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영물을 대하는 방법
(45/210)
45화 : 영물을 대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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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 영물을 대하는 방법
2021.10.13.
피 냄새?
‘에이, 설마!’
진천우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흑의 여인이 피를 흘린다?
말이 되나!
‘…….’
하지만 그는 잠시 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혹시 모르는 일.
바로 역근경과 화후기식법을 운용했다.
둘 다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무공.
킁!
오감 중 후각에 집중해 숨을 들이켰다.
‘안 나는군.’
아까 맡은 피 냄새가 거짓말처럼 흩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가 착각한 게 아닐까?
킁킁!
그때, 그의 코끝에 다시 한번 혈향이 흘러들어왔다.
“음…….”
별로 놀랄 일이 아니었다.
너무나 익숙한 냄새.
그 냄새는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조금 전, 흑의 여인이 던진 돌멩이에 당한 상처.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아무렴 내가 내 피 냄새도 모를까 봐!
‘분명 처음 맡았던 혈향은 내 피 냄새와 달랐……. 어?’
진천우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생각하니, 정말 달랐나?
‘살짝 비슷했던 것 같기도……. 그럼 그냥 내 피 냄새였나?’
모르겠다.
이 문제를 깊게 파고들수록 괜히 머리가 아팠다.
사실 이 의문을 풀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그건 지금이라도 움집으로 돌아가, 흑의 여인에게 ‘미안하지만, 한 방울이라도 좋으니 그쪽 피 냄새를 한 번만 맡아도 됩니까?’하고 물어보는 것.
‘그리 말하면 아마 난 죽겠지.’
어쩌면 흑의 여인은 박장대소하며 그 자리에서 피를 내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 옆에 있을 백의 여인은 절대 그 헛소리에 가만히 듣고 있을 리 없었다.
즉시 검을 뽑고 달려들겠지.
마치 성난 맹수처럼.
안타깝게도 진천우는 화난 그녀에게서 목숨을 부지할 자신이 없었다.
당장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 무공을 수련할 수밖에.’
일단 그 문제는 나중으로 미뤘다.
그 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과 세 걸음 너머에 보이는 샘.
단 세 걸음만 걸으면 기의 바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만 하면 제 몸을 짓누르는 이 압박에서 벗어나 쉴 수 있을 터.
하지만 진천우는 그러지 않았다.
당장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흑의 여인이 시킨 대로 심법과 보법을 연습했다.
스읍!
숨을 들이켤 때마다, 금강공이 주위의 넘쳐나는 기를 빨아들였다.
탓!
그때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확실히 금강공을 익히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련은 보법과 병행하는 게 맞았다.
진퇴보 또한 아무리 기본적인 보법이지만,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려면 상당한 내공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때 금강공을 함께 사용하니 자연스럽게 내공 문제가 해결되었다.
새삼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련법을 생각한 흑의 여인에 대한 놀라움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고 얼마 뒤.
우웅!
“응?”
느닷없이 소매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뭔 빛이지?’
진천우가 놀라서 제 소매에서 들쳤다.
딱히 자신은 이런 빛을 낼 물건을 지니지 않았는데?
“아!”
‘그러고 보니 이게 있었지!’
팟!
그는 곧바로 소매에서 빛나는 천 두 개를 꺼냈다.
청기와 백기.
도원경의 경계를 비트느라 가지고 있던 기운을 모두 소모한 두 개의 천이, 소매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빛을 사방에 뽐냈다.
빛도 빛이지만, 놀랄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두 깃발의 색이 제법 많이 돌아왔다.
‘어느새 절반 가까이 원래대로 돌아왔잖아?’
분명 자신의 예상으로는 이렇게 빨리 색이 돌아올 수 없었다.
‘무슨 변수가 작용해서?’
그는 바로 예상되는 변수를 떠올렸다.
청기와 백기가 색을 잃은 건, 가지고 있는 기운을 모두 소모했기 때문.
‘기운…… 기의 바다!’
