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패왕의 알
(23/210)
23화 : 패왕의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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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 패왕의 알
2021.08.23.
진천우가 천천히 허공에 손을 올렸다.
[붉은 붓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요)]
[예]
그러자 시야 구석에 혼자 붕 떠 있던 붉은 붓이 크게 한 바퀴 회전했다.
그러더니 곧 멈췄다.
“저곳을 확인하겠습니다.”
붓이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저곳은?”
백풍대 무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진천우가 향하는 쪽에 작은 건물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안은 아주 넓었다.
지상이 아니라, 지하로 공간이 나 있기 때문.
그곳은 금룡가의 죄인을 가두는 지하 뇌옥이었다.
“소가주, 저곳은 우리가 이미 뒤졌네만.”
처음 입을 연 백풍대 무인이 염려 섞인 경고를 보냈다.
그도 진천우가 제 가문을 걸고 금룡가주와 하는 대화를 들었다.
단 한 번뿐인 기회.
그렇다면, 차라리 자신들이 한 번도 뒤지지 않은 곳을 찾는 게 나았다.
예를 들어 금룡가의 가주전이라든지.
“아뇨, 저는 저곳을 뒤지고 싶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후 둘은 몇 마디 더 말을 섞었지만, 상당한 언변 스킬을 쌓은 진천우의 말재간을 당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말로 이기기보다, 상대 무인이 기분 나빠하지 않게 하는 데 신경 썼다.
“알겠소. 소가주가 그리 정했다면 백풍대는 이 이상 관여하지 않겠소.”
보다 못한 백풍대주가 중재해주었다.
-소가주, 정말 괜찮겠소?
물론 그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백풍대주는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어찌 핍박하는지 잘 알았다.
금룡가는 강자고, 진씨세가는 약자다.
최강자인 백풍대가 진가를 떠나면 금룡가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눈에 선했다.
이는 곧 세상의 이치로, 맹도 마음대로 강제하지 못하는 부분.
끄덕!
진천우는 상대의 진심 어린 염려에 감사의 인사를 보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후우!”
백풍대주가 얕게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꽈악!
이를 본 금룡가주가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떻게?’
어떻게 진씨세가의 소가주는 하고많은 장소 중 저곳을 고른 걸까?
‘설마 따로 언질을 들었나?’
머릿속에 배신이란 글자가 떠올랐다.
감히 누가 배신했단 말인가!
그러나 당장은 배신자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설사 진천우가 지하 뇌옥에 금룡가의 비리 증거를 찾더라도.
‘아무 문제 없다. 그저 조금 곤란해질 뿐.’
그랬다.
말 그대로 조금 곤란할 뿐, 결코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그러지 못하도록 그는 이미 만반의 대처를 해둔 뒤였다.
슥!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금룡가주는 금세 안정을 찾고 천천히 진천우와 백풍대주의 뒤를 따랐다.
* * *
뇌옥의 경비는 삼엄했다.
안에 갇힌 죄수가 감히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 가주님?”
“열어주거라.”
“넷!”
하지만 뇌옥을 지키는 금룡가 무인은 맹의 백풍대와 그 뒤의 가주의 명에 뇌옥 문을 열어야 했다.
철컹!
무거운 철문이 불길한 소리와 함께 열렸다.
지하로는 진천우와 백풍대주 그리고 금룡가주까지, 셋만 내려갔다.
뚝! 뚝!
진천우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낮게 울리는 물소리를 들었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천장에 고였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
그런데 그 소리가 조금 둔탁했다.
평범한 물소리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물보다 무거운 그것의 정체를 알아챘다.
‘피 냄새…….’
“왜 그러는가?”
앞서 걷던 진천우가 걸음을 멈추자, 뒤따르던 백풍대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진천우도 맡은 냄새를 백풍대주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반응이 없는 건, 그에게는 혈향과 이 상황 모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여길 살핀 수하의 말로는, 지금 뇌옥에는 한 사람만 있다는데?”
그리 말하며, 그는 금룡가주를 바라보았다.
알아서 자세히 설명하라는 눈짓.
금룡가주는 반강제로 답해야 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순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말을 돌릴 수는 없었다.
“사흘 전에 죄를 짓고 뇌옥에 가둬둔 자입니다.”
“무슨 죄로?”
“……횡령과 절도입니다.”
‘이자가 금룡가에서 잘린 꼬리구나.’
단박에 이해했다.
백풍대가 금룡가에서 찾으려던 비리 증거 역시 횡령과 절도였다.
