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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 나의 신분은……. (88/210)


88화 : 나의 신분은…….
2022.01.22.


사실 처음부터 의아했다.

-다…… 단두…….

삼결 거지는 정철을 보고,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을 본 표정을 지었다.

그 직후, 개처럼 처맞았다.

‘설마 놈이 그리될 줄 모르고 의당에 몰래 침입했을까.’

그럴 리가.

처음 매듭을 받은 뒤, 두 번 더 매듭을 쌓아 올린 자다.

그 정도도 생각 못 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원래는 협개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겠지.’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정철이 급히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는 이유.

그건 그가 알려준 기밀 때문이었다.

-내가 여기 온 건 아주 중요한 정보를 지부장에게 알리기 위해서네.

천하제일의 정보단체로 알려진 개방.

당연히 그들은 구파일방의 한 축으로 맹에서 정보를 담당했다.

그런 개방이 이 시기에 급히 전달해야 할 기밀은 하나뿐이다.

갑자기 나타난 련(聯)관 관련된 소식.

정철이 알려준 기밀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선발대가 당했네.

여기서 선발대는 련에서 나온 무인들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 며칠 전에 지부에서 보낸 무인들을 뜻했다.

‘그들이 당했다고?’

당연히 지부에서 선발대를 보낼 때, 실력자를 엄선해서 보냈을 터.

그런 이들이 불과 며칠 만에 당했다니.

‘대체 련에서 얼마나 대단한 고수를 보냈기에?’

사실 맹의 선발대가 죽든 살든 진천우가 알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필 그곳으로 학수선의와 그 일행이 마차를 타고 떠났다.

아무리 신의가 벽을 넘은 무인이고 그 아래 다섯 의원이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지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쾅!

진천우는 바로 의당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는 자신이 아직 출입을 허가받지 않은 내당을 향해 달렸다.

“진 공자!”

정철이 그 뒤를 쫓았다.

“멈추시오!”

심각한 얼굴.

당연했다.

그는 단번에 진천우의 의도를 눈치챘다.

‘설마 이리 막무가내로 나갈 줄이야.’

“아까 말했듯, 그곳은 사지(死地)나 다름없소. 그런 곳에 후발대로 쫓아갈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소.”

정철은 끝까지 진천우를 염려했다.

어떻게든 그를 붙잡아야 하는데, 지금 몸 상태로 진천우를 뒤쫓는 것도 힘들었다.

‘아니, 내 몸이 멀쩡했어도…….’

정철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앞으로 뻗어나가는 진천우를 보며 눈을 치켜떴다.

역시 그는 맹의 새로운 희망이 될지도 몰랐다.

“진 공자!”

그러한 희망이 이대로 꺾이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정철이 목 놓아 소리쳤다.

그의 지극정성이 통한 걸까?

우뚝!

진천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다행히 아직 내당과 외당의 경계였다.

“진 공자! 후! 드디어 멈추었구려.”

덥석!

정철이 굳은 얼굴로 진천우의 팔을 붙잡았다.

이제 절대 그를 놓치지 않겠다.

헌데 진천우는 그 자리에서 꿈쩍하지 않고,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저분입니까?”

“응?”

정철의 시선이 진천우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그 직후,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왜 하필 지금!’

그제야 진천우가 갑자기 멈춘 까닭을 알았다.

지금 막 내당에서 일단의 무리가 외당으로 나왔다.

딱 보기에도 한 명 한 명 모두 범상치 않았는데, 그중 선두의 화려한 쪽빛 학사의 차림의 중년인이 가장 눈에 띄었다.

제갈세형.

이곳 지부장이었다.

성큼.

“웬 놈이냐!”

챙!

진천우가 그를 향해 걸어가자, 지부의 무인들이 그에게 검을 겨눴다.

“자네?”

그때 지부장을 따르는 무리에서 누군가 진천우를 알아보았다.

백풍대주 백청강.

“아는 사람인가?”

“……제 지인입니다.”

백풍대주는 어째서인지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진천우를 소개했다.

다행히 제갈세형은 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군.”

그가 손을 들자, 진천우에게 칼을 겨누던 무인들이 조용히 무기를 내렸다.

“안 그래도 자네에게 사람을 보내려 했네.”

제갈세형은 눈앞의 진천우가 아닌, 그 옆의 협개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개방의 정보력이 필요했다.