어떻게 이걸 잊었을까!
도원경 안은 바깥보다 모든 기운이 월등히 풍부했다.
당연히 밖에 있을 때보다 안에서 두 깃발이 보다 빨리 복구될 수밖에.
잠깐, 그럼 계산을 하면…….
‘사흘에 절반쯤 돌아왔으니까, 사흘만 더 기다리면 완전해지는 건가?’
그러면 바로 청기 백기를 사용해 금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정말 뜻밖이지만, 어쩌다 보니 무공을 진지하게 익힐 이유가 사라진 격.
애초에 진천우가 무공을 익히는 근본적인 이유는 한시바삐 화후를 잡아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뭔 상관이야.’
그래서?
이유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나?
진천우의 의지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불을 지폈다.
어째서일까?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사흘 뒤에 여기서 나갈 수 있어도.’
무공을 제대로 익혀 화후를 붙잡으면, 당장 오늘이라도 도원경을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 자신이 무공을 소홀히 익힐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쏴아아!
“?!”
그런데 그가 결심을 굳히는 순간, 숲속에서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엄청난 속도?!’
진천우가 기척을 느끼고 즉시 달아나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것은 어느새 울창한 나무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쾅!
하늘에서 운석이, 아니 커다란 금덩이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금덩이의 정체는…….
끼이익!!
바로 화후였다!
끽! 끼익!
눈부신 금빛 털을 지닌 녀석은 모습을 보이자마자 진천우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헌데 가만 보니 놈의 손끝은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가리켰다.
바로 그의 손에 들린 청기와 백기.
‘아뿔싸!’
그러고 보니, 화후도 이 신기한 깃발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진천우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청기와 백기를 소매에 숨기려 하자.
끼이이이익!!
그 즉시 불 원숭이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화후의 팔은 사람보다 배 이상 길었다.
쉬익!
그걸 휘두르자 마치 채찍에서나 날법한 파공음이 터졌다.
휙!
진천우는 간신히 녀석의 공격을 피했다.
뒤로 물러남에 있어서 상승 신법에 뒤지지 않는 진퇴보 덕이다.
끽?
이에 불 원숭이가 두 눈을 치켜떴다.
한껏 얕잡아본 인간이 제 공격을 피하자 제법 놀란 모양.
놈은 몇 번이나 진천우와 자기 손을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한 번 공격에 실패하면 두 번, 세 번, 아니 몇 번이고 다시 달려들면 된다.
‘역시 짐승답게 생각이 단순하군.’
……그건 아주 크나큰 착각이었다.
화후는 그냥 짐승이 아닌, 전설의 영물이었다.
화륵!
녀석이 입을 벌려 시뻘건 불을 토했다.
‘느닷없이 불이라니!’
처음부터 놈이 불을 내뿜는 걸 알고 경계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숯덩이가 될 뻔했다.
휙!
몸을 옆으로 날리자마자 맹렬한 열기가 스쳐 지나갔다.
끼익!
‘또 불을 토해낼 셈인가?’
화후가 또다시 소리를 지르자 진천우가 대경실색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놈의 불꽃이 제 쪽이 아닌 정반대 방향으로 쏟아졌다.
화르륵!
불은 순식간에 번져 커다란 화벽(火壁)을 쌓았다.
진천우가 벽을 보고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믿기지 않는다.
‘저쪽은?’
움집이 있는 방향.
화후는 자신이 금지에 오기 전부터 두 여자에게 쫓겼던 만큼, 그 둘이 사는 움집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을 터.
‘설마 그녀들이 도우러 오지 못하게 막은 건가? 그게 아니면 단순히 퇴로를 막은 거?’
둘 중 무엇이든, 그건 평범한 짐승의 사고가 아니었다.
그래도 가능하면 후자였길 바랬다.
만일 전자라면, 이는 너무나 두려운 사실이었다.
‘화후가 이 정도로 영악할 줄이야!’
진천우가 침중한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잡았다.
