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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 신의의 가르침 (2) (70/210)


70화 : 신의의 가르침 (2)
2021.12.11.


“도착했군.”

학수선의가 진천우를 데려간 곳은 의원 연합 구석의 허름한 창고였다.

화려하고 단단한 보물고와는 너무 대조적인 장소.

‘여긴 평범한 기록실일 텐데?’

진천우도 의원 연합을 박살 낼 때, 여기를 훑었다.

이 안에 든 것은 청, 적, 황 세 의원이 그간 환자를 진료하며 쓴 기록뿐이었다.

‘혹시나 이 중 다른 의원의 기록이 섞여 있는 건가?’

영 엉뚱한 생각은 아니었다.

장가 놈 같은 돌팔이도 운 좋게 의선의 요상절초 십팔수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래도 인근에서 제일 명의로 불리는 청 의원이면 혹시 또 몰랐다.

“아쉽게도 여기 있는 기록은 전부 그 세 잡것들 것밖에 없다.”

그러나 학수선의가 어떻게 진천우의 생각을 읽었는지, 단숨에 그의 기대를 박살 냈다.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실망감 때문인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이를 본 신의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으로 진천우의 등짝을 후렸다.

짝!

깜짝 놀랄 만큼 큰 소리에, 척추가 절로 곧추세워졌다.

얼얼한 통증이 한 박자 늦게 전신에 퍼졌다.

진천우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짓입니까?”

“눈앞에 금은보화보다 귀한 보물이 있는데, 이를 모른다면 소경과 다를 게 뭐냐? 그래도 내가 의원이라고 네놈에게 딱 맞는 약을 처방해줬으니 고맙게 생각해라.”

학수선의가 뜻 모를 말을 하며, 기록실 구석에 쌓인 낡은 책 무더기를 들었다.

그는 그대로 가까운 탁자에 앉아, 손에 든 기록을 빠르게 훑었다.

파라락!

훑는 속도도 엄청났다.

“…….”

신의는 입을 닫고, 두 눈에 핏발이 설 만큼 책에 집중했다.

진천우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보물?’

분명 학수선의 스스로 여기 있는 기록 전부가 세 의원의 것이라고 했다.

그들과 신의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압도적인 격차가 존재했다.

‘그런데도 저 기록을 저리 집중하는 걸 보면, 여기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호기심에 바로 옆에 놓인 책자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음…….’

빠르게 살펴봤지만, 역시 크게 대수롭지 않은 내용이었다.

대충 그날 어떤 증상의 환자가 왔고, 이를 어떤 식으로 진료, 처방했다는 기록.

좀 더 자세히 살펴도, 이후 어떻게 병세가 호전됐는지 또는 어떻게 진료를 잘못해 환자가 잘못됐다 정도였다.

물론 잘못 진료한 기록은 정말 손에 꼽았다.

‘세 의원의 실력을 생각하면, 틀림없이 실수한 기록을 삭제한 게 분명하군.’

슥!

그런데 진천우가 막 손에 쥔 서책을 다시 책장에 꽂으려 할 때, 학수선의가 소매에서 예의 얕은 책자를 꺼냈다.

여기 오기 전에 점소이와 산적을 시켜 가져오게 한 바로 그 정체불명의 책자.

사실 저건 신의가 일부러 진천우가 둘을 쫓도록 판을 짤 때, 그의 시선을 뺏기 위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진천우의 시선은 얕은 책자에 꽂혔다.

사람의 심리가 이리도 오묘하다.

학수선의가 막 책자를 펼치려다, 제 쪽을 향한 시선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이게 궁금하느냐?”

“…….”

진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겪어본 바로 신의의 성격이 보통 괴팍한 게 아니었다.

거짓 없이 궁금하다고 말하면 어떤 헛소리를 해댈지 두려웠다.

허나 그는 뜻밖에 먼저 손에 든 책자를 제 쪽으로 내밀었다.

“정 궁금하면 먼저 내용을 살펴도 좋다.”

“정말 괜찮습니까?”

“아무렴, 이게 뭐 대단하다고.”

진천우가 조심스럽게 책자를 넘겨받았다.

그 뒤, 책자를 펼쳤다.

“…….”

“어떠냐? 별 내용 없지?”

정말 그랬다.

학수선의가 그리 애지중지하길래 뭔가 대단한 내용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것도 그냥 평범한 의술 기록이었다.

