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 양자택일(兩者擇一) (1) (28/210)


28화 : 양자택일(兩者擇一) (1)
2021.09.04.


-정보는 힘이다.

‘옳은 말이지.’

진천우가 방금 막 펼친 책의 첫 문구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에는 강호에서 활동한 수백 명의 인적사항이 적힌 인명록이 들려있었다.

여기 적힌 내용을 잘만 활용하면 무서운 피바람을 몰고 오는 것도 가능했다.

‘단, 이백 년 전이었다면 말이지.’

피식!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랜만에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확실히 이 인명록에 적힌 정보는 대단하지만, 모두 죽은 정보이니.’

책에 적힌 가장 최근 인물조차 백 년도 더 전의 인물이었다.

‘그러니 이만한 내용을 담은 인명록이 가문 서고에 있을 수 있었겠지.’

아마 과거에 어떤 정보단체가 만든 게 돌고 돌아 진씨세가까지 흘러들어온 게 분명했다.

진천우는 그 과정이 대단히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알 길이 없었다.

결국 그는 빠르게 인명록을 넘겼다.

거의 책 끝에서 원하던 내용을 발견했다.

-독괴(毒怪).

-사괴(四怪) 중 하나.

천하의 호사가들은 줄을 세우고 분류하기를 좋아했는데, 십대고수나 오룡, 칠협 따위가 이에 속했다.

그중 사괴는 다른 범주에 넣기 힘든 네 명의 아주 특이한 기술을 가진 이를 묶어 부르는 명칭이었다.

-독괴는 강호의 많은 고수가 그렇듯 출신성분이 모호해 신분을 가늠키 힘든 이 중 하나다.

-그러나 그의 독공은 천하일절로 손색없으며, 이는 오독궁(五毒宮)마저 인정할 정도다.

오독궁은 사파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세력으로, 독에서는 당문과 쌍벽을 이뤘다.

사괴 중 독으로 분류되고 오독궁의 인정까지 받았다면, 독괴는 독공으로 경지에 이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진천우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다음 글을 살폈다.

거기에는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독괴가 어떤 사건, 사고를 일으켜 명성을 높였는지 짧게 적혀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러나 독괴는 그 등장처럼, 어떤 예고도 없이 홀연 모습을 감췄다.

-그 뒤로 그에 관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그 대단한 명성에 비해 상당히 허무한 맺음.

사실 이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 인명록에 기록된 이 중 태반이 그처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무인의 숙명인지도 몰랐다.

‘헌데, 이렇게 갑자기 사라진 독괴의 유물이 우리 가문의 뒷산에 잠들어 있다고?’

세상에 이런 기막힌 우연이?!

하지만 타이쿤이 거짓말했을 리는 없었다.

“흠…….”

진천우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했다.

만일 독괴의 유물이 좀 더 멀리 있었다면.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겠지.’

그러나 하필 우리 가문 뒷산에 있다면…….

다른 의미로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서둘러 준비해야겠군.’

진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준비하는 데 오랜 시간은 필요 없었다.

그가 떠난 자리, 인명록이 여전히 펼쳐진 채 남아있었다.

파라락!

그때, 실내임에도 어디선가 불어온 희미한 바람에 책장이 천천히 넘어갔다.

인명록은 시간 순서대로 기록돼 있었다.

그러니 열 장 내외에 적힌 이들은 모두 동시대 인물로 볼 수 있었다.

얼마 안 가 바람이 멎었다.

책장도 더는 넘어가지 않고 멈추었다.

펼쳐진 인명록 맨 위에 누군가의 이름이 보였다.

-의선(醫仙) 진무경.

* * *

“소가주님과 외출이라니…….”

수년 만에 가문을 나서는 진천우의 옆에, 커다란 꾸러미를 짊어진 현석이 뒤따랐다.

-천옥산에 오르고 싶다고요?

진씨세가의 가모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행여나 아들이 잘못되면 하는 걱정과, 아들이 가문 밖을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감동.

그 외 다양한 감정이 가슴에서 거칠게 휘몰아쳤다.

마음 같아서는 진가의 유일한 무사대인 진검대를 통째로 호위로 붙이고 싶지만, 그건 어려웠다.

