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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 전쟁의 조짐 (80/210)


80화 : 전쟁의 조짐
2022.01.03.


“음?”

현판이 알려준 대로 고개를 숙이자, 발아래 조그만 구슬이 보였다.

아무리 봐도 혼탁해 보이는 낡은 구슬인데…….

‘이게 어째서 초월 달성의 보상이란 거지?’

의아했지만, 진천우는 일단 타이쿤을 믿으며 손을 아래로 뻗었다.

구슬을 집자 현판에 설명이 떴다.

[혼원옥(混元玉)]

‘혼원?’

우주의 기운이 담긴 구슬이라니, 쓸데없이 광오한 이름.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설명을 보니 제법 그럴듯하단 생각이 들었다.

[혼원옥은 하오문의 후계자 증표 중 하나입니다.]

[하오문은 다섯 장로가 각자 한 개씩 혼원옥을 보관하며, 이를 자신이 지지하는 후계자에게 넘겨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누군가 다섯 개의 혼원옥을 모두 모으면, 그 자리에서 현 하오문주와의 대결을 통해 다음 대 하오문주 자리를 이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 볼품없는 구슬이 하오문의 후계자 증표라니?!

하지만 그 사실을 알자, 진천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당연했다.

자신은 하오문 장로의 인정을 받아 혼원옥을 손에 넣은 게 아니다.

‘만일 이 사실을 다른 하오문도에게 들키면…….’

그때, 현판에 또 새 설명이 추가되었다.

[어느 단체든 이 정도 의미 있는 물건을 도난당하면, 그 순간부터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지옥 끝까지 쫓아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하오문은 태생부터 도적들의 문파. 오히려 장로에게서 구슬을 훔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혼원옥의 획득 방법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꺼림칙했지만, 계속 이어지는 설명에 진천우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혼원옥은 후계자의 증표일 뿐 아니라, 하오문의 정보망 이용에도 쓰입니다. 당연히 그 등급은 장로와 동급입니다.]

‘이걸로 하오문의 정보망을 쓸 수 있다고?!’

무림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집단은 단연코 개방(丐幫)이다.

-천하에 거지가 없는 곳이 없으니, 개방의 눈과 귀를 피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같은 격언을 삼척동자도 알 정도이니,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정보망이 얼마나 뛰어난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오문은 이 개방과 쌍벽을 이루는 무림의 양대 정보단체로 불린다.

하오문은 도적뿐 아니라 기녀와 점소이, 마부 등 온갖 인간군상이 모인 집단.

그 덕에 그들 역시 개방에 지지 않은 정보력을 지녔다.

더군다나 기녀는 술자리에서, 점소이는 밥 먹고 잠자는 곳에서, 마부는 이동하는 내내 귀를 쫑긋 세우니, 어떤 면에서는 개방을 뛰어넘는 수완을 보였다.

그래서 개방은 정보의 다양성에서, 하오문은 정보의 은밀함에서 서로 최고로 불렸다.

‘그런 하오문의 정보망을 사용할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운 보상.

확실히 혼원옥은 초월 달성의 보상으로 부족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진천우가 혼원옥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건 또 아니었다.

현판 맨 아래에는 혼원옥 사용시 주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혼원옥을 사용하는 순간, 사용자는 하오문의 후계자로서 모든 하오문도에게 주목받는 존재가 됩니다.]

[따로 정체를 숨기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하오문을 상대로 완벽히 정체를 숨기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혼원옥을 사용하는 순간, 사용자가 혼원옥을 훔쳐 얻은 것처럼 다른 하오문의 후계자들이, 혹은 꼭 그들이 아니더라도 모든 하오문도들이 혼원옥을 다시 빼앗기 위해 달려들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겁군.’

그 순간, 손에 쥔 자그마한 구슬이 실로 무겁게 느껴졌다.

어떤 의미로는 무섭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두려워할 수만은 없지.’

진천우가 아주 살짝 입꼬리를 비틀며, 혼원옥을 소매 안에 갈무리했다.

애초에 그의 머릿속에 혼원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무섭지만, 필요한 순간이 오면 망설이지 않고 쓴다.

진천우는 그때가 언제일지 헛갈리지 않기로 다짐하며, 구슬을 더욱 소매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소가주님!”

잠시 뒤, 자신이 시킨 두 개의 지시를 완벽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해낸 현석이 돌아왔다.