단, 그들이 찾는 횡령은 금룡가 내부가 아닌, 금룡가와 연계된 상단과의 거래 중 횡령이었고, 이 일로 힘없는 상단 다섯 곳이 자금 부족으로 괴로워했다.
그의 예상대로 계단을 모두 내려가자, 붉은 붓이 가장 구석 뇌옥을 가리켰다.
“으윽!”
그곳만 유일하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음…….”
처참했다.
피투성이, 아니 갖은 고문으로 넝마가 된 노인이 홀로 쓰러져 있었다.
“이 정도까지 해야 했습니까?”
“물론.”
진천우의 물음에 금룡가주는 담담히 답했다.
“우리 금룡가는 진씨세가와 달리 법규가 아주 철저하지. 횡령과 절도는 일단 사지 힘줄을 자르는 것부터 시작한다네.”
거기서부터 시작이면, 눈앞의 노인은 도대체 어디까지 당한 걸까?
진천우는 차마 그걸 묻지 못했다.
“소가주는 이 노인을 다시 살피려 하는가?”
그때, 백풍대주가 먼저 뇌옥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표정.
맹의 규율 또한 금룡가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가(武家)의 상식인가?’
그게 아니면 무림(武林)의 상식이겠지.
진천우는 눈앞의 두 무인을 번갈아 보며 각오를 다졌다.
이를 몰랐던 것도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백풍대주가 그리 말렸음에도 먼저 발을 들인 건 자신이었다.
슥!
뇌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순히 철창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혈향이 더 진해졌다.
“으으윽……!”
노인은 뇌옥 안으로 사람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그저 신음만 흘렸다.
이미 정신을 잃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붉은 붓은 계속 그를 가리키는데…….’
따로 품에 증거를 숨겨둔 걸까?
아니, 그랬으면 먼저 뇌옥을 뒤진 백풍대가 찾지 못했을 리 없었다.
“음?”
가만 보니, 붉은 붓이 노인의 손목을 가리켰다.
진천우가 조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걷었다.
노인의 몸에 뭔가가 새겨져 있었다.
“이건?”
거기 새겨진 건 상당히 긴 수식.
“오호라, 이놈이 제가 빼돌린 걸 몸에 기록한 모양이군!”
그때 금룡가주가 크게 소리쳤다.
뭐?
“설마 제 몸에 이런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남기다니. 너무 예상 밖이라 우리도 미처 찾지 못한 모양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람을 이만큼 고문해 놓고, 몸 위에 새긴 수식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고?
“축하하네.”
“…….”
“정말 한 번 만에 맹의 백풍대도, 찾지 못한 비리 증거를 찾았군.”
“…….”
“약속대로 금룡가는 이번 일에 관해 진씨세가에 일체 책임을 묻지 않겠네.”
진천우는 두 눈에 지독한 환멸감을 담으며, 금룡가주가 지껄이는 말을 들었다.
한편, 제 할 말을 마치자 그는 바로 백풍대주 쪽으로 몸을 돌렸다.
‘똑똑한 녀석이니 이리 말하면 대충 알아듣겠지. 결국 증거가 드러났으니, 이제 맹이 어떻게 나오느냐가 중요한데…….’
그리 생각한 금룡가주는, 잠시 뒤 백풍대주에게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제시했다.
“이자에 대한 조사는 금룡가에서 맡겠습니다.”
이만큼 증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고, 노인에 대한 조사를 다시 금룡가가 맡겠다고?
그건 곧, 금룡가가 스스로 드러낸 꼬리를 알아서 자르게 내버려 두란 말과 다름없었다.
제안을 들은 백풍대주가 지독한 피로를 느꼈다.
‘여기서 내가 억지로 노인을 맹으로 데려가도 결과는 바뀌지 않겠지.’
이미 몸에 새겨진 수식이 너무나 명확한 증거였다.
금룡가는 그 외에도 노인을 범인으로 지목할 여러 증거를 준비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되면, 맹의 지엄한 규율에 따라 노인은 억울하게 죽을 터.
그러니 금룡가주가 저런 제안을 할 수 있는 거였다.
여기서 금룡가에게 조사를 맡기면 노인은 살려주겠다는 뜻이었다.
‘이래서 어설픈 악은 귀찮다니까.’
이럴 때만은 교와 련이 부러웠다.
‘그 두 곳이라면, 애초에 상황이 이리 복잡해지기 전에 그냥 다 썰어버렸을 텐데.’
하지만 백풍대는 맹이었다.
백풍대주는 스스로 맹이란 자부심을 가졌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과연 제 수하들도 놓친 비리 증거를 단번에 찾아낸 진가의 소가주는 여기서 또 어떤 선택을 할지?
