찌 이 같은 불의를 보고도 참아 넘기겠는가!’
백풍대주가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호? 덤비려는가?”
혈야방의 셋째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시위하듯, 등 뒤의 칼을 턱 하니 탁자 위에 올렸다.
감히 자신을 보고 저리 크게 눈을 치켜뜨다니.
절대 그냥 둘 수 없었다.
그 순간, 백풍대주가 갑자기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 외침은 혈야방의 셋째를 향한 게 아니었다.
“진!!”
진?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당장 탁자 위의 손 치워!”
“?!”
등 뒤에서 울리는 목소리.
‘어느새!?’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혈야방의 셋째는 목 뒤에서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퍽!
그 직후, 소름이 가라앉는 것과 함께 그의 눈이 감겼다.
진천우의 손에는 객잔의 단단한 의자가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