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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 화후의 내단 (49/210)


49화 : 화후의 내단
2021.10.23.


“……!?”

진천우가 제 몸을 끌어안자 흑의 여인이 두 눈을 치켜떴다.

당장 밀어야 한다.

둘 다 죽을 필요는 없으니까.

어차피 자신은 지금이 아니어도 그리 오래…….

“큭!”

아쉽게도 그녀는 곧 정신을 잃었다.

생각보다 훨씬 상태가 좋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함께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끼긱!

아, 셋.

분명 따로 쳐냈는데, 힘이 부족했는지 화후도 같이 딸려왔다.

사람 둘에 짐승 하나가 한데 뒤엉켰다.

끼이긱!

“닥쳐!”

진천우가 흑의 여인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지금은 이 원숭이를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휙! 휙휙!

주위의 모든 게 빠르게 솟구쳤다.

‘아니, 우리가 빠르게 떨어지는 거겠지.’

이 순간만은 절벽이 까마득히 높아서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벌써 곤죽이 됐을 테니까.

‘이대로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

하지만 뭘 어떻게?!

꽈악!

진천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낭떠러지를 향해 곧바로 찔렀다.

퉁!

기껏 뻗은 손이 절벽에 닿자마자 튕겨 나갔다.

그대로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였다.

그나마 중수 샘에 팔을 담그며 강화했기에 이 정도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예 통째로 뜯겨나갔을 거다.

끽! 끼긱!

이를 본 불 원숭이가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마치 뭐 하냐? 더 열심히 살 방법을 강구해라! 이대로 다 죽을 셈이냐! 하고 떠드는 것 같았다.

아니지. 영물인 이놈은 틀림없이 그리 말하는 게 맞을 터.

“웃기지 마라. 살고 싶으면 네놈도 뭐라도 해!”

휙!

진천우가 성을 내며 제 등에 들러붙은 화후를 떼냈다.

녀석은 홀로 떨어지면서, 그를 향해 어떻게 네놈이! 같은 생각도 못 한 배신을 당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화후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어째서 배신당했단 생각을 하는지도 의문이다.

어쨌든 진천우는 아직 원숭이를 배신하지 않았다.

“뭐해! 당장 팔을 뻗어서 넝쿨을 잡아!”

우끽?!

놀란 화후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제 바로 옆에 넝쿨이 보였다.

하필 넝쿨 색이 회색이라 가까이서 보지 않았으면 알아채기 힘들었다.

영물인 자신도 못 알아본 넝쿨을, 저 수컷이 어찌?!

일단 의문은 나중에.

지금은 살고 봐야 한다.

우키긱!!

우득!

넝쿨을 붙잡자, 벽면에 붙은 줄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왜 넝쿨 색이 회색인지 알겠다.

절벽 밑 그늘진 곳에만 넝쿨이 있어, 벌써 반쯤 말라 죽은 상태였다.

지금도 가볍게 건드렸을 뿐인데 줄기가 으스러졌다.

끼긱!

하지만 자세한 건 알 바 아니었다.

설령 절벽에 붙은 넝쿨이 다 떨어져도 자신은 살아야 했다.

다행히 회색 넝쿨이 뜯기는 만큼, 떨어지는 속도도 차츰 줄었다.

우수수!

또 넝쿨 한 뭉텅이가 떨어졌다.

그런데 그게 주위에 남은 마지막 넝쿨이었다.

여전히 바닥까지 까마득한 높이.

이대로는 안 된다.

여기서 살려면 뭔가 다른 방법을 취해야 했다.

그래, 예를 들면, 지금 한 손으로 제 발목을 잡고 물어진 두 인간을 떨쳐내면 좀 더 살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왼쪽으로 던진다. 저쪽에 아직 넝쿨이 남아있다.”

휙!

우끽?!

화후의 생각을 읽은 걸까?

뭘 시도할 틈도 없이 갑자기 또 내던졌다.

그런데 정말 왼쪽에 또 다른 넝쿨이 보였다.

화후가 서둘러 그것들을 뜯었다.

그리고 그만큼 또 떨어지는 속도가 줄었다.

우끽!

불 원숭이가 신이 나서 다음을 재촉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것들을 떼놓지 않고 함께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휙!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진천우가 또 화후를 내던졌다.

정면에 넝쿨이 보였다.

헌데 그 양이 너무 적었다.

겨우 저 정도 양으로는 아주 한순간밖에 멈출 수 없었다.

화후는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을 추슬렀다.

역시 주위에 다른 넝쿨은 없었다.