어느 날 고뿔 환자가 찾아와 어떤 진료를 했는지 같은.

이때 진천우는 몰랐다.

그 순간, 학수선의가 탁자 아래로 몰래 주먹을 움켜쥐고 있단 사실을.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진천우의 머리를 언제든 후려칠 수 있게 준비했다.

그러나 그가 바로 주먹을 출수하지 않은 건, 자신보다 한발 먼저 진천우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손을 내민 이유는 학수선의의 대갈통을 후려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잠시…….”

진천우가 손을 내밀어 펼친 책자를 다시 탁자 위에 놓고, 즉시 몸을 돌렸다.

그는 바로 조금 전에 자신이 잠시 살폈다 돌려놓은 청 의원의 기록을 찾았다.

분명 여기에도 고뿔 환자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진천우는 그 외에 적 의원과 황 의원의 기록도 가져왔다.

고뿔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나 언제든 걸릴 수 있지만, 그만큼 치료하기도 쉬운 병이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기록에는 일체 거짓이 없고, 그 자료도 끝없이 방대했다.

‘그런데 이 서책의 내용과 청 의원, 적 의원, 황 의원의 기록 모두 전부 처방이 다르다.’

하지만 여기 적힌 환자는 모두 완쾌했다.

하나의 병이지만 다양한 처방.

거기에는 분명 잘못된 진료도 있겠지만, 그것에 대한조차 아주 귀중한 기록이었다.

“장중경을 아느냐?”

“의성(醫聖)?”

“그래, 아주 잘 아는군.”

후한의 의원 장중경(張仲景)은 상한(傷寒)이란 병에 걸린 백여 명이 각각 어떻게 발병했고, 이에 의원들이 어떻게 진료했는지, 그중 뭐가 잘못된 진료였고, 이후 용태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아주 상세히 기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은 의선(醫仙) 화타조차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책”이라며 감탄할 정도였고, 이후 그의 기록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의원의 지침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청, 적, 황 의원처럼 모든 면에서 부족한 이들마저 반드시 따로 진료 기록을 남기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훗!”

학수선의가 기쁜 듯 콧노래를 부르며, 탁자 아래에 숨긴 주먹을 풀었다.

“네놈이 꽤 고명한 이의 의(醫)를 전수받았음을 내 진작부터 알아봤다.”

그렇기에 지금껏 계속 주시했고, 또 틈틈이 시험했다.

이미 의원 연합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어설픈 의술은 멍청한 무뢰배들의 칼보다 더 많은 사람을 상하게 한다.

그 또한 똑같이 가슴에 의를 품은 사람끼리 상대가 자칫 어긋나게 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가늠했다.

다행히 그 결과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몇 가지 간단한 선문답뿐.

“의원이란 무엇이냐?”

“병을 고치는 이입니다.”

“그럼 의원에게 선악이 필요하느냐?”

“전혀 필요 없습니다.”

진천우가 단호히 답했다.

그는 지금껏 누구보다 제 천형을 치료할 의원을 갈구했다.

그때, 의원의 선악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다!”

허나 학수선의는 그 답을 부정했다.

어째서?

설마 그는 의원은 반드시 선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걸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진천우는 다시 한번 단호히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신의는 답은 예상과 달랐다.

“의원은 악(惡)해야 한다. 그리고 독(毒)해야 한다. 의원은 그 누구보다 악독(惡毒)해야 한다. 그러니 어찌 선악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으랴!”

그는 제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선문답(禪問答)은 단순히 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질문과 답을 통해 깨달음을 전수하는 것.

학수선의의 깨달음이 진천우의 머리를 강타했다.

“의원은 절대 다정다감할 수 없다. 오히려 냉혹무비해야 한다. 그 이유를 아느냐?”

“살릴 자와 못 살릴 자를 구분해야 하기 때문입니까?”

“바로 그렇다!”

“아아!”

쾅!

머릿속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동시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대오각성(大悟覺醒)은 꼭 무인만 겪는 현상이 아니었다.

기존의 상식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새로운 체계가 정리된다면 의원도, 아니 점소이도, 마부도, 장사꾼도, 산적도 상관없이 누구나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신의는 깨달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렸다.

진천우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날이 밝은 후였다.

“!?”