정철은 이 근방 모든 개방 문도를 지휘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지금 바로 후발대가 출발할 걸세. 그들과 함께 가줄 수 있는가?”

“당연히…….”

“저도 후발대에 넣어주십시오.”

진천우가 느닷없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갈세형이 얼굴을 굳혔다.

아무리 백풍대주의 지인이라 해도 그냥 넘어가 줄 수 없는 무례였다.

정철이 황급히 상황을 중재했다.

“지부장님께서는 부디 이 청년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그는 후발대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어째서?”

“그는 학수선의 님의 사람입니다.”

중재는 실패했다.

“신의의?”

갑자기 제갈세형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다른 이들도 다소 놀라는 분위기.

오직 백풍대주만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지?’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정철이 당황해하자, 제갈세형이 그 이유를 밝혔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어젯밤 내게 선발대가 당했다는 소식을 전한 뒤 바로 물러난 까닭에, 후속 소식을 듣지 못했겠군.”

“그렇습니다.”

원래라면 당연히 정철도 이들 무리와 함께 밤새 회의를 해야 했지만, 그는 제 수하가 몰래 의당에 숨어들었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 자리를 떴다.

그가 부재중인 동안, 충격적인 소식이 새로 들어왔다.

“학수선의가 실종되었네.”

“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정말이네. 신의는 물론이고 그와 동행한 다섯 의원도 한꺼번에 사라졌네.”

“설마 련에게 습격당한 겁니까.”

“그렇지 않네. 그들은 선발대가 대기하던 장소로 가던 중간에 마차를 버리고 사라졌네.”

“도대체 왜?”

“거기서부터는 우리가 아니라 자네들이 알아볼 일이지.”

맞는 말이다.

정보 수집은 개방의 일이었다.

허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학수선의가 어떤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진 건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정황상 신의가 선발대에게 향하던 중 겁을 먹고 달아난 것으로도 보일 수 있었다.

아니, 맹은 틀림없이 그리 볼 게 분명했다.

학수선의는 맹에 적이 많았으니까.

눈앞의 제갈세형 역시 은밀히 신의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그때, 그가 처음으로 진천우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방금 내게 후발대에 넣어달라고 했지?”

“그랬습니다.”

차분하게 답했지만,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꼬였다.

자신이 후발대에 들어가려 한 이유는 학수선의에게 무슨 일이 생길 걸 걱정해서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신의가 먼저 일을 저질렀다.

‘이러면 굳이 후발대에 들어갈 필요가…….’

우우웅!

그 순간, 제갈세형이 기세를 드러내 진천우를 압박했다.

제갈세가는 구파일방과 함께 맹을 지탱하는 또 다른 기둥인 오대세가의 일원.

비록 지모(智謀)로 너무 유명해져 버렸지만, 그 무력 또한 결코 다른 세력 못지않았다.

“뜬금없이 후발대로 넣어달라는 걸 보니, 선발대가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군. 이상한데? 그건 분명 맹의 기밀이었을 텐데?”

슥!

그가 어느새 백색 검을 꺼내 진천우의 목을 겨눴다.

“지부장!”

정철이 화들짝 놀라 앞으로 나서려는 걸, 제갈세형이 손을 들어 막았다.

“정철, 자네가 기밀을 누설했군.”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걸 정하는 건 자네가 아니네.”

“저는 제 행동을 추호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쯧!”

제갈세형이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이래서 협이란 종자는 당최 써먹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런 협도 제갈가의 지모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법.’

애초에 그는 진천우의 목을 칠 생각이 없었다.

선발대가 당한 소식은 반나절도 더 전의 정보로, 그만큼 기밀의 중요도가 대폭 떨어졌다.

그 정도를 들었다는 이유로 학수선의의 사람을 참수할 수는 없었다.

“지부장, 나 또한 그에게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거기다 정철에 이어 이곳 지부의 사람이 아닌 본 맹 소속의 백풍대주까지 저리 고개 숙여 부탁한다면 더더욱.

그러나 제갈세형은 처음부터 그 둘을 노렸다.

“그렇담 자네 둘과 백풍대원이 후발대와 함께해주게. 거기서 공을 세우면 이번 일은 불문에 부쳐주지.”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정철과 백풍대주가 동시에 답했다.