장 의원의 실종과 백풍대의 방문, 거기에 금룡가 사건까지 더해지면서, 가문의 경비를 맡은 진검대는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시기에 소가주의 외출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이 생전 처음 청한 가문 밖 외출.

어미 된 마음으로 모쪼록 이뤄주고 싶었다.

‘가문 뒷산인 천옥산 정도면…….’

아마 안전하리라 봤다.

그렇다 해도 당연히 소가주 혼자 보낼 수는 없기에, 진씨세가에서 누구보다 잔걱정이 많은 하인을 옆에 붙여주었다.

그게 바로 현석이었다.

“소가주님과 외출이라니…….”

하인은 가문 정문을 넘은 뒤부터, 계속 멍한 얼굴로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소가주님과 외출이라니…….”

그만큼 믿기지 않았다.

“따라오기 싫으냐?”

“아니! 아닙니다! 싫을 리가요!!”

진천우의 가벼운 대꾸에, 현석이 경기를 일으켰다.

싫을 리가 있나!?

오히려 자신이 직접 소가주를 모시게 돼 말도 안 되게 기뻤다.

그는 그저 이 모든 게 꿈같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좀 전에 한 말이 효과가 있는지, 현석은 더는 혼자 중얼거리지 않았다.

“무려 칠 년 만의 외출이 아닙니까?”

“벌써 그쯤 됐나?”

“네, 틀림없이 칠 년째입니다.”

“미안하구나.”

“네?”

뜬금없이 사과?

“나 때문에 너 또한 칠 년 만에 가문을 나서는 게 아니더냐.”

그랬다.

진천우가 칠 년간 가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면, 그간 하루도 빠짐없이 옆을 지킨 현석 또한 마찬가지란 소리.

심지어 그는 자신과 다르게 건장한 몸에, 무려 한창때의 정신이었다.

그간 얼마나 자신을 참고, 이 답도 없는 환자를 돌봤을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아닙니다. 그게 제 일인걸요. 게다가 전 이따금 오월각주님이 시킨 심부름으로 몇 번이나 저잣거리에 가보았습니다.”

“즉, 그 몇 번 외에는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는 소리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하인이 뭐라 변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째 얘기할수록 말리는 느낌이었다.

애초에 장 의원조차 찍어 누른 주인의 말발을 어찌 당하겠는가.

“하하!”

진천우도 그쯤에서 멈췄다.

딱히 현석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녀석, 앞으로는 자주 나갈 일이 생길 거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천옥산으로 향하는 길 어귀로 파릇파릇한 초목과 색색깔 꽃들이 보였다.

그야말로 싱그러운 생명의 태동.

물론 진씨세가의 정원에도 갖가지 식물을 길러 계절감을 알렸지만.

‘역시 가문 밖에 나와 직접 느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구나.’

마치 가문 담을 경계로 두고 밖과 안의 공기마저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나무지만 유난히 바깥 나무가 더 녹음이 푸르렀고 꽃도 화사했다.

두런두런 지저귀기는 새소리도 그렇게 감미로울 수 없었다.

모든 게 색다르고, 모든 게 흥분됐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조차 아쉬울 정도로 그는 칠 년 만의 외출을 만끽했다.

‘이 모든 게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타이쿤 덕분이다.’

진천우는 시야 구석에 놓인 현판을 바라보며,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현석이 다소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이번 외출로 가슴이 저미는 이는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인은 감히 제가 흘린 눈물에 주인의 들뜬 감정이 식을까, 억지로 감정을 추스르며 화제를 바꿨다.

“천옥산에는 어떤 일로 가시는 겁니까? 딱히 전에 가본 적도 없을 텐데?”

“음…….”

진천우가 고민하듯 눈꼬리를 내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재밌는 소리를 들었거든.”

“재밌는 소리요?”

“그래, 천옥산에 아주 흥미로운 게 있다던데?”

독괴의 유물에 대해서는 아직 비밀이다.

하지만 어쩌면 현석이 뭔가 알지도 몰라, 은근히 물었다.

“아!”

잠시 뒤, 하인이 손뼉을 치며 뭔가를 떠올렸다.

그가 말에 진천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금지(禁地) 전설 말인가요?”

“금지?”

“왜 산 이름부터 천옥(天獄), 하늘에 지어진 감옥이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금지 전설이라니?”

“어라?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전혀 아니다.