“정말 잘했다!”

진천우는 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특히 자신 때문에 사용한 축제 음식과 기념품 값을 배로 쳐 주었다.

“아닙니다. 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그게 얼마나 한다고…….”

“무려 네놈의 한 달치 월봉이지. 내 지시로 그만한 돈을 썼으니, 당연히 내가 보상해야지. 그러니 걱정 말고 이 돈을 받거라. 돈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내게 그것의 열 배도 넘는 돈이 있으니까.”

“네?! 소가주님께서 어째서 그리 많은 돈을?!”

현석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씨세가를 떠날 때 가모님께서 따로 돈을 챙겨주는 것까진 봤지만, 그 자그마한 주머니에 그만큼이나 들어있었나?

“하하, 뭐, 그렇게 됐다. 그보다 축제 안내나 하려무나. 구운 떡이랑 당과 파는 데가 어디지? 너는 가봤으니 알 것 아니냐?”

진천우가 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자신이 소매치기당한 일과 소매치기한 일을 굳이 현석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아, 물론입니다! 지금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다행히 변명이 잘 먹혔다.

아니, 현석이 일부러 먹어주었다.

녀석은 절대 자신이 곤란해할 일을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정말 필요한 일이면, 반드시 진천우가 먼저 말해줄 거라 믿으니까.

‘녀석!’

그 깊은 배려가 고마웠다.

‘다음에 정말 준비가 되면…….’

진천우는 언젠가 때가 되면 현석에게 타이쿤에 대해 알려주리라 다짐했다.

“소가주님! 이쪽입니다. 이 골목 뒤에 당과 가판이 있습니다. 떡집은 그 옆이고요!”

“알겠다.”

진천우는 현석이 부르는 목소리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한껏 축제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둘이 객잔으로 돌아갔다.

“왔느냐? 조금 늦었군.”

객잔 입구에 학수선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천우가 그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정확히는 학수선의와 그 뒤에서 분주히 짐을 싸는 다섯 의원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날이 졌는데, 왜 다시 짐을 싸는 거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런 불안은 적중했다.

“우린 이제 곧 이 마을을 뜰 거다. 너도 바로 채비를 해라.”

“네? 벌써요?”

“그럼 한나절이나 쉬었으면 됐지. 얼마나 더 쉴 생각이었더냐?”

“아니…….”

보통 객잔까지 잡으면 하루쯤 쉬는 게 정상일 텐데?

그게 아닌가?

진천우는 자신의 상식이 이상한지 혼란스러웠다.

그러자 학수선의가 떠나는 이유를 알려주었다.

“오늘치 약을 다 팔았다.”

“잘된 일이군요.”

그게 떠나는 이유?

학수선의에게는 충분하고도 남을 이유였다.

그것도 몇 번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내일 동이 트면 난리가 날 것이다.”

“난리?”

“그래, 우리가 판 약은 너무 뛰어나니까.”

그거야 당연한 일.

무려 당대 제일 의원으로 불리는 학수선의와 그 밑에서 수학하는 다섯 의원이 조제한 약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더 가치 있는 약이다.

그런 걸 이런 변방 마을 축제에서 동전 한 닢에 팔았으니, 어디 난리만으로 끝날까.

“그게 문제라는 거다. 그 덕에 내일부터는 우리 소문을 듣고 환자가 아닌 놈들이 찾아올 테니까.”

“아!”

그제야 진천우도 상황을 이해했다.

학수선의는 결코 자선으로 약을 판 게 아니었다.

그가 약장수 행세를 한 건 어디까지나 의원으로서 다양한 환자를 만나기 위한 일환.

그런데 뛰어난 약의 효능을 듣고 환자가 아닌 이상한 잡것들이 달려들면, 다양한 환자를 보기는커녕 자칫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단순히 잡것들 때문만이 아니다. 애초에 그깟 것들이 한 수레로 달려들어도 순순히 당할 만큼 내가 이놈들을 허투루 가르친 것도 아니니까.”

“그러면?”

또 다른 이유?

“우리가 내일 또 약을 팔면 그 잡것들이 약을 사간 환자를 해코지 할 수 있으니까. 아쉽게도 우리 손은 한정돼 있어서 그런 일까지 모두 처리할 수는 없으니, 결국 우리가 떠나야지.”

