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양자택일(兩者擇一) (2)
(29/210)
29화 : 양자택일(兩者擇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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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 양자택일(兩者擇一) (2)
2021.09.06.
반짝!
눈앞에서 현판이 반짝였다.
마치 어서 선택하라는 듯.
‘계속 대화하는 것과 공격하는 것 중 하나를?’
사실 어느 걸 택해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왜 아무 이유도 없이 초면인 약초꾼을 공격해야 하는 거지?’
이게 진짜 문제였다.
‘그간 내가 봐온 타이쿤은 절대 이유 없는 선택을 강요하지 않아.’
진천우는 타이쿤을 신뢰했지만 동시에 의심했다.
그렇기에 쉽사리 타이쿤이 하란 대로 하지 않고, 다시 한번 약초꾼을 살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뭘 좀 캐셨습니까?”
마침 약초꾼도 반응을 보이기에, 슬쩍 떠보았다.
“완전 허탕일세.”
약초꾼은 그리 말하며 옆구리에 낀 망태를 보여주었다.
허탕이란 말과 달리, 망태 안에는 여러 종류의 풀뿌리가 가득했다.
“겨우 겨우살이와 송담 줄기나 좀 뜯었지. 이걸로는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들어서 오늘도 으름으로 끼니를 때울 팔자라네. 자네도 하나 먹겠나?”
그는 제 손바닥보다 큰 으름 열매를 진천우와 현석에게 하나씩 건넸다.
“감사합니다.”
제대로 익은 으름덩굴 열매는 상처에 좋은 약재였다.
또 안의 흰 과육은 달고 부드러워서 약초꾼들이 산속에서 즐겨 먹는 별미 중 하나.
진천우는 가문 서고의 약초도감을 떠올리며, 손에 든 으름 열매와 망태 속 겨우살이, 송담 줄기를 살폈다.
‘모두 틀림없는 걸 보면 저자가 약초꾼인 건 확실한데…….’
“와! 소가주님, 이 으름이라는 거 엄청 달고 부드럽습니다?”
이때, 현석이 열매를 한입 베물고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따로 소매 속 독고에게 독이 없음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진천우는 여전히 약초꾼을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그리 경계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거친 수염과 산속에서 낯선 이를 만나고도 태연자약한 태도. 그리고 여전히 날카로운 인상.’
아무리 봐도 닮았다.
얼마 전 진씨세가에 들이닥친 백풍대 무인과.
둘 다 외모가 아닌, 느낌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분위기를 풍겼다.
‘뭐, 약초꾼이라고 녹록한 일을 당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산이라고 위험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당장 험준한 산세를 거스르는 일만 해도 평범하지 않다.
거기에 더해 산어귀마다 칼을 들고 선 산중호걸이나 발톱을 숨긴 산중제왕을 상대하다 보면, 절로 범인은 겪지 못할 연륜이 쌓기 마련.
‘어쩔 수 없군.’
단순히 느낌만으로 상대를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그게 가능할 정도로 자신은 세상 경험이 많지 않았다.
“자네는 원래 말없이 남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는 게 취미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가솔들 이외의 외인을 보는 게 오랜만이라 그만 실례했습니다.”
자신이 계속 말이 없자 약초꾼이 살짝 날 선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진천우는 순순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때, 그는 선택을 마쳤다.
“가솔들 이외의 사람이 간만이라고? 보아하니 신분도 낮지 않은 것 같은데…….”
약초꾼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손뼉을 쳤다.
“그렇군. 자네는 산 아래, 진씨세가의 소가주인가?”
“어찌 그걸?”
“하하, 내가 이 산을 몇 번이나 오르내리는데, 천옥산 아래 가장 큰 가문도 모를까. 게다가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소문이 바로 자네에 관한 이야기지. 그렇군. 벌써 수년째 병치레 중이라지? 그런데도 여길 오른 걸 보면 모처럼 몸 상태가 좋아진 모양이군. 그런 사정이면 내가 이해하지.”
오해가 풀리자, 진천우는 내친김에 그가 등장했을 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런데 그쪽은 조금 전에 제 하인이 한 말에 의아해한 거로 기억합니다만?”
“음? 무슨 소리……. 아,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진가의 소가주는 머리가 아주 비상하군.”
그러는 약초꾼도 진천우가 한 가문의 후계자임을 알고도 여전히 평대를 하는 걸 보면, 평범한 담력이 아니었다.
-금지 전설이라?
분명 약초꾼은 수풀 너머에서 그리 말했다.
진천우는 처음 이 말을 듣는 순간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끝을 올리는 건 단순한 의문이지만, 앞이 올라가 있는 건 호기심이지. 그런데 거기서 끝을 흐리기까지 하는 건 부정의 의미.’
