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영화로써 이룰 수 있는 모든 업적은 다 이룬 정우현.
그는 어딜 가든 존경을 받았다.
비단 영화뿐만이 아니었다.
국제 정치와 사업, 운동과 학문 등 그가 집중한 모든 분야에서 그는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을 남겼다.
정우현은 모든 부문에서 세계 최고였다.
그리하여 2038년.
정우현의 나이 46세에, 그는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의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를 생각하게 됐다.
“우현 님.”
“예.”
언제나 그렇듯 함께 산책을 하는 정우현과 엘라. 둘은 팔짱을 끼고 좁다란 오솔길을 걸었다.
엄규환을 포함한 경호팀은 따로 붙지 않았다.
정우현은 엘라와 산책을 할 때면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위해 그녀와 단둘이 있는 걸 선호했다. 행여 경호가 필요한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면, 정우현이 막강한 격투 실력으로 직접 처리하면 됐다.
엘라가 정우현을 부르고는 그와 눈을 맞췄다.
“이제껏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뜻깊지 않으세요?”
“……하하.”
마침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던 정우현은 엘라의 말에 천천히 웃었다.
“맞습니다.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을 하네요.”
“저는 무엇보다.”
엘라가 긴 은빛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였다.
“세계에 평화가 찾아온 게 참 기쁘네요. 그거 아세요? 지구촌 곳곳에 공식적으로 내전이나 분쟁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지 벌써 몇 년이 됐습니다.”
“오오, 그렇습니까?”
정우현이 기뻐하며 반문했다.
과거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항상 크고 작은 분쟁이 지구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우현의 유엔 사무총장 역임 이후 그런 일들이 빠르게 사라지면서, 오늘날 세계에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사람들이 이렇게나 오래 사이좋게 지내는 일은 처음이었다.
“예. 심지어 빈부 격차도 그 어느 때보다 덜하고요, 그간 후진국으로 분류됐던 대다수 국가가 빠르게 성장하여, 세계는 유례없는 번영의 시대에 도달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하고 엘라가 잠시 말을 하지 않더니, 정우현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써 현시대를 전 세계적인 황금시대로 명명하고 있어요. 유토피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지상에, 도래하고 있다면서요.”
“하하하하.”
정우현은 기분이 좋아 크게 웃었다.
“그거, 참 잘된 일이군요! 그나저나 엘라.”
하고서 엘라에게 장난스러우면서도 다정하게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우리 오랜만에 분식점에 가서 떡볶이나 사 먹죠. 순대에 튀김도요. 특별히,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우현 님 아까 식사하지 않으셨습니까?”
“으음, 나이가 드니 배가 빨리 꺼지네요. 키가 더 크려고 그러나, 하하.”
그러고서 정우현이 엘라를 이끌고 단골 분식점에 가려는데 누군가가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검은 정장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신원 불명의 중년 남자였다.
하지만 정우현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에 조금은 경계심을 표출하며 엘라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 앞에 섰다.
“무슨 일입니까?”
“정우현 님을 모시려고 왔습니다.”
“저는 엘라와 함께 지금 떡볶이를 먹으려고 합니다만.”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얼른 가셔야 합니다.”
정우현은 엘라의 손을 잡고 중년의 남자를 지나치며 말했다.
“지금 제게 엘라랑 같이 떡볶이를 먹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 * *
분식점.
정우현이 엘라와 떡볶이를 먹고 있다. 특히 정우현은 배가 고픈지 무지막지한 속도로 먹었다. 어묵에 김밥 그리고 튀김까지 주문했다.
반면 엘라는 긴장해 좀처럼 먹지 못했다. 정우현은 괜찮다면, 그런 그녀의 입에 오징어 튀김 하나를 집어 주었다.
조금 멀찍이 떨어져, 그들 뒤에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가만히 서 있었다.
정우현이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어떻게든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일까요?”
엘라가 오물오물 튀김을 씹어 삼키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하하, 신경 쓰지 말고 엘라. 우리 떡볶이나 먹어요.”
