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썰전(戰)! (2)
(102/210)
102화 : 썰전(戰)! (2)
(102/210)
102화 : 썰전(戰)! (2)
2022.02.23.
“참으로 재밌는 청년이군.”
백발노인이 허허롭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단순히 일어만 났을 뿐인데, 하마터면 뒤로 물러날 뻔했다.
‘분명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인데…….’
왜 그가 일어나자 순간, 태산만 한 거인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착각이 든 걸까?
무리도 아니었다.
“어르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어르신께서 나설 일이…….”
이곳 지부장인 제갈세형조차 극존칭으로 모시는 인물.
“괜찮다. 아니, 오히려 꼭 필요한 일이지. 가끔은 이렇게 젊은이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해야 세상 돌아가는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거든. 맹 구석에서 우리끼리 얘기해봐야 결국 그 얘기가 그 얘기라 머리가 굳거든.”
“허허허, 신안 어르신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아무렴, 나이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지.”
신안(神眼).
‘보통 인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진천우가 그 이명을 듣고 속으로 크게 놀랐다.
아마도 제갈세형은 일부러 자신에게 노인의 정체를 알려주기 위해 말을 건 게 분명했다.
행여나 상대에게 실수하지 말라고.
‘이거 또 빚을 졌군.’
확실히 둘의 사이는 미묘했다.
좋다 나쁘다를 나누면, 분명 나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사이.
그러나 진천우가 제갈세형에게 약초를 뜯으면, 그는 그 약초로 환단을 만들어 지부의 무인에게 배포했다.
그 환단으로 무인들이 공을 세우면, 절로 제갈세형의 명성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이렇게 진천우를 위해 편의를 봐주었다.
몇 번이나 말했듯 둘의 사이는 썩 좋지 않지만, 그들은 물고 뜯기는 천적이 아닌, 서로 가진 걸 하나씩 내주고 다시 되받는 공생관계와 같았다.
“어험! 아무튼, 자네가 저 청년을 제법 아끼는 건 알겠군.”
“네? 제가요?”
백발노인이 단상 아래로 내려오며 한마디 했다.
제갈세형이 곧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노인이 손에 쥔 나무 지팡이를 앞으로 겨누며, 이 이상의 지원은 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과연 맹에서 맹주 바로 아래인 세 명의 최상위 책사다운 눈치였다.
련의 만박자는 확실히 엄청난 명성의 책사지만, 련에 그와 동급의 책사가 열 명이나 되는 걸 생각하면 신안은 그보다 한 단계 위였다.
“자, 그럼…….”
본 맹의 좌 책사란 직책을 가진 자.
그리고 천하를 모두 뒤져도 그와 같은 머리는 다섯 손가락에 꼽을 거란 엄청난 기인.
그가 진천우의 앞에 섰다.
“자네는 분명 날 설득해보겠다고 했겠다?”
그리고 싸움을 걸었다.
무인이 칼과 주먹으로 실력을 겨룬다면, 책사는 오로지 혀로써 제 능력을 증명한다.
콰르르!
그때 갑자기 회랑이 무너졌다.
아니, 이는 착각이었다.
그러나 너무 생생한 착각.
‘이건?’
진천우의 눈에는 회랑뿐 아니라 주위 다른 이들도 모두 사라지고, 오직 신안과 자신만 남았다.
그들은 단둘뿐인 천 길 낭떠러지에 서서 서로 마주 보았다.
위아래 구분이 없는 똑같은 시선.
이는 백발노인이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진천우를 한 명의 대등한 책사로 바라본다는 뜻이다.
물론 그 시선이 언제까지고 이어지진 않을 거다.
“그럼 얘기해보게.”
신안이 나직이 진천우를 재촉했다.
만일 무인끼리의 비무였다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봐준 거겠지만, 책사끼리의 설전에서 선수를 점하는 건 조금도 봐주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바로 말꼬리를 잡힐 수 있었다.
즉, 백발노인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정면 승부를 펼치겠다는 소리.
“큭!”
진천우가 낮게 신음을 흘렸다.
이제 와서 터무니없는 거물과 겨루게 된 걸 후회하는 걸까?
당연히 그럴 리 없었다.
‘상대가 나보다 몇 수 더 위인 건 이미 알고 있다.’