타이쿤은 천옥산에 독괴의 유물이 있다고만 했지, 금지 전설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자세히 말해보아라.”

“네?”

“그 전설에 관해 말이다.”

“아! 말하겠습니다.”

현석은 잠시 오래된 기억을 되짚듯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그대로 목소리를 한껏 깔았다.

“아주 먼 옛날, 선계의 신선이 하계로 내려와 천옥산을 발견했습니다. 아니, 그때는 천옥산이 아니라 이름 모를 봉우리겠군요. 아무튼 신선께서는 봉우리 이모저모를 살피더니, 그 산세와 풍광이 자신이 찾던 바로 그곳이라며 손뼉을 치고 기뻐했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를 간단히 간추리면 이랬다.

신선은 자신의 도력으로 천기(天氣)와 지세(地勢)를 한곳에 모아 조화를 이루고, 그 땅에 선계에서 가져온 각종 진귀한 동식물을 풀어 작은 도원경(桃源境)을 만들었다.

“도원경? 처음에 금지라 하길래 무척 무서운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무슨 말씀을! 이건 아주 무서운 이야기가 맞습니다.”

진천우가 살며시 입꼬리를 비틀자, 현석이 대번에 그 말을 부정했다.

그는 아까보다 더욱 목소리를 깔며 설명을 이어갔다.

“생각해보십시오. 도원경의 모든 동식물은 하계가 아닌 선계의 것입니다. 즉 그곳에서는 평범한 잡초조차 하계의 칼로는 자를 수 없고, 되레 그 질긴 잎사귀에 몸이 난자당한다지 뭡니까?”

“무슨?”

주인이 뭐라 하든, 하인은 계속 어처구니가 없는 말을 이어갔다.

“차라리 식물만 있다면 그나마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까 얘기했다시피 신선께서는 도원경에 선계의 동식물을 모두 풀어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도원경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죠.”

“그 말은?”

“네, 틀림없이 시작은 도원경이었지만, 어느새 그곳은 하계와 선계의 것이 서로 섞여 그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생태를 생성했습니다. 이후 천옥산에는,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지만 한번 발을 들이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기이한 금지가 숨어있다고 합니다.”

“흠…….”

설명을 다 들은 뒤, 진천우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를 본 현석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턱에서 손을 푼 진천우가 한마디 하기 전까지.

“네 말이 사실이라면.”

“틀림없는 사실이라니까요.”

“그래, 아무튼 네 말이 맞다면, 누군가 금지에 갔다 왔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네가, 금지는 누구든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

“지금까지 얘기한 금지 전설을 너는 누구에게 들었느냐? 만일 진씨세가의 사람이 그같이 경우 없는 허풍을 퍼트렸다면, 나중에 엄히 문책해야겠구나.”

“어, 그게…….”

현석이 그제야 뭔가 잘못됐음을 느끼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다른 이도 아닌 소가주의 질문에 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한 이가 진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그게 한 삼사 년 전쯤 심부름으로 간 저잣거리에서 약주에 얼큰하게 취한 늙은 거지가…….”

“거지가?”

“예, 지금 생각하면 근방에서 못 본 거지였는데…….”

“그래? 그러면 되었다.”

진천우가 가볍게 웃으며 하인의 말을 넘겼다.

딱히 현석을 혼내려 물은 게 아니었기에 그 정도만 들어도 충분했다.

“금지 전설이라?”

그 순간, 오른쪽 수풀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소가주님, 어서 제 뒤로!”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하인이 서둘러 주인을 제 등 뒤에 숨겼다.

차박차박!

잠시 뒤, 거칠게 수풀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웬 중년인이 모습을 보였다.

“이런. 나 때문에 놀란 모양이군.”

“누구십니까?”

“지나가는 약초꾼일세.”

“약초꾼?”

진천우가 빠르게 상대의 형색을 살폈다.

군데군데 녹색 진액이 묻은 허름한 갈옷에 옆구리에 낡고 커다란 망태를 짊어진 모습이 영락없는 약초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했다.

약초꾼의 등장과 함께 푸른 현판이 또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현판에 적힌 내용이 이전에 없던 특이한 문장이었다.

[천옥산 중턱에서 수상한 약초꾼과 조우했습니다.]

- 대화하겠습니까?

- 공격하겠습니까?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1655096917516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