이를 본 제갈세형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덕분에 지부의 인력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백풍대주가 진천우를 제 지인이라 소개한 순간부터, 머릿속에 이렇게 진행되는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그림이 완성될 줄이야.

‘이자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백풍대주와 깊은 관계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낼 수 없지.

제갈세형이 진천우에게 겨눈 검을 치우고 수하를 불렀다.

“저자를 끌고 가게.”

“넷!”

자신은 분명 백풍대주와 정철이 후발대에서 공을 세워야 진천우의 일을 넘겨준다고 했다.

그러니 그때까지 놈이 달아나지 못하게 붙잡아둬야 했다.

“…….”

“…….”

백풍대주와 정철이 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이상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어쨌든 진천우는 학수선의의 사람.

맹에서 함부로 대하진 않을 거다.

그동안 자신들은 서둘러 후발대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된다.

참으로 안일한 생각이었다.

제갈세가, 아니 천하에 이름난 가문과 세력은 하나같이 집요하고 무자비했다.

아니, 반대로 그 정도로 철두철미하기에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왔군.’

제갈세형이 무척 기특하단 눈으로 진천우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한 번 그를 통해 백풍대주와 정철을 부렸으니 두 번, 세 번도 부릴 수 있었다.

게다가 진천우는 학수선의의 사람.

‘잘하면 놈을 통해 신의의 의술도 빼앗을 수 있겠군.’

제갈세형은 혹여나 자신의 탐욕이 겉으로 드러날까 경계하며 급히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잠깐.”

진천우가 그를 불렀다.

‘쓸데없는 애원인가?’

아니면 용서를 구하는 건지도 모른다.

정말 드물지만, 제 결정에 반항하며 달려들지도?

이후 진천우를 어떻게 이용할지 정하려면, 지금 놈의 태도가 어떤지 살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잠시.”

그런데 진천우는 기껏 제갈세형을 불러놓고, 그 뒤에 있는 지부의 무인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소매에 손을 넣었다.

이 상황에도 저런 여유를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미 대세는 정해졌다.

하지만 진천우는 끝까지 유유자적한 태도로 느긋하게 손과 입을 움직였다.

“제 죄목이 뭡니까?”

“맹의 기밀을 들은 죄라네.”

제갈세형은 스스로 말하고도 이유가 많이 빈약하다고 생각했는지, 뒤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특히 지금은 전시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니, 어떤 사소한 죄도 그냥 넘길 수 없지.”

“그렇군요. 확실히 기밀은 외부인에게 섣불리 알려서는 안 되는 것이고, 지금은 조금 특별한 상황이죠.”

“이해해 주니 고맙군.”

“그런데 말입니다.”

진천우가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는 다시 한번 지부의 무인들에게 눈짓으로 허락을 구한 뒤, 아주 천천히 소매에서 손을 꺼냈다.

순간 뇌물인가 싶었다.

소매 끝자락에서 영롱한 옥의 자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뒤, 제갈세형은 진천우가 꺼낸 물건을 보고 두 눈을 치켜떴다.

“그, 그건!?”

어째서 의당의 옥패가 저놈 손에!!

“이 패가 있는 이상, 저는 엄연한 의당의 일원. 그러니 부당한 처벌은 거부하겠습니다.”

제갈세형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허나 놈의 주장은 자신이 조금 전에 외부인이 맹의 기밀을 알면 안 된다고 한 말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의당은 본 맹에서 특별히 맹에 속한 것과 동등하게 인정하는 곳.

속이 쓰리지만 여기서는 진천우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착각했군. 그는 확실히 학수선의의 사람이다.’

천하에 비할 곳이 없다는 제갈세가의 지모로도 움켜쥐지 못했던 학수선의의 의(醫).

눈앞의 청년은 바로 그 학수선의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진천우는 학수선의보다 더했다.

“앞서 지부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여러모로 특수한 상황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학수선의 님과 그 아래 다섯 의원이 한꺼번에 사라진 심각한 상황!”

저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제갈세형이 가만히 듣다가, 불현듯 뭔가를 깨닫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서둘러 진천우의 입을 봉하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진천우가 크게 소리쳤다.

자신의 현재 신분을.

“그분들이 자리에 없는 동안 의당에 속한 이는 나뿐. 그러니까 내가 현재 의당의 책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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