하긴, 처음부터 자신은 패가 다섯뿐인데, 노인은 무려 패가 열 개였다.
이를 모르고 싸움을 건 것도 아니지 않는가?
맹의 좌책사?
그리고 맹의 최상위 책사 중 가장 뛰어난 안목을 지녀서, 신이 내린 눈이라 불리는 명성?
그것들 모두 확실히 대단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다면, 내가 먼저…….”
“아니!”
신안이 크게 선심 쓰듯 먼저 입을 열려 하자, 진천우가 바로 손을 들어 이를 저지했다.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굳이 상대의 배려를 받지 않겠다는 뜻.
‘어디 말꼬리를 잡으려면 잡아봐라.’
동시에 자신 또한 신안을 더는 높은 하늘로 보지 않고 대등한 책사로 보겠다는 소리였다.
“호?”
백발노인이 처음 진천우가 제 쪽으로 다가왔을 때처럼 주름 가득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재밌는 청년이로고.’
그래, 젊음이란 무릇 이래야지.
뻔히 달려가 부딪치면 깨질 줄 알면서도 아랑곳없이 돌진하는 맛이 있어야지.
그러나 모른다.
적어도 진천우는 절대 명성에 짓눌러 당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깨지긴커녕, 제 앞을 가로막은 벽을 산산이 부술 생각뿐이다.
그는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는……!”
그 순간, 두 번째 설전이 시작되었다.
* * *
“네?”
남자는 여전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물고기 대신 낚은 남자가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는지.
“제자요?”
“아, 다행이다!”
사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미 두 번 말했다.
세 번째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말 다행이다.
“그래, 대답은?”
“대답이라니…….”
“대답은?”
또 두 번째다.
과연 이것도 넘어갈 수 있을까?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알겠습니다.”
“오!”
넘어갔다.
정말 놀랍게도!
덕분에 사내의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남자가 사내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하나였다.
‘은혜는 갚아야 한다.’
은혜를 갚기 위해.
물론 마음 한편에는, 이 제안을 거절했을 시 사내가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는 눈앞의 사내가 조금, 아니 꽤 많이 무서웠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무서웠다.
뭔가 거리낌이 든다고 할까?
그럼에도 이건 말해야 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감히 자신의 제자가 되는 데 조건을 내밀어?
사내의 눈빛이 가늘게 변했다.
특별히 기세가 바뀐 것도 아닌데, 그것만으로 동굴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좀 더 무겁고, 단단해졌다.
만일 여기서 사내가 기분을 더 바꾸면 어떻게 될까?
더욱 무겁고 날카로워지겠지.
“네, 조건이 있습니다. 이를 수락해주지 않으면, 전 절대 당신의 제자가 되지 않겠습니다.”
‘이것 봐라?’
이쯤 되면 사내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내 존재를 어렴풋이 가늠하면서도 감히 조건을 내밀어?’
그리고 여전히 자신을 똑똑히 바라보며, 고개 숙이지 않는다고?
‘재밌군!’
정말 재밌다.
련에 그 많고 많은 짐승 중 이런 강단 있는 놈이 몇이나 될까?
아마 손에 꼽을 정도.
심지어 이놈은 아직 어떤 무공도 익히지 않았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걸 봐주는 것도, 녀석의 내건 조건이 무엇인지 들은 다음이다.
“조건이 뭐지?”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남자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여기서 더 주의해야 한다.’
상대는 결코 자신과 동등한 위치가 아니다.
결코, 들뜨지 말고 사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바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수락받아야 한다.
‘적어도 그는 제 입으로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겠지만, 반드시 해내야 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절대 쉽사리 꺾이지 않는 모습으로 한 자 한 자 천천히 제 조건을 말했다.
“……이상입니다.”
“그게 다인가?”
“그렇습니다.”
어차피 이 이상의 조건은 받아들여지지 않겠지.
그렇다면 여기까지가 최상이다.
천만다행으로!
“그 정도 조건이면 받아주지.”
“감사합니다!”
“감사하지 마라.”
덥석!
갑자기 사내가 남자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이리도 컸나?
그리고 이리도 우왁스러웠나?
여기서 사내가 조금이라도 힘을 더 주면, 남자의 머리가 터질지도 몰랐다.