언변의 숙련도가 오르다 보니, 남이 하는 말을 듣고 이런 해석도 가능해졌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그렇지. 내가 이 주변을 몇 년째 뒤졌지만 금지 전설 같은 건 생전 처음 듣거든. 화후(火猴) 전설이라면 또 모를까.”
“화후?”
뜬금없이 금지 전설에 이어 또 다른 전설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진천우를 당황시킨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화후란 말과 동시에, 눈앞에 푸른 현판이 튀어나왔다.
[수상한 약초꾼과 대화하기를 선택했습니다.]
[보상으로 화후 전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합니다.]
‘뭔가 있군.’
“그 화후 전설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시겠습니까?”
“알려주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진천우가 흥미를 보이자, 약초꾼이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그는 은근한 눈짓으로 자신의 망태기를 바라보았다.
진천우가 소매에서 동전 다섯 닢을 꺼냈다.
“이 정도면 망태기 안의 약초값으로 충분할 겁니다.”
“어이쿠, 뭐 이런걸!”
오늘 하루 술값을 벌자, 약초꾼이 입꼬리를 귀에 건 채 화후 전설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산에는 입에서 불을 뿜는 신기한 원숭이에 대한 전설이 있는데, 그게 어떤 원숭이냐면…….”
화후 전설을 요약하면 이랬다.
입에서 불을 뿜는 털이 붉은 원숭이가 천옥산에 나타났다.
이 원숭이는 평소에는 전혀 볼 수 없지만, 어쩌다 어린아이가 산에서 길을 잃으면 귀신같이 나타나 진귀한 먹을거리를 주고 산 아래로 데려다준다는 이야기였다.
“영물 원숭이군요.”
“그래, 영물이지.”
진천우는 불 원숭이가 영리하다며 감탄했지만, 약초꾼은 거기에 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무려 입에서 불을 뿜는 원숭이이니, 녀석의 내단을 먹으면 양기를 다루는 무인에게 엄청난 성취를 주겠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일순, 진천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드디어 수상쩍은 약초꾼의 이면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을 위로 들었다.
하늘이 아니라 산 중턱으로.
“여기 산 중턱에 있는 화후의 사당에 그렇게 적혀있으니까.”
“원숭이한테 사당까지 있습니까?”
“이따금 불 원숭이가 아이를 구해줬다고 했잖는가. 그 아이의 부모 중 부호가 있어 사당을 지어주었지. 문제는 아이의 부모 중에 부호가 아닌, 무인도 있었다는 것 정도?”
그게 왜 문제냐면,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무인이 욕심을 품고 검을 든 채 산을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그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다못해 시체조차 찾지 못했다.
“거참 신기한 전설이 다 있군요.”
옆에서 함께 듣던 현석이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진천우는 대꾸 대신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검을 든 무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라…….’
내공을 다루는 무인의 신체 능력은 범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검까지 들었다고 하니, 설사 산중제왕을 만났다 해도 쉽사리 당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다니.’
진천우는 순간 화후 전설뿐 아니라 그 이전, 현석에게 들은 금지 전설을 떠올렸다.
설마 두 전설이 서로 맞물리는 건…….
‘에이, 그럴 리가!’
그건 지금으로써는 지나친 억측이었다.
무엇보다 금지 전설도 말이 안 되지만, 화후 전설은 특히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어찌 그런 엄청난 전설을 진씨세가에서는 일언반구도 듣지 못했을까.’
“왜 그런 대단한 전설을 자신이 모르는지 의아한 눈치군.”
“?!”
놀랍게도 약초꾼이 자신의 속내를 읽었다.
그는 낮게 한 번 웃더니 그 이유를 알려주었다.
“이 모든 게 이미 이백 년도 더 전 일이니까. 심지어 무인이 실종된 다음부터 화후 또한 모습을 감췄다더군. 그쯤 되니 누군가 벌써 화후를 붙잡았거나, 아니면 녀석도 위기를 느끼고 다른 산으로 도망쳤다고 여겨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거지.”
“그런 이야기를 어찌 그리 상세히 알고 계십니까?”
“그야 그것도 사당에 적혀있더군. 소가주도 관심 있으면 한번 화후 사당에 들르게나.”
그렇게 얘기를 마친 약초꾼은 홀로 산을 내려갔다.
두 주종은 그렇게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더니.
“일단 계속 올라가자꾸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계속 산을 오르던 중.
“이거 근자에 못 보던 얼굴인데?”
길 위에서 또 다른 이를 만났다.
그는 약초꾼보다 좀 더 나이가 지긋해 보였고, 훨씬 좋은 옷차림에 등에는 커다란 봇짐을 지고 있었다.
‘보부상인가?’
단순히 봇짐만 보고 상대를 상인이라 단정한 게 아니었다.
[천옥산 중턱에서 인상 좋은 보부상과 조우했습니다.]
