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 귀신같은 여자 (2)
(41/210)
41화 : 귀신같은 여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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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 귀신같은 여자 (2)
2021.10.04.
‘경쟁전?’
처음이 아니다.
두 번째.
그러나 첫 경쟁전 때와 달리 이번 조건은 너무 터무니없었다.
화후는 전설의 영물로, 특히 숲속에서의 움직임은 따를 존재가 없었다.
‘그걸 흑의 여인과 경쟁해서 붙잡으라니.’
아마 그녀는 벽을 넘었을 게 분명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승부는 불 보듯 뻔했다.
‘재밌군.’
하지만 진천우는 낙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확실한 성과에 명확한 보상!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극복하면, 타이쿤이 어떤 보상이 줄지 기대됐다.
“훗!”
그 표정을 본 흑의 여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분명 나도 화후를 잡겠다고 말했는데도, 웃어?’
“재밌군.”
씨익!
우연이겠지만 그녀는 진천우와 똑같은 생각을 했고, 또 똑같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팟!
그 직후 흑의 여인이 몸을 날렸다.
백의 여인이 그 뒤를 따랐다.
“…….”
그녀가 앞서 날아가는 제 주인을 향해 은밀히 입술을 달싹였다.
-소주, 저놈을 내버려 두실 겁니까?
-내버려 두지 않으면?
-누가 봐도 수상한 놈입니다. 게다가 하필 목적이 우리와 같은 화후인 것도…….
-그러니까 내버려 두는 거야.
-네?
-정말 저 녀석의 목적이 화후를 잡는 거라면, 반드시 우리와 행적이 겹칠 테니까.
행적이 겹친다는 건, 따로 감시할 필요가 없다는 뜻.
하지만 백의 여인은 여전히 그녀의 결정이 마음에 안 드는지, 찌푸린 눈살을 쉬이 펴지 않았다.
-만일 행적이 겹치지 않으면 어쩌시려고?
그녀는 애초에 진천우가 밝힌 목적이 거짓이라 여겼다.
-그럼 그때 손보면 되지.
-굳이 일부러 수고를 자초할 필요가 있으십니까?
-…….
그제야 흑의 여인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이랑은 자신이 내린 결정에 이처럼 물고 늘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백의 여인은 한껏 귀찮아하는 주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시녀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제 주인에게 닥칠지 모를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는 것.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려 진천우를 처리하고 싶었다.
“훗!”
흑의 여인 역시 시녀의 충심을 모르지 않았다.
허나 그것은 허락할 수 없었다.
놈은 모처럼 이 지루하기 그지없는 장소에 떨어진 재밌는 존재.
-걱정할 필요 없다.
흑의 여인이 허공에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상태로 한 손을 휘둘렀다.
곧바로 그녀의 소매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튀어나와, 조금 전 둘이 땅을 박찬 장소에 긴 선을 남겼다.
그 뒤, 흑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저 녀석은 저 선을 넘지 못해.”
그러더니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신이 새긴 선, 바로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진천우가 들을 수 있도록, 아주 크게!
“함부로 그 선을 넘으면 죽는다!”
* * *
-함부로 그 선을 넘으면 죽는다!
‘내가 그녀를 잘못 본 걸까?’
진천우가 땅에 그어진 얕은 선을 바라보며, 흑의 여인에 대한 몇 가지 감상을 떠올렸다.
지독히도 아름다운 여자.
지독히도 강한 여자.
지독히도 자기 마음대로인 여자.
‘하지만 날 제법 마음에 들어 한 눈치였는데?’
당연히 이성으로써의 호감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호기심과 흥미본위의 호감.
그러나 그만큼 직관적이라, 금세 마음이 바뀔 성질이 아니었다.
‘즉, 이 선을 넘으면, 그녀가 날 죽이겠다가 아니라…….’
선을 넘으면 내가 알아서 죽는다는 뜻?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그는 의아한 얼굴로 다시 선을 살폈다.
쭉 한 획으로 그어진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끝자락이 부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치 발을 대고 그린 것처럼.
‘그러니까 선만 넘지만 않으면 된다는 거지?’
조심스럽게 그 부분에 발을 내밀었다.