하고 정우현이 말했지만, 엘라는 중년의 남자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엄규환 실장님께 빨리 알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저 남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아닙니다.”
정우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각종 분식으로 그의 양 볼은 빵빵했다.
“저는 저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요?”
“예, 오래전 봤던 사람이죠.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지만, 하여간 괜찮습니다.”
“…….”
엘라는 여전히 긴장한 채 중년의 남자를 힐끗힐끗 봤다.
* * *
정우현은 떡볶이를 다 먹고 중년의 남자를 따라 검은 승용차에 탑승했다.
하지만 엘라는 태우지 않고, 돌려보냈다. 엘라가 함께하겠다고 했지만, 정우현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결정적으로 중년의 신사 또한 엘라는 데려가지 않으려 했다.
“……우현 님,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요?”
엘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정우현을 바라봤다.
“하하, 그럴 일 없습니다. 저녁에 연락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정우현이 말하고서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라. 만약 제가 밤 9시까지 연락을 하지 않는다면, 제 핸드폰을 추적하세요.”
“…….”
정우현의 말에 엘라는 조금 겁을 먹었다.
하지만 이내 정우현이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 어디까지나 만약, 만약 입니다. 뭐,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고서 그는 중년의 남자가 이끄는 대로 차를 타고 갔다.
몇 시간에 걸쳐, 차가 도착한 곳은 경기 북부의 한 고즈넉한 건물이었다. 사람들의 왕래는 거의 없는, 비밀스러운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정우현은 예상했다는 듯 무심한 눈빛으로 건물을 보더니, 제 발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중년의 한 남자가 은빛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우현은 남자를 보고 곧장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비밀스러운 주최자님.”
하고 정우현이 슬며시 웃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아니, 바이에른 광명회의 후계자이자 회장님이라고 해야 하나.”
남자는 오래전 독일 바이에른에서 열렸던 세계 기업인 모임의 주최자였다.
당시 정우현은 권유라의 아버지인 에이치자동차 회장의 초대로 그 모임에 참여하며 바이에른의 한 건물에 들어섰다.
그때 2층에서 아무런 말도 접근도 없이 그저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젊은이가 있었다. 세월이 흘러 현재 그 사람이 중년의 나이가 되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정우현을 모시기 위해 직접 찾아온 정장 차림의 남자는, 당시 바이에른에서 건물 입장 시 자신의 몸을 수색했던 남자였다.
정우현은 그날 단 하루 잠시 본 그들의 인상착의와 생김새를 모두 어제 일처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애초 정우현의 기억력이 마치 컴퓨터처럼 거의 모든 것을 머릿속에 그대로 남겨 둘 뿐만 아니라, 그날의 기억이 무척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라와 달리 그리 긴장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정우현이 아는 그들이라면 직접 힘을 사용하는 등, 괜한 거친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 확신했다.
“자리에 앉으시죠, 정우현 님.”
의자에 앉아 있는, 백인의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기다랗고 굽은 매부리코 아래, 가느다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
하지만 정우현은 움직이지 않고서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는 사뭇 날카로운 표정으로 매부리코 사내를 주시했다.
“저를 이렇게 찾고 데려왔으면, 먼저 자기소개를 하는 게 예의 아닙니까?”
정우현의 말에 남자는 곤혹스러운 듯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정우현은 계속해서 그를 압박했다.
“왜요, 이렇게 된 마당에, 아직도 숨기고 뭐고 할 게 있습니까?”
하고서 그가 한마디 말을 이었다.
“로일드 경?”
“으음.”
매부리코 사내는 자신의 굽은 코를 만지작거렸다.
“역시, 당신은 제가 누구인지 알고 있군요.”
“어떻게 모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우현이 과거를 떠올렸다.
“그날 바이에른에서의 모임 이후, 저는 다시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됐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업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국제기구에서 일하게 됐으니까요.”
“…….”
“그런데도 틈틈이 당신의 정체가 궁금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추적했습니다. 그러자 이내 답이 선명해지더군요. 세계 기업인 모임을 주최하는 비밀스러운 자본가. 그럼 로일드 가문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은 물론 당시 나이가 젊었던 만큼 후계자일 테고요.”