저걸 뜯고, 바로 또 방향을 틀 생각인가?

그거라면 어쩔 수 없다며, 녀석이 넝쿨 쪽으로 손을 뻗었다.

으드득!

이번에도 넝쿨이 빠르게 뜯기고, 정말 일순이지만 떨어지는 게 멈췄다.

휙!

그 직후, 사람 크기의 큰 덩어리가 오른편으로 날아갔다.

놀랍게도 그 방향에 안으로 살짝 들어간 동공이 보였다.

저기 들어가면 필시 한숨 돌릴 수 있을 터.

불 원숭이가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발목이 너무나 가벼웠다.

곧바로 놈이 사태를 파악했다.

끽!

인간, 날 배신했구나!!

처음부터 저놈은 저 위치에 동공이 있단 걸 알고 자신을 이용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더는 자신이 필요 없자 미련 없이 버리고 달아났다.

덥석!

진천우가 간신히 한 팔로 동굴 입구를 붙잡았다.

부서진 팔은 혼절한 흑의 여인을 안고 있었다.

어떻게든 한 손으로 두 사람분을 끌어올려야 했다.

정말 금지에서 몸을 단련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부르르!

순간적으로 너무 강한 부하를 받은 오른팔이 사시나무 떨듯 요동쳤다.

허나 이 팔은 좀 더 버텨 줘야 했다.

아직 짐승 하나 분을 더 지탱해야 했으니까.

“놓치지 마라!”

휙!

진천우가 매달린 채 발을 휘둘렀다.

가만 보니 그의 발에 뭔가가 묶여 있었다.

청기와 백기를 묶어 만든 끈.

언제 이런 걸 만들 걸까?

당연히 화후에게 넝쿨을 잡게 하며 떨어지는 와중.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각해낸, 셋 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끼긱?!

넝쿨 줄기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며 배신감과 절망,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화후는 제 쪽으로 날아오는 구명줄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줄 끝에는 맨 처음 떨어지면서 주먹을 뻗어 움켜쥐었던 돌이 묶여 있었다.

그 덕에 줄은 낭떠러지 아래서 솟구치는 강풍에도 날아가지 않고 불 원숭이를 향해 똑바로 날아왔다.

끼이익!

화후가 힘겹게 구명줄을 붙잡으며 생각했다.

이 인간은,

이 인간은 어쩌면 믿을 수 있다고!

끼이이익!!

“지금 나도 한계 직전이니까, 발버둥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그 말대로.

우득!

이미 진천우의 남은 한 팔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서졌다.

줄을 묶은 발도 떨어지는 놈의 무게에 박살 났다.

그런데도 그가 견딜 수 있던 이유는, 남아있는 내공을 모조리 사용해 역근경과 화후기식법을 운용한 덕분이었다.

끽!

화후도 그 사실을 알기에, 진천우의 말에 완전히 복종했다.

녀석은 천을 움켜잡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크윽!”

진천우가 다시 팔에 힘을 주었다.

으드득!

한번 부서진 뼈가 다시 부서지고 아예 가루가 되는 아득한 고통에도 그는 정신을 잃지 않고, 오로지 올라가는 것만 생각했다.

휙!

마침내 자신과 흑의 여인, 마지막으로 불 원숭이까지 안전한 장소로 올리자, 이제 더는 견딜 수 없었는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끼이익!!

화후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생각했다.

역시 인간은 믿을 수 없어!!

녀석이 그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꽉!

지금 제 목에 인간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박혔다.

인간 암컷이었다.

진천우가 기절하고 한참 뒤 그녀가 눈을 떴다.

금방이라도 다시 쓰러질 듯 창백한 인상이었는데, 이때 불 원숭이는 이 둘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고 있었다.

어쨌거나 은혜를 갚는 건 인간, 짐승 할 것 없이 당연한 일.

놈은 인간 암컷에게 잘 일어났다고, 넌 무공이 높으니 어서 빨리 몸을 추슬러 우리 모두를 낭떠러지 아래든 위로든 올려달라고 몸짓 발짓했다.

그러나 그녀는 몽롱한 얼굴을 잠시 찌푸리더니, 대뜸 화후의 목덜미를 물었다.

꿀꺽! 꿀꺽!

거기다 피까지 빠는 게 아닌가?

설마 이년은 박쥐 인간인가!

반항하려 했지만, 녀석도 너무 지쳤다.

사실 내단을 뺏긴 화후는 그저 금빛 털을 가진 조금 영리하고 날렵한 원숭이에 불과했다.