발을 내밀자 자연스럽게 몸도 따라왔다.
“억!”
그 순간, 진천우가 숨을 삼켰다.
갑자기 물에 빠진 것처럼 숨이 막혔다.
화들짝 놀란 그는 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헉! 헉! 헉!”
바닥에 주저앉은 채 힘겹게 숨을 헐떡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그어진 선 하나가 이렇게 두렵게 느껴지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후우!”
그는 선 너머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화후기식법을 사용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
아주 최근에 겪은 무언가가 떠올랐다.
호흡이 깊어지자 기감이 활성화되었다.
그러자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화륵!
‘이건 흡사…… 불바다구나.’
선 하나를 경계로 그 너머에 불바다가 펼쳐졌다.
물론 진짜 불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투명한 기운이 마치 실제 불이 타오르는 것처럼 사방에 넘실거렸다.
‘만약 내가 생각 없이 저 선을 넘었다면?’
그대로 영문도 모른 채, 기의 바다에서 압사해버렸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은 흑의 여인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
‘그녀에게 큰 은혜를 입었지만, 당장 은혜를 갚을 길이 없구나.’
그렇다고 그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진천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반드시 이 은혜를 보답하겠다 결심했다.
끼긱!
그때, 숲 너머에도 또다시 불 원숭이의 울음이 울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쾅! 콰쾅!
울음소리와 함께 커다란 굉음이 터졌다.
‘둘이 화후를 노리고 있다는 게 정말이었나?’
백의 여인이 진천우를 의심하듯, 그 또한 두 여인을 경계하고 의심했다.
심지어 타이쿤이 흑의 여인이 화후를 노린다고 밝혔음에도, 계속 그 이유를 밝히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화후의 내단일까?
그게 아니면 독괴처럼 화후의 또 다른 무언가?
‘일단 그건 나 혼자서는 당장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은 나중으로 미루자.’
“휴!”
당장 알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지자, 바로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웠다.
대신 그는 화후기식법을 보다 깊게 내쉬었다.
화르륵!
숨을 한 번 삼킬수록 선 너머의 불길이 더욱 거칠어졌다.
‘기감이 민감해질수록 외부 기운을 더 잘 느끼게 되는구나.’
문뜩 현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틀림없이 시작은 도원경이었지만, 어느새 그곳은 하계와 선계의 것이 서로 섞여, 그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생태를 생성했습니다.
녀석의 말이 맞았다.
지금 이곳은 선 하나를 경계로, 생전 보지 못한 환경이 형성되었다.
이만큼 기가 진한 장소는 천하 어느 명산을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건 진천우에게 크나큰 기회였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선 너머 세상은 그가 익힌 화후기식법 수련에 제격이었다.
호흡의 기본은 들숨과 날숨인데, 숨을 들이켤 때 보다 강한 기운을 함께 마시면 효과가 더 커졌다.
“흠!”
진천우가 다시 선 앞에 섰다.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면 다시 숨이 막히고, 아주 깊은 물에 빠진 것 같은 끝없는 탈력감이 덮쳐올 터.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끼기긱! 쾅!!
저 숲에서 화후와 흑의 여인이 계속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와 경쟁해야 하는 자신은 이 선조차 넘지 못하다니!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선의 끝자락,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발을 댔다.
화륵! 화르륵!
그대로 거센 기운이 온몸을 뜨겁게 감쌌다.
“스읍!”
진천우는 이에 지지 않고 천천히 호흡을 이었다.
선 너머 기운은 지독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아직 선을 넘지 않았다.
선 너머 진짜 불바다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한 등잔불 따위에 겁먹을 수 없었다.
“흡! 스읍! 후우우!”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과 엎치락뒤치락, 선을 왔다 갔다 하며 호흡을 조절했다.
그러다 마침내.
씨익!
진천우의 입가에 아주 얕은 호선이 그려졌다.
* * *
두 여인이 물가로 돌아온 건 반나절이 지난 뒤였다.
-소주의 말대로군요.
백의 여인이 아직 선을 넘지 못한 진천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무인에게는 천혜의 지형.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기를 자유롭게 다루는 게 가능한 일류 이상의 고수에게만 해당되었다.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 금지는 지옥과 다름없다.