노인을 희생해서라도 금룡가의 부정을 척결할 것인가?
그게 아니면, 부정을 덮어두더라도 안면도 없는 노인이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막을까?
놀랍게도 그는 둘 중 어느 것도 택하지 않았다.
“저는 지금 금룡가주님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진천우는 둘 다 아닌, 전혀 엉뚱한,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선택지를 택했다.
“이자의 몸에는 어떤 수식도 그려져 있지 않은데, 도대체 가주님은 뭘 보시고서 그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또 있지도 않은 수식이 부정의 증거라고 하시는 겁니까?”
“뭐라?”
금룡가주가 언성을 높였다.
옆에 백풍대주가 없었다면 아예 고함을 질렀을 텐데.
“보시죠!”
진천우가 기절한 노인의 상의를 벗겼다.
그의 몸에는 깊은 상처와 피멍이 가득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수식은 없었다.
수식은 그저 노인의 손목 위에 단 한 줄만 새겨져 있었다.
“무슨?”
‘그럴 리가!? 분명 온몸 가득 수식을 새긴 걸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금룡가주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 잠깐 사이 수식을 지웠나?
어쩌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뇌옥은 어두웠고, 조금 전까지 자신은 백풍대주에게 집중하느라 다른 곳은 신경 쓰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금룡가주는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이 상황은 오히려 그에게 호재였다.
‘멍청한 놈! 여기서 백풍대주에게 확인도 받지 않고 수식을 지우면, 결국 넌 한 번에 증거를 찾지 못한 셈이 된다는 걸 잊었구나.’
당장은 백풍대주가 옆에 있지만, 그들도 언제까지고 진씨세가를 지켜줄 수 없었다.
백풍대가 돌아가는 즉시, 금룡가주는 직접 가문의 무인을 이끌고 진가를 찾을 생각이었다.
“허나 금룡가주님의 의견도 옳더군요. 백풍대도 설마 사람의 몸에 수식을 새겼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 당장 금룡가 사람들의 몸을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조사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군.”
금룡가주의 눈에 진천우는 제 목에 칼이 들어선 것도 모른 채 날뛰는 망둥이로 보였다.
“그렇군. 그런 이유라면 우리 금룡가도 적극 협조하지.”
해서 그도 순순히 수긍해주었다.
설마 놈이 제 목의 칼로 자신을 겨눌 줄 몰랐기에.
“그럼 당장 금룡가주님부터 확인해야겠군요.”
“뭐?”
“무슨 문제라도?”
“허허!”
웃긴 놈!
금룡가주가 기가 차서 크게 웃어주었다.
“오냐, 까짓 거 확인해 보거라.”
그게 뭐라고.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소매를 걷었다.
당연히 제 몸에 수식 따위 있을 리가…….
“이건?!”
있었다!
왜!?
제 팔에 수식을 본 금룡가주가 화들짝 놀라며 소매를 내렸다.
“가만있게.”
그러나 어느새 다가온 백풍대주가 강제로 그의 소매를 다시 걷었다.
금룡가주는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손목의 수식은 팔을 타고 몸까지 이어졌다.
백풍대주, 금룡가주 둘 다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았다.
오직 한 사람, 진천우만이 차분한 눈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됐다.’
그는 붉은 붓을 얻었을 때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어째서 붓이지?
단순히 숨은 그림을 찾을 뿐이라면, 굳이 붓이 아니어도 되었다.
하지만 붉은 붓은 ‘붓’이었다.
이 의문은 뇌옥에서 노인을 찾고, 노인의 몸에서 수식을 찾자 해결되었다.
[붉은 붓을 사용하면, 찾은 그림을 한 번 흡수해 새로 그릴 수 있습니다.]
[붉은 붓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요)]
[예]
진천우는 망설이지 않고 붉은 붓을 사용해, 수식을 금룡가주의 몸에 옮겼다.
“아니, 이건 오해입니다!”
“그 오해는 맹에서 풀도록 하지.”
“아니라니까! 그, 그래, 진천우 이놈! 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냐!”
다급해진 금룡가주가 백풍대주의 손을 뿌리치고 진천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백풍대주는 금룡가주보다 몇 수 위의 고수.
그런 그가 금룡가주를 놓쳤다?
일부러 놓아준 거였다.
퍽!
백풍대주가 순식간에 금룡가주의 뒤를 붙잡아 혈도를 찍었다.