허나 사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둘은 사제 관계다.
다른 곳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련에서 사제 관계는 아주 특별했다.
“제자는 사부가 하는 말에 무조건 따라라.”
그게 설령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거라도.
“자, 바로 수련을 시작하자.”
사내가 새 제자를 데려갔다.
이때도 머리가 터질 것 같지만, 남자는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에서 놀랍도록 청명한 바람을 느꼈다.
그건 어딘가 매우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느낌이었다.
비록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눈앞에 푸르게 빛나는 현판이 떠 있었다.
[‘당신’은 사용자와 주종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주종관계에서 주인은 일방적으로 하인의 스킬을 공유하는 반면, 하인은 그 충성도에 따라 주인의 스킬 중 일부를 공유합니다.]
[현재 ‘당신’의 충성도는 ‘??’입니다.]
아마도 남자가 영향받은 스킬은 ‘언변’.
하지만 그 영향은 전처럼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틀림없이 기억상실이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타이쿤은 이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 * *
“장자 왈,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지 나비가 내 꿈을 꾸는지…….”
[고사(大)]
“덕으로 다스리는 자는 번성하지만, 힘으로 다스리는 자는 망하는 법이지.”
[도리(大)]
“지금이야말로 련과의 관계가 중요한 시기라네.”
[시절(大)]
“큭!”
진천우가 얕은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과연 보통 상대가 아니다.
‘고사든 도리든 시절이든 대(大)가 아닌 게 없군.’
괜히 자신보다 두 배나 많은 패를 쥔 게 아니었다.
진천우도 열심히 노력했지만, 세 마디 중 간신히 한 마디만 받아치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두 마디나 밀려 이렇게 가슴을 움켜쥐어야 했다.
한편, 신안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정말 제법이군.’
어디 맹에 널리고 널린 책사 중 자신에게 한 마디라도 받아치는 자가 있었던가?
아무리 자신이 상대가 너무 큰 내상을 입지 않도록 봐주고 있더라도 이 성과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그래, 자네……. 학수선의의 사람이라고?”
“그렇습니다.”
진천우의 대답에 노인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신의와 척 진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제법 괜찮은 관계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오늘부터 학수선의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지도 몰랐다.
‘스스로 신의의 사람이라지만, 어쨌든 정식 제자는 아니지 않는가?’
당연히 신안은 학수선의의 성향을 모르지 않았다.
비록 정식 제자가 아니지만 신의가 제 사람을 얼마나 아끼는지 안다.
그러나 그 모든 걸 감수하고도, 눈앞의 청년은 매우 탐나는 인재였다.
어쩌면 정식으로 자신의 제자를 받아들여도 좋을 정도로.
‘물론 그건 자네가 내 시험을 통과한 다음의 일이지.’
신안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그는 지금부터 무언가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을 빛낸 건, 신안만이 아니었다.
‘음?’
팟!
진천우의 눈앞에 또 예고 없이 현판이 나타났다.
[스킬 ‘언변’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내가 언변 스킬을 올릴 일이 있었던가?
[당신의 언변 스킬을 누가 잠시 빌려 사용했고, 그 결과 숙련도가 말도 안 되게 상승했습니다.]
“뭐?!”
누가 내 스킬을 공유했다고?
그럴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현석이 이놈!’
어디냐!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 거냐!
이때, 신안이 진천우를 압박하기 위해 새 화제를 꺼냈다.
[도리(大)]
“아까 종리 선생이 말했지. 천하가 어지럽고. 이때야말로 민심을 사로잡아야…….”
허나 진천우는 이제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사용자의 언변 스킬의 숙련도가 한계치를 초과했습니다.]
[썰전의 새로운 기능이 추가 개방됩니다.]
‘새로운 기능?’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일단 손에 쥔 패가 하나 더 늘어 여섯이 되었다.
그런데 여섯 번째 패는 이때까지 패들과 때깔부터 달랐다.
도리가 녹색, 시절이 파랑, 고사가 붉은색이었다면, 여섯 번째 패는 하양.
그리고 거기 적힌 글자는.
[대갈]
곧바로 새 패를 골랐고, 패를 집자마자 갑자기 몸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용솟음쳤다.
진천우가 곧바로 입을 크게 벌려 그 기운은 토해냈다.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