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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 청기 올려! 백기 내려! (38/210)


38화 : 청기 올려! 백기 내려!
2021.09.27.


“청기백기?”

난데없이 이게 뭔 상황?

그 순간, 뇌리에 웬 목소리가 울렸다.

-청기 올려!

“엇?”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오른손이 올라갔다.

그러자 현판에 새 글이 갱신되었다.

[지시에 따라 청기와 백기를 움직입니다. (1 / 108)]

[보상 : 진법(陳法)의 기초]

‘진법?’

본래 진법은 군대에서 군사를 늘어놓는 법을 뜻했다.

그러나 진천우가 생각하는 진법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삼국지연의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패배한 유비군을 뒤쫓던 육손군의 앞을 웬 돌무더기가 가로막았다.

육손은 이를 무시하며 군사를 전진시켰는데, 그 돌무더기는 사실 제갈무후(諸葛武侯)가 만든 '팔진도(八陣圖)'였다.

제갈량은 한낱 돌에 기문둔갑의 이치를 담아 자연현상을 재현했다.

결국 육손은 팔진도 안에서 연이어 벌어진 기현상에 학을 떼며 군대를 물렸다.

‘그런 진법을 내게 가르쳐 준다고?’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라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제안을 건넨 건 다름 아닌 타이쿤.

-백기 내려!

“!”

곧바로 왼손을 내렸다.

지시가 계속 이어졌다.

-청기 내려!

-백기 올려!

-청기 내리지 마!

-백기 올리지 마!

지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빨라지고 복잡해졌다.

하지만 진천우는 서른 번이 넘는 지시가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어쩐지…….’

너무 쉬운데?

‘정말 이대로만 하면 진법을 알려주는 걸까?’

그가 살짝 의심을 품자, 현판이 즉시 강하게 경고했다.

[지금부터 단 한 번이라도 지시를 틀리면 청기백기 이벤트는 실패합니다.]

‘그거야 당연하겠지.’

경고문을 봐도 전혀 심각해지지 않았다.

-백기 내리지 말고 청기 올려!

-청기 올리지 말고 백기 내려!

그렇다고 그가 청기백기를 진지하게 임하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슥! 슥!!

당장 진천우는 귀를 쫑긋 세우며, 지시를 놓치지 않도록 집중했다.

그의 두 손은 동굴을 빠져나오면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절대 깃대를 놓지 않도록 단단히 움켜쥐었다.

-청기 올리고, 백기 내리고, 청기 내리고, 백기 올려!

-백기 내리고, 청기 올리고, 청기 올리지 말고, 백기 계속 내려!

휙! 슥슥슥!

지시 내용이 살짝 지저분해졌지만, 진천우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깃발을 움직였다.

이 정도는 틀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아직 천형을 극복하지 못하고 제대로 된 무공도 익히지 못한 자신에게, 진법은 독과 함께 중요한 비장의 한 수가 될 터.

‘반드시 손에 넣어야지.’

그러니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

어느새 지시는 쉰을 넘겼다.

“…….”

진천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쉬웠다.

-청기 내리지 말고, 청기 올리지 마!

-청기 백기 둘 다 올려!

-다 내려!!

처음에는 무미건조했던 지시가 다급하게 바뀌었지만, 역시 소용없었다.

그에게는 역근경과 화후기식법이 있었다.

둘 다 신체와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무공.

여기에 백회까지 개방한 진천우는 아무리 복잡한 지시도 단번에 이해했다.

‘그걸 타이쿤도 모르지 않을 텐데?’

휘잉!

역시 그랬다.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휘이잉! 뚝!

바람은 거세게 요동치다가 갑자기 멈췄고, 그러다 다시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렇다고 무조건 깃발을 따라 바람이 움직이는 건 또 아니었다.

-백기 내리지 마!

-청기 올리지 마!

휘이이잉!!

분명 지시에 따라 깃발을 멈췄는데, 사방의 바람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큭!”

얼마나 거센지 몸이 뒤로 밀려났다.

‘설마 이런 식으로 방해하겠다는 건가?’

확실히 난이도가 올랐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결법은 간단했다.

우우웅!

진천우는 단전의 기운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역근경.

온몸의 근육이 순식간에 부풀었고, 그만큼 몸의 중심이 내려갔다.

휘이이이잉!!

이후,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진천우는 땅에 단단히 뿌리박은 거목처럼 부동(不動)을 유지했다.