당연히 벽을 넘은 인간 암컷의 날카로운 기세에 완전히 제압당해,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꿀꺽꿀꺽!

그녀는 그 상태로 계속 피를 빨았다.

결국 화후는 너무 많은 피를 빨려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후우!”

원숭이 피를 얼마나 빨아들였을까?

흑의 여인이 낮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피부가 엷은 다홍빛을 띠며, 전보다 크게 생기가 맴돌았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마침 하늘에 아스라이 뜬 만월(彎月)이 그녀를 향해 신묘한 은빛을 뿌렸다.

도무지 이 세상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광경.

그러나 아쉽게도 이 광경을 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근처에 있는 이들은 모두 정신을 잃었다.

‘살아난 건가?’

“습!”

혀로 입술을 핥자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죽은 이에게 미각이 남아있을 리 없으니, 자신은 아직 산 게 맞다.

‘어떻게?’

아쉽게도 그녀는 절벽에 떨어진 직후부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왜 화후도 함께 떨어졌는지, 어떻게 절벽 중턱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도.

다만 제 입가에 붉은 선혈이 묻은 이유는 추측할 수 있었다.

‘또 발작한 모양이군.’

발작.

그녀가 지닌 천형.

이 천형을 일순이라도 멈추려면 지극히 자연지기에 가까운 강한 양기가 필요했다.

그것 때문에 불을 토하는 영물의 내단이 필요했다.

만일 내단이 없다면 급한 대로 피라도 빨아야 했다.

틀림없이 정신을 잃은 동안 몸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게 분명했다.

‘미안하게 됐군.’

흑의 여인은 제 옆에서 눈을 회까닥 뒤집고 혼절한 원숭이의 털을 손으로 쓸며 사과를 마쳤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손에 어째서인지 화후의 내단이 들려있었다.

이것도 살기 위해 저도 모르게 진천우의 소매를 뒤진 걸까?

한 가지 분명한 건, 내단을 쥔 팔에 검은 핏줄이 돋아있다는 사실이었다.

금제(禁制).

이건 저 스스로 펼친 금제였다.

아마도 내단을 삼키기 직전, 자신의 마지막 남은 이성이 금제를 펼쳤을 터.

‘아니, 이성이 아니라 최후의 자존심이었겠지.’

“후후!”

흑의 여인이 저도 모르게 쓰게 웃었다.

죽음도 무릅쓰고 진천우에게 선뜻 내단을 넘겨놓고, 막상 발작을 일으키자 기절한 자의 소매를 뒤졌다니.

‘화후의 내단을 본 순간, 이걸 먹어도 내 천형에는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그런 추태를 보였다니.’

사실 자신이 대범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확실히 화후의 내단에 담긴 기운은 지극히 순수했지만, 생각보다 그 양이 많지 않았다.

이 정도로는 천형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몇 년 정도 생명을 연장하는 게 전부.

‘그런데 난 그 몇 년을 더 살겠다고…….’

누구도 그 모습을 보지 않아 어찌나 다행인지!

틀림없이 얼마나 추했을지 눈에 선했다.

“추하구나, 추해.”

흑의 여인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쥔 내단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즉시 그것을 기절한 진천우의 입에 가져갔다.

이걸 계속 지니고 있으면 또 발작을 일으킬 게 분명했다.

그렇게 추하게 살 바에는 차라리 여기서 죽겠다.

‘겸사겸사 이놈에게 진 목숨 빚도 갚으면서.’

지금 보니 진천우의 두 팔과 한쪽 다리가 박살 나 있었다.

거기다 무슨 무리를 했는지 단전에도 상당히 무리가 가 있었다.

마침 화후의 내단이 지닌 순수한 자연지기라면 이 상처를 모두 치료할 수 있었다.

덤으로 제가 가진 쓸데없는 내공도 모조리 녀석에게 넘기면…….

‘못해도 어디 가서 얻어맞지는 않겠지.’

다만 아쉬운 건, 그 모습을 자신은 보지 못한다는 것 정도.

툭!

“응?”

툭!

그런데 이놈이 무려 자신이 직접 내단 흡수를 돕겠다는데, 바로 내단을 먹지 않고 자꾸 입술로 뱉어냈다.

사실 영물의 영단은 전설 속의 이야기처럼 입에 넣자마자 바로 녹아내리는 그런 편리한 물건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솔직히 꺼리는 마음이 없잖아 있지만,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그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슥.

흑의 여인이 화후의 영단을 입에 문 채, 그대로 진천우의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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