- 대화하겠습니까?
- 공격하겠습니까?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이번에도 현판이 등장했다.
“…….”
진천우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어떤 걸 파십니까?”
“뭘 대단한 걸 팔겠나. 그냥 간단한 생필품이랑 이것저것을 팔지.”
가볍게 대화를 시도했다.
“어디 한번 보겠나?”
그대로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보부상이 봇짐을 풀었다.
[인상 좋은 보부상과 대화하기를 선택했습니다.]
[보상으로 ‘작은 상점 - 천옥산 지점’이 개방됩니다.]
봇짐 안 물건은 생각보다 변변찮았다.
몇 권의 책과 붓, 정체 모를 호리병과 손가락 크기의 돌을 깎아 만든 조각이 다였다.
‘책과 붓은 그냥 평범하고, 이 호리병은 뭐지?’
“그거? 약초물이네. 냄새는 고약하지만 마시면 몸에 좋지.”
“약초물?”
진천우가 의아한 눈으로 호리병을 집다가 두 눈이 커졌다.
[오래돼 산화된 해독제 - (최하급)]
‘해독제?!’
타이쿤이 직접 명시했으니 가짜는 아닐 터.
그는 지금 독괴의 유물을 찾고 있었다.
이 과정에 무슨 일이 벌어질 줄 몰랐다.
“이거 사겠습니다.”
“그래?”
상인이 동전 몇 닢에 호리병을 넘겼다.
오히려 이게 팔리다니 하며 겸연쩍어하는 얼굴.
아무래도 그는 호리병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다음의 돌조각은 그야말로 조잡했다.
타이쿤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것만 사겠습니다.”
“아쉽군.”
보부상이 봇짐을 정리했다.
상인과 헤어지고, 진천우는 다시 산길을 걸었다.
그 속도가 평소보다 빨랐다.
“소가주님,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뒤따라오던 하인이 한마디 할 정도.
물론 현석은 자신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혹여나 제 주인이 무리할까 걱정했다.
“괜찮다. 오늘은 몸 상태가 좋구나.”
“그럼 다행이지만…… 혹시나 현기증이 나면 반드시 제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러마.”
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길 한참 지나자, 산 중턱에서 작은 목조 건물을 발견했다.
“저 건물이 약초꾼이 말한 그 화후의 사당일까요?”
“글쎄다?”
하인의 질문에 진천우는 잠시 말끝을 흐리더니, 곧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물어보면 되겠지.”
현석에게 묻겠다는 게 아니었다.
“저 건물이 화후의 사당이 맞소.”
차박차박!
그러자 이미 한참 전에 헤어졌던 약초꾼이,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수풀을 헤치며 나타났다.
그가 모습을 보인 직후, 아랫길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늦지 않고 따라잡았군. 딱히 대단한 것도 없는 산을 뭘 그리 서둘러 올라가는지.”
아래에서 단숨에 올라온 이는, 조금 전에 헤어진 보부상이었다.
“소가주님!”
현석이 화들짝 놀라 앞으로 나섰다.
누가 봐도 둘의 등장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바보가 아닌 이상, 저 둘이 자신들을 노린 도적이란 걸 모를 수 없었다.
“괜찮다.”
그러나 진천우는 가볍게 웃으며 하인을 뒤로 보냈다.
“하지만!”
“정말 괜찮다. 저자들은 내가 처리할 수 있다.”
그가 그렇게 자신하자, 두 도적이 발끈하고 나섰다.
“하, 혼자서 우리를 처리하겠다고?”
“무슨 자신감이지?”
그런데 진천우는 방금 제 입으로 꺼낸 말과 달리, 둘을 처리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진작에 눈앞의 도적들을 처리했으니까.
- 대화하겠습니까?
- 공격하겠습니까?
진천우는 이때 타이쿤 문구를 보고,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둘 중 굳이 하나만 택할 필요가 있나?
그는 그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동시에 산공독(散功毒)을 뿌렸다.
산공독은 내공을 지닌 무인에게만 효력이 있기에, 그들이 도적이 아니면 별문제가 없었다.
[수상한 약초꾼과 인상 좋은 보부상을 중독시켰습니다.]
[대화와 공격 두 가지 선택지를 모두 만족시켰습니다.]
[그러니 보상이 2배!!]
“허! 어디, 그 솜씨를 견식해 볼까?”
“죽이진 않으마. 대신 건방진 죗값으로 둘 다 옷가지 하나 안 남기고 털어줄 테니, 어디 가문까지 알몸으로 돌아가 보든가?”
둘은 산공독에 중독된지도 모른 채, 한껏 으스대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미 도적이 된 자들에게 거리낌 없이 산공독 외 다른 독도 살포할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알까?
씨익!
진천우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가볍게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