대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스읍!”

숨을 길게 내쉬었다.

불 원숭이의 호흡이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몸을 달군 열기가 오감이 날카롭게 벼렸다.

-청기 내리지 말고, 백기 올리지 말고 내려! 그리고 청기 올렸다가 바로 내려!

-백기 올리지 말고, 청기 내리지 말고 올려! 그리고 백기 내렸다가 계속 내려!

지시가 더 복잡해졌다.

휘오오오오오!!

바람도 더 거칠어졌다.

움찔!

순간 진천우의 오른손이 잘게 떨렸다.

하마터면 청기를 내릴 뻔했다.

다행히 그는 곧바로 청기를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그런데 실수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잇!”

이번에는 왼손이 흔들렸다.

손등에 커다란 힘줄이 튀어나오고서야 왼손을 내릴 수 있었다.

갑자기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역근경과 화후기식법을 모두 사용했는데 어째서?!’

설마 둘을 동시에 사용해서?

진천우는 그건 아니라고 여겼다.

애초에 두 무공은 상충하는 성질이 아니었다.

이때 또다시 지시가 떨어졌다.

-청기 올려!

슥!

즉시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음?”

갑자기 오른손이 무거워졌다.

청룡기 위로 커다란 바위가 올라간 듯 꿈쩍하지 않았다.

이대로면 지시를 이행하지 못해 청기백기 게임에 실패한다.

“웃기지 마!”

진천우가 크게 소리 지르며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스윽!

정말 간신히 청기가 올라갔다.

아슬아슬하게 실패를 면했다.

‘이건?!’

그는 뭔가를 눈치채고 즉시 화후기식법을 멈췄다.

-백기 내려!

슥!

왼손이 내려갔다.

이번에는 어떤 방해도 없었다.

다시 화후기식법을 일으켰다.

-청기 올리지 말고 내려!

바로 오른손을 내리려는데 또 손이 꿈쩍하지 않았다.

누가 깃발을 위로 당기는 것 같았다.

‘역시!’

또 호흡을 멈추자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사라졌다.

진천우는 이를 통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챘다.

개 피리라는 게 있다.

사람보다 청각이 뛰어난 개에게만 들리는 소리를 내는 물건인데, 이걸 사용하면 주위 개를 불러들이거나 간단한 명령도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개 피리를 너무 세게 불면, 그 소리를 들은 개는 괴로움에 몸을 비틀었다.

심한 경우에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버리는 개도 있었다.

허나, 사람은 바로 옆에서 개 피리를 불어도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지금 상황이 딱 그짝이었다.

불 원숭이의 호흡은 오감과 함께 기감을 증폭시켰다.

예민해진 기감이 깃발 주위에 몰린 기운에 반응해 몸을 굳혔다.

다행히 이 문제의 해결법은 간단했다.

‘그냥 화후기식법을 쓰지 않으면 된다.’

기감이 둔해지면 정체 모를 기운을 느끼지 못하니, 몸이 굳지 않게 된다.

즉, 보다 쉽게 지시를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천우는 그 선택을 망설였다.

‘이대로 화후기식법을 쓰지 않고 지시만 따르면 되는 걸까?’

그는 무엇보다 타이쿤을 믿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타이쿤에 대한 믿음은 전설의 만년한철에 비할 정도였다.

그만큼 신뢰하기에, 동시에 의심했다.

‘숨을 멈추고 시키는 지시만 이행하는 게 타이쿤의 뜻일까?’

아니지.

절대 그럴 리 없다.

자신이 아는 타이쿤은 그런 나약한 선택을 인정할 리 없었다.

이건 내기해도 좋았다.

“스읍!”

진천우가 즉시 화후기식법을 다시 운용했다.

-청기 올려!

“흡!”

들이마신 숨을 가볍게 내뱉자, 오른손이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말도 안 되는 무거움.

이번만은 안간힘을 써도 손이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는 없었다.

급히 눈동자를 굴리자 눈앞에 푸른 현판이 나타났다.

현판은 마치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새로운 글을 선보였다.

[창천석(蒼天石)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예]

이전 중간광고 보상으로 받은 적천석은 현재 가지고 있는 스킬과 연관된 새로운 스킬을 익히게 해주었다.

그럼 이번에 새로 받은 창천석의 효과는?

창천석은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강화해주었다.

진천우는 창천석으로 어떤 스킬을 강화할지 정했다.