“그렇군요.”

진천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의 눈빛이 조금 은근해졌다.

살짝 게슴츠레하고 능글능글한 것이, 마치 은신 스킬의 새 기능인 감은 눈이 발휘된 것 같았다.

이를 눈치챈 학수선의가 차갑고 날렵한 얼굴을 옆으로 크게 비틀며 소리쳤다.

“이제 우리가 떠나는 이유는 충분히 들었을 테니 얼른 네놈도 가서 짐을 꾸리거라!”

-의원은 언제나 살릴 수 있는 환자와 그러지 못하는 환자를 구분해야 한다.

-그 때문에 의원은 누구보다 냉정해야 한다.

-아마 우리 의원은 죽으면 극락은커녕 무조건 지옥에 떨어질 거다.

학수선의가 의술을 가르치기 전에 각오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런데도 너는 정말, 이 뭐 같은 의원 짓을 하려 하느냐?

“그러겠습니다.”

진천우가 입꼬리를 살짝 비틀며 그때와 똑같이 답했다.

그런 뒤, 그는 서둘러 현석과 함께 짐을 챙겼다.

“쳇!”

학수선의가 살짝, 정말 아주 살짝 얼굴을 붉히며 혀를 찼다.

“손님!”

한참 진천우가 짐을 꾸리는데 웬 아이가 다가왔다.

“차랑 간단한 다과를 준비했는데, 좀 드시겠어요? 주인 어르신께서 방값도 다 치르셨는데 묵지 않고 떠나신다고 해서 급히 준비하셨답니다.”

“넌?”

어린 점소이인데 어쩐지 낯이 익다.

‘소매치기하다 내게 걸린 그 꼬마군.’

정말 객잔 점소이로 고용됐구나.

이 녀석도 잘됐는지 살짝 걱정됐는데, 떠나기 전에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잘 마시마.”

“넷, 그럼 전 다른 분들께도 차를 전해야 해서요.”

어린아이는 객잔 주인에게 배운 예의 바른 자세로 인사를 올리고, 바로 다른 손님에게 향했다.

후룩!

진천우는 다갈색 차를 가볍게 한 모금 머금고 다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얼마 뒤 그와 그 일행은 야음을 틈타 객잔을 떠났다.

다음 날, 과연 학수선의의 예상대로 마을에 그의 약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 몰렸지만, 이미 떠난 의원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 * *

“도착했군.”

학수선의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 끝에 으리으리한 건물 수 채가 보였다.

어느 대문파 못지않은 크기와 웅장함.

놀랍게도 이리도 대단한 건물이, 본맹도 아닌 그저 맹의 지부 중 하나라니!

‘그래도 드디어 도착했다.’

진천우가 땀을 뻘뻘 흘리며 기뻐했다.

잠시 잊었다.

기껏 사로잡은 도적을 관에 넘겼으니, 여기까지 오는 데 또 직접 달구지를 끌어야 했다.

물론 허무하게 기력만 소모한 건 아니었다.

[체력이 꽤 상승했습니다.]

[근력이 꽤 상승했습니다.]

굳이 타이쿤이 알려주지 않아도, 오는 며칠 동안 체력과 근력이 눈에 띄게 올랐다.

하지만 당장은 체력이고 뭐고 그냥 푹신한 침상에 몸을 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학수선의도 그런 진천우의 마음을 꿰뚫었다.

“뭐, 좋다. 며칠간 고생했으니 지부에 들어가면 하루 정도 푹 쉬어라.”

와아아!!

진천우뿐 아니라 달구지를 끈 다른 의원들도 환호를 질렀다.

그런데 이들의 함성은 지부 근처로 다가갈수록 사그라졌다.

아니, 나중에는 숨소리마저 참게 되었다.

철컹철컹!

쇳소리?

커다란 문 너머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다급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학수선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신의님?!”

지부의 입구를 지키던 백색 무복 무인이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인사는 됐고, 무슨 일이 벌어졌지?”

본래라면 결코 말할 수 없는 일급비밀이나, 학수선의의 신분은 맹의 장로와 동급.

무인은 그 즉시 오늘 낮에 벌어진 초유의 사태에 관해 설명했다.

“련(聯)에서 일단의 무인이 아무 예고도 없이 이곳으로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무엇이?!”

설마 맹(盟)과 련(聯)의 전쟁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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