“맞습니다.”
로일드 가문의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답했다.
“정우현 님의 추측이 모두 맞습니다. 그럼 이런저런 서두는 뒤로하고 본론부터 얘기하겠습니다. 제가 이곳 한국에 와 정우현 님을 찾은 이유는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안이라는 말에 정우현이 코웃음을 쳤다.
“별로 마음은 가지 않지만, 이렇게 수고스럽게 절 찾아왔으니, 한번 들어나 보죠. 뭡니까, 그 제안이라는 게?”
“……정우현 님은 ‘신세계질서’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하하하.”
정우현이 젊은 로일드 가문의 후계자 말에 크게 웃었다.
“이렇게 저를 찾아서 한다는 얘기가 고작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음모론인가요?”
“……음모론이라고는 하지만…….”
로일드 경은 오른손으로 검지를 빙빙 돌렸다.
“더군다나 전체주의적 세계 지배를 할 거라는 등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나돌고 있지만, 일부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모두 인류를 위한 길이죠. 단일의 세계 정부를 수립해, 인류를 통합하여, 완전한 질서를 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고서 그는 목소리를 나지막하게 깔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계획에 정우현 님이 합류해 주셨으면 하고요.”
“하하하, 진짜, 재밌는 얘기를 하는군요.”
정우현의 웃음에 로일드 경은 짐짓 여유로운 척 답했다.
“이미 세상은 단일 시스템에 의해 작동하고 있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하고서 그가 자신의 상의 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정우현 앞에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돈이었다. 그것도 100달러짜리 돈이었다.
“바로 이 돈. 자본에 의해 세상은 돌아가고 있죠. 저는 그 시스템을 토대로 세계 모든 국가를 초월하는 단일 정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고서 그가 정우현의 눈치를 보며 재차 강조했다.
“그리고 이 과정상 정우현 님이 꼭 필요하고요.”
“왜요?”
정우현은 재밌다는 듯 모르는 척 물었다.
“제가 왜 필요하죠? 더군다나 하필, 왜 지금입니까? 이런 말을 하고 싶으면 과거 바이에른에서도 언제든 얘기할 수 있었을 텐데.”
“솔직히.”
정우현의 말에 사내는 조금 부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때는 정우현 님이 이렇게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
“물론 더 오래전부터 정우현 님의 명성은 저 또한 익히 들었습니다. 일찌감치 수학 천재로 이름을 날린 데다, 집중하는 모든 일은 성공하고, 나아가 자신만의 사업을 크게 일으키는.”
하고서 그가 잠시 정우현을 바라보고 재차 입을 열었다. 얇은 입술 안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그런 인물이 어디 한 둘입니까? 그래서 정우현 님 또한, 그 기업인 모임에 오는 숱한 자본가 중 그저 한 사람으로 남을 줄 알았죠. 딱히 따로 접촉할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중요한 건 현시대의 근본인 자본을 근원적으로 통제하는 힘이니까요. 그런데.”
한순간 로일드 경은 한층 더 진지한 표정을 하며, 눈에 힘을 줬다.
“어느 순간부터 국제 사회를 좌지우지하며, 세계의 큰 흐름까지 손에 쥐고 흔들더군요. 그리고 놀랍게도 자본을 국가적으로 통제하려던 중국을 무너트린 것을 넘어 아예 자본의 발상지인 유럽과 그로부터 탄생한 미국의 헤게모니를, 이 땅 한반도에 자리 잡은 통일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즉 세계와 자본의 흐름을 오로지 홀로, 마치 체스 판의 말을 놓듯 간단히 결정했다는 뜻이죠. 솔직히 이 점은 저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그가 다시 표정을 조금 풀었다. 가느다란 눈꼬리가 조금씩 씰룩이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뒤늦게 정우현 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정우현 님은, ‘신세계질서’를 위한 필수적인 파트너가 될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 정우현 님, 부디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로일드 경의 말에, 정우현이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짧게 답했다.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