그는 시야가 회복되자마자, 눈앞을 막은 현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스킬 ‘침술’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스킬 ‘약학’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습니다.]

……

모든 의술 관련 스킬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다.

허나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재 소유한 모든 ‘의술’ 스킬이 한계치에 임박했습니다.]

[이후,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초급’ 단계에서 ‘중급’으로 승급이 가능합니다.]

‘승급?’

그동안 하나의 스킬을 얻으면, 이후부터는 숙련도만 올리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승급이란 새로운 단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게 눈앞에 있는 학수선의 덕분이었다.

“그걸로 만족하느냐?”

“네?”

“그걸로 만족하냐고 물었다.”

신의가 가볍게 주먹을 들었다.

마치 이대로 만족한다고 답하면, 바로 뒤통수를 날려버리겠다는 양.

진천우가 슬며시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게 신의 나름의 배려란 걸 알았다.

슥!

그는 곧바로 학수선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허리를 숙이고, 몸도 숙이려 했다.

“됐다!”

그러나 신의가 이를 말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진천우의 몸을 감싸, 허리 아래로 숙이지 못하게 막았다.

“나는 따로 제자를 키우지 않는다.”

자신이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려 한 걸 들켰다.

하지만 구배란 반드시 사제 간의 예법이 아닌, 큰 은혜를 입은 은인에게도 할 수 있는 법.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구배를 거부했다.

자신에게 구배를 올리려는 이는 진천우가 아니어도 산처럼 쌓였다.

그런데도 그가 한사코 그 모두를 거부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신의는 자신에게 배움을 구하는 이를, 제자와 아닌 자로 나누지 않고 그 모두에게 자신이 가진 기술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허나 이를 알지 못하는 멍청이들은 그저 학수선의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탓했다.

적어도 그의 아래에 있는 다섯 의원은 달랐다.

누구보다 출신이 미천한 이들이 가장 뛰어난 의원이 된 것은 그딴 쓸데없는 허울에 매달리지 않고 뚝심 있게 신의의 뒤를 쫓으며 그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인 덕분이다.

학수선의는 진천우 또한 그러길 원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

이놈만은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단 걸 신의 또한 느꼈다.

‘그러나 어쭙잖게 재주를 가진 놈들은 자칫 천하의 재앙이 되기도 하는 법.’

이를 막기 위해선 어느 정도 적절한 안내가 필요했다.

신의는 본래 이런 걸 아주 귀찮아하지만, 이번만은 자신이 맡기로 했다.

그러려면 맨 먼저 저 작은 몸에 틀어박힌 거대한 재능을 제대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보기에 지금 진천우의 몸은 언제 터질지 모를 위험한 폭탄이었다.

‘우선은 침과 약으로 체질 개선을 해야겠군.’

확실히 그의 몸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학수선의가 본 폭발할 것만 같은 기운은 그의 몸을 짓누르는 천형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더욱 크고 강대한 것.

신의는 진천우가 지닌 정체불명의 힘인 타이쿤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이는 절대 진씨세가 같은 변방의 소가문으로는 다 품을 수 없는 재능.’

어디 변방뿐일까?

설령 진가가 한 성의 패자였다 해도 제대로 담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학수선의는 진천우에게 그 어떤 강한 재능이라도 무리 없이 품어줄 수 있는 드높은 장소를 소개하려 했다.

“날 따라오너라.”

“어디로?”

어디긴 어디겠는가!

천하를 삼분한 거대 세력.

그중 학수선의가 현재 몸담은 곳.

맹(盟).

“맹으로!”

학수선의가 두 눈을 반짝이며, 황무지에서 발버둥 치는 어린 용의 손을 붙잡았다.

맹이란 천하에서 가장 큰 바다.

허나 그 바다는 이놈 말고도 이미 수십 마리의 기룡(奇龍)과 괴룡(怪龍)이 노닐고 있었다.

‘솔직히 무작정 데려간다고 이놈이 거기서 멀쩡히 승천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어쩌면 다른 용들에 치여, 차라리 진흙탕을 뒹구는 것보다 못한 신세가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건 신의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과연 네가 그곳에서 어떻게 승천할지 기대되는구나.’

그가 할 일은 오로지 기대하는 일.

‘……어쩌면?’

게다가 학수선의는 자신의 기대가 그리 허황되지만은 않다고 진실로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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