[‘화후기식법’이 창천석의 효과로 ‘화후기식법+’로 강화됩니다.]

화후기식법은 오감과 함께 기감과 영감을 일깨운다.

그것이 강화되자, 진천우의 감각이 새롭게 깨어났다.

‘이거구나!’

그는 제 오른손에 들린 청기 위에 올라와 있는 반투명한 기의 바위를 보았다.

이 상태로 청기를 들려면, 기의 바위를 함께 들거나 쪼갤 정도의 괴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장 그만한 힘은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꼭 부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지.’

슥!

진천우가 슬쩍 입꼬리를 비틀더니, 자신의 손목 역시 가볍게 옆으로 틀어주었다.

‘장애물을 부수지 못한다면, 뛰어넘거나 피하면 그만.’

그러자 손에 든 깃발이 바위를 비스듬히 흘리며 위로 올라갔다.

이렇게 간단할 줄이야!

이다음부터는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청기 내리지 말고 백기 올려!

백기 위에 보이지 않는 바위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가볍게 옆으로 비켜 올리면 그만.

그렇게 해결책을 찾자, 갑자기 청기 위로 바위가 쏟아졌다.

콰르르!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 셋…… 모두 십여 개가 넘었다.

틀림없이 억지로 청기를 내리려는 게 분명했다.

진천우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손을 움직였다.

슥! 스르륵!

아래로 몰아치는 격랑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오른손을 맡겼다.

위에 바위가 떨어지면 아주 살짝 밑으로 내려갔다가 곧바로 옆으로 비켰다.

지시를 백 번 넘게 이행하며, 어느 정도 움직여야 지시가 만족하는 적정선인지 가늠이 끝났다.

이후로 다섯 번의 지시가 더 이어졌다.

그 모두 격렬한 방해가 있었지만, 한번 흐름을 탄 이상 어떤 것도 진천우를 말리지 못했다.

[107 / 108]

마지막 지시가 주어졌다.

-마음대로!

지시를 읽자마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다 끝나가는 마당에 이건 또 뭐냐?

청기를 올리라는 걸까? 백기를 내리라는 걸까?

둘 다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뜻?

쿠쿠쿵!

그때, 사방에서 바위가 날아왔다.

그 수가 백을 넘겼다.

순식간에 바위에 둘러싸인 몸은 그대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이건 비켜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런 식의 방해라니!

‘?!’

그런데 그 순간, 진천우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아니, 이게 정말 정말 방해인가?’

그가 아는 타이쿤은 절대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도 답이다.’

분명 타이쿤의 마지막 지시는 ‘마음대로’.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는 것도, 분명 내 뜻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어디, 어림도 없지!’

진천우는 그 정답을 거부했다.

우우웅!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단전의 내공을 역근경으로 돌렸다.

“스읍! 습! 스으읍!”

그 상태로 코와 입으로 불 원숭이의 호흡을 내쉬었다.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정말 그렇게 해줘야지.’

기감이 더욱 민감해지자, 몸을 찍어누른 바위의 모습이 점차 선명해졌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으득! 으드득!

바위의 존재감이 강해질수록 그 무게도 실체를 가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것들을 짊어진 몸이 비명을 질렀다.

역근경으로 간신히 버텼지만, 이대로는 오래가지 못했다.

“흡!”

그걸 알면서도 진천우는 화후기식법을 더욱 깊게 들이켰다.

으지직!

결국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양 무릎이 접히자, 바위들이 더욱 매섭게 등을 찍어눌렀다.

그런데 그 순간.

번쩍!

진천우가 갑자기 감았던 눈을 뜨고 소리 질렀다.

그가 무릎을 굽힌 건!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

일부러 몸을 무너트려 가면서 바위들의 틈을 벌렸다.

진천우는 곧바로 그 틈새로 양손을 찔렀다.

당연히 손에 든 두 개의 깃발도 이를 따랐다.

처음으로 청기와 백기가 앞으로 내밀어졌다.

이때 그의 손은 스승에게 상을 달라는 아이의 손처럼 보이기도.

슥!

아니면, 제 앞에 놓인 걸 모두 움켜쥐겠다는 탐욕스러운 손길로도 보였다.

어쨌든 그 평가는 타이쿤의 몫이었다.

[초월 달성!]

잠시 뒤, 타이쿤은 눈부신 금빛 광채로 이에 회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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