자신 또한 처음 금지에 발을 디디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당장 저 선을 넘는 데만 반년이 걸렸다.
‘그것조차 옆에서 소주가 하나하나 알려줘서 가능했던 것이고, 나 혼자였다면 수년이 걸렸겠지.’
비록 오늘은 화후를 잡는 데 실패했다.
과연 전설의 영물답게 놈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의 다 잡을 뻔했다. 게다가 슬슬 녀석의 움직임이 눈에 익기 시작했으니, 다음부턴 나도 소주의 보조를 맞출 수 있다.’
그때까지 대충 보름?
어쩌면 그 절반으로 충분할지 몰랐다.
그녀는 조만간 불 원숭이의 꼬리를 붙잡을 걸 상상하며, 다시 전음을 보냈다.
-저 꼴을 보니, 녀석의 목적과 진의가 뭐든 소주를 방해하는 건 절대 무리겠군요. 안심입니다. 그럼 전 바로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백의 여인은 그대로 허리춤에 맨 푸른 비늘의 물고기 다섯 마리를 가지고, 물가 근처에 만들어둔 움집으로 들어갔다.
곧 날이 질 테니 서둘러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서두느라, 그녀는 제 주인이 진천우에게 무슨 눈빛을 보내는지 보지 못했다.
‘글쎄…….’
흑의 여인은 아직 제 앞에 놓인 장난감에게 기대 섞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 * *
“후읍!”
진천우가 갑자기 감았던 눈을 뜨며 숨을 길게 토했다.
이곳의 환경은 화후기식법과 생각 이상으로 상성이 좋았다.
불과 반나절 동안 기감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화륵! 화르륵!
이제 선 너머는 정말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게 불타올랐다.
‘그럼…….’
그대로 왼발을 내밀었다.
아직 그는 눈앞의 기의 바다를 견딜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한 신체를 얻으려면 적어도 일류 이상의 고수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진천우는 어째서인지 저 앞을 걸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정확히는 그는 저 앞을 걷는 것과 매우 유사한 경험을 이미 쌓았다.
‘설마 청기백기 게임이 이를 위한 안배였다니.’
진천우는 제단 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의 바위를 피해 깃발을 움직였던 걸 떠올렸다.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단, 이번에 움직이는 건 깃발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였다.
슥!
한쪽 발이 선을 넘자 곧바로 엄청난 압박이 느껴졌다.
진천우는 이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맡겼다.
“아아!”
흐름에 순응하는 순간, 전신에 느껴지는 커다란 해방감.
저도 모르게 입에서 환희가 흘러나왔다.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쏘아졌다.
‘단순히 앞으로 빠르게 나아갈 뿐인데, 이런 기분이 들다니?’
그렇다면, 이 이상으로 빨라지면 무슨 기분이 들까?
풀을 밟아 달리고, (草上飛 : 초상비)
물 위를 달리며, (等平渡水 : 등평도수)
마지막에 하늘 위로 표홀히 나른다면? (虛空踏步 : 허공답보)
아쉽게도 해방감은 금세 사라졌다.
어느 순간, 기의 격류가 뚝 끊겼다.
지금 진천우의 움직임은 스스로 펼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갑자기 흐름이 끊기자, 두 발이 엉켜 앞으로 넘어졌다.
우당탕!
그는 몇 번이나 요란하게 구른 뒤 간신히 정신 차렸다.
찰랑!
‘음?’
물소리.
설마 다시 선 뒤쪽으로 튕겨 나간 건가?
그건 아니었다.
눈앞에 처음 보는 샘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샘이었는데, 안에 물고기가 가득했다.
꿀꺽!
비늘에 푸른 빛 윤기가 흐르는 물고기를 보며 급히 침을 삼켰다.
가만 생각하니, 자신은 오늘 하루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한 마리만 잡아서 구워 먹을까?’
그는 썩 괜찮은 생각이라며 샘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함부로 그 샘에 손을 담그면.”
그 순간 바로 옆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었다.
깜짝 놀라 고개 돌리자, 흑의 여인이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눈앞에서 꽃이 피어났다는 착각이 들 만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넌 죽는다!”
정말 해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