“감히 내게 저항했을 뿐 아니라, 내 눈앞에서 힘없는 진가의 소가주를 공격하려 하다니. 더는 두고 볼 수 없군!”
‘끝났군.’
이를 본 진천우는 이후, 금룡가의 추락을 짐작했다.
“바깥의 백풍대는 들어라!”
내공을 실은 목소리가 뇌옥 밖으로 퍼졌다.
“지금 당장 금룡가를 완전히 제압하라.”
그 순간, 강맹한 백색 폭풍이 금룡가를 휩쓸었다.
* * *
“소가주님, 차와 다과 좀 드시지요.”
처소에 앉아있는데, 현석이 다과상을 가져왔다.
“너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 가서 쉬라니까.”
“하하,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윽!”
멀쩡한 척했지만 역시나였다.
맹의 무인에게 맞은 상처가 벌써 나으면 도리어 그게 이상했다.
‘그래도 큰 이상이 없다니 천만다행이지.’
슥.
진천우가 손가락으로 다과상 맞은편을 가리켰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소가주님과 겸상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잔도 하나만 가져왔습니다.”
“잔이야 하나 더 가져오면 되지. 아니다. 혹시 술이 있느냐?”
“술이요?”
있긴 있다.
하지만 제 주인께 건넬 물건이 아니었다.
“괜찮으니 가지고 있으면 꺼내거라.”
“허나…….”
“괜찮다니까.”
“알겠습니다.”
현석이 품에서 작은 죽통을 꺼냈다.
인근 객잔에서 거친 야인을 대상으로 파는 싸구려 화주(火酒)였다.
마시기 위해서가 아닌, 혹시 모를 상황에 소독용으로 쓰려고 산 것.
양도 얼마 되지 않았다.
간신히 네 잔쯤?
쪼륵!
막 술을 따르는데,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부당합니다!
-전 억울합니다!
요 며칠 백풍대가 천지사방을 휩쓴 덕에, 어렵지 않게 곡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그 소리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생각이 깊어졌다.
미리부터 술을 찾기 잘한 듯했다.
‘철기방, 녹청문, 금룡가 모두 인근에서 손꼽히는 세력이건만.’
아무리 자신이 계기를 만들었다지만, 너무나 손쉽게 털렸다.
‘만일 저들이 명문(名門)이었다면 이런 수모는 어림도 없었겠지.’
꿀꺽!
진천우가 천천히 술을 넘겼다.
독하고 썼다.
알싸한 향과 싸한 감각이 목구멍이 몸속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확인시켜주었다.
당연히 환자에게 술은 엄금.
즉, 이건 그가 처음 맛보는 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처음이어도, 이 지독한 씁쓸함이 단순히 술맛 때문만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쪼르륵!
“받거라.”
잔이 하나뿐이라, 그는 방금 비운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현석이 그걸 보고 황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못 마시는 게 아니면, 그냥 받거라.”
재차 잔을 건넸다.
이전부터, 술을 마시게 되면 꼭 현석과 함께하겠다고 생각해 왔다.
“감사합니다.”
하인이 화주를 넘겼다.
생각보다 술술 마시는 걸 보니, 단순히 소독용으로만 화주를 지녔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 뒤, 현석이 공손하게 빈 잔을 채웠다.
슥.
두 번째 잔을 들며 생각했다.
천하제일 타이쿤은 무엇이고, 자신은 어떻게 바뀔 것이며, 나아가 진씨세가를 위한 길이 무엇일지.
답을 내리는 데 오랜 시간은 필요 없었다.
‘강해지자.’
힘이 필요했다.
맹이 명분을 중시한다지만, 그건 결국 한 손에 이미 막강한 힘을 손에 넣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약자가 주장하는 공명정대함과 형평성은 개소리에 불과했다.
적어도 이번에 자신은 그렇게 느꼈다.
꿀꺽!
진천우가 다짐을 마치며 잔을 넘겼다.
놀랍게도 잔의 내용물은 전과 똑같건만, 갑자기 술이 달아졌다.
그러더니 눈앞에 새로운 글귀가 나타났다.
[튜토리얼 퀘스트를 완수했습니다.]
[사용자의 마음가짐을 확인했습니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천하제일 타이쿤, 패도(霸道)의 길’이 해금됩니다.]
[튜토리얼 보상으로 ‘패왕(霸王)의 알’이 주어집니다.]
‘패왕의 알?’
막 현판의 글을 모두 읽자.
화륵! 찰랑! 으직!
눈앞에 각각 불(火), 물(水), 나무(木)로 이뤄진 어린아이 주먹만 한 ‘알’이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