끼기긱! 끽!
원숭이의 웃음소리가 불타는 숲을 가득 채웠다.
독 안에 가둔 쥐를 볼 때 저런 웃음이 나올까?
놈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 잡은 사냥감을 앞에 두고도 전혀 방심하지 않는 게 점점 더 짐승 같지 않았다.
‘영물(靈物)이 아니라 아예 요물(妖物)이군.’
진천우는 화후가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화후는 강하다. 벽을 넘은 무인도 쉽사리 붙잡지 못할 정도의 괴물. 당연히 지금 내 실력으로는 당해낼 수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야 했다.
뭐든 좋았다.
녀석의 약점이 뭘까?
놈의 빈틈을 만들 뭔가가 없을까?
그때 진천우의 눈에 불 원숭이의 허리춤에 묶인 천이 보였다.
사실 화후가 등장했을 때부터 눈에 들어왔지만, 곧바로 녀석이 달려드는 바람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다가 지금에서야 다시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는 뒤늦게나마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왜 천이 하나뿐이지?
화후는 원래 붉고 누런 천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독괴에게 붉은 천을 뺏기고, 대신 검은 천을 얻어 이곳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지금 녀석은 누런 천밖에 두르지 않았다.
혹시 다른 데 숨겼나 눈 씻고 찾아봤지만, 그 어디에도 검은 천은 보이지 않았다.
‘아, 그래서!’
처음부터 화후가 아직 금지에 남아있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현재 금지에는 흑의 여인이 들어와 놈을 쫓았다.
그녀 또한 독괴와 마찬가지로 벽을 넘은 무인.
그렇다면 당연히 화후는 독괴 때와 같은 선택을 해야 했다.
도원경 밖으로 달아나는 것.
그런데 녀석이 달아나지 않고 계속 금지에 남은 이유가, 이미 모종의 이유로 검은 천을 잃어버려서라면?
‘의문이 풀렸군.’
하나의 의문이 풀렸지만, 대신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럼 검은 천은 어디로?
누구에게 뺏긴 거지?
설마 저 영악한 놈이 그걸 그냥 잊어버리진 않았을 텐데?
끽!
그 순간, 화후가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토했다.
놈의 눈동자에 짐승답지 않은 짙은 탐욕이 가득했다.
노골적인 시선이 진천우의 소매를 향했다.
“그랬군.”
그제야 진천우가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화후가 갑자기 제 앞에 뚝 떨어졌는가?
녀석은 그동안 검은 천을 대신할 걸 찾아 헤맨 게 분명했다.
그러던 중에 숲 한가운데서 청룡기와 백호기가 내뿜는 빛을 봤으니, 눈이 뒤집혀 달려들 수밖에.
“그래, 이제 네놈의 목적이 뭔지 똑똑히 알겠구나. 그럼 이후의 일은 간단하지.”
씩!
진천우가 화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끽?
녀석이 이를 보고 가볍게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지금 고양이 앞에 쥐나 다름없을 저 허약한 인간이 왜 갑자기 저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미소를 보자 원숭이의 가슴에 심상치 않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더는 시간을 끌면 안 된다.
단번에 놈을 때려눕히고 푸른 천과 흰 천을 되찾아야 한다!
화후가 그리 결심하고 몸을 날리려는데!
“움직이지 마!”
진천우가 그 찰나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먼저 소리쳤다.
이를 들은 화후가 급히 움직임을 멈췄다.
당연히 그건 인간의 고함이 너무 크고 우렁찼기 때문이 아니었다.
펄럭펄럭!
끼이익!
저 망할 인간이!!
진천우가 어느새 소매에서 청룡기와 백호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걸 방금 화후가 토한 불 쪽으로 들이밀었다.
그는 이미 독고를 펫으로 들인 경험이 있어, 영물을 어찌 다루는지 잘 알았다.
씨익!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네가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이걸 불 속에 던지겠다.”
진천우가 희대의 영물을 상대로 협잡질을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