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계속되는 영화 <판타지 러브 댄스> 촬영.
최후의 악역 브래드 퍼트가 나타났다. 그는 노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몸을 자랑하고 있었다.
"코리안 드림을 이루러 간다기에."
브래드는 조카 엘라를 험상궂은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 하나 했더니 고작 연애 중이냐!"
"……삼촌!"
브래드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는 엘라.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차마 하지 못하는 기색이다.
극 중 엘라는 삼촌인 브래드가 홀로 키웠다.
엘라의 부모는 어릴 적 교통사고로 죽어 삼촌 브래드가 조카인 엘라를 거뒀다.
엘라에게 브래드는 부모 이상의 존재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런 삼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서, 가자! 미국으로!"
"아아,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자, 얼른!"
하고 엘라를 데리고 사라지는 브래드 퍼트.
정우현은 엘라의 아련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끝내 잡지 못한다.
그 또한 극 중 엘라의 어릴 적 이야기를 그녀에게서 들었다.
그래서 엘라를 데려가는 삼촌 브래드를 일단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컷, 오케이!"
정우현의 외침과 함께 장면이 하나 끝났다.
* * *
"하하하, 우!"
브래드가 크게 웃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호탕한 웃음이었다.
"너, 얼마 만의 영화냐, 이게!"
"<바이 더 베테랑> 이후 처음이니까……."
정우현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거의 한 20년 만이네요!"
"그래, 그래, 20년."
하고서 브래드는 감상에 빠진 듯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뒤늦게 천천히 말을 꺼냈다.
"아아, 참 세월 빠르구나, 우. 영화가 거의 20년 만이라는 거지."
"예."
"음, 사실 네가 대한민국 대통령을 끝으로, 꽤 오랫동안, 어쩌면 영영 쉴 거로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이렇게 네가 영화판에 다시 돌아와서 나는 참 좋다!"
"저도 즐겁습니다!"
정우현은 브래드만 만나면 마치 어릴 적 소년 왕으로 돌아간 듯 의기양양해졌다. 무척 기쁘고 신이 났다.
"하하하하!"
브래드도 정우현을 만나면 마찬가지로 활력이 더했다.
브래드 퍼트의 나이는 어느덧 70대. 완전한 노년이 되었다.
물론 워낙 관리를 잘해, 언뜻 보면 70은커녕 60도 안 되어 보였지만 그래도 나이는 나이. 브래드 퍼트는 나이만 생각하면 이제 부정할 수 없는 할아버지였다.
그런 그가 정우현을 만나면, 그것도 영화를 위해 만나면 역시 젊었을 적 <인크레더블 킹 보이>를 촬영할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했다.
브래드는 정우현과 함께하면, 더군다나 영화를 같이 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우."
주름진 얼굴의 브래드는 미소를 씨익 지었다. 미소를 지을 때만큼은 젊었을 적의 외모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10년 전에 영화계를 은퇴했다."
브래드는 정우현의 <바이 더 베테랑>으로 남우 주연상을 차지한 후, 수년을 더 활동하다가 은퇴했다.
"그래도 내가 자청해서 너의 영화에 출연한 이유를 알고 있니?"
브래드의 눈이 반짝거렸다. 눈만 보면 노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
정우현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알 것 같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브래드의 말을 그저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이번이."
정우현을 보고 브래드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서 그렇다. 너와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브래드."
정우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브래드의 이름을 불렀다.
"우, 고맙고, 한편으로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널 만나고, 이렇게 늙어서도 함께 영화를 할 수 있어서."
브래드는 정우현의 등을 토닥였다. 정우현은 브래드의 손길에서 예전 같은 묵직함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가벼웠다. 영락없는 노인의 손이었다.
정우현은 말없이 브래드를 바라봤다. 그러다가는 한순간 와락 그를 안았다.
* * *
영화 촬영이 계속됐다.
극 중 엘라는 미국으로 떠났다. 삼촌 브래드에 의해 반강제로 잡혀 떠났다.
떠난 엘라로 인해 정우현은 번민하기 시작했다.
어느 허름한 라이브 카페.
정우현이 좌석이 비어 있는 피아노 옆에서 홀로 술을 마신다.
그러다가는 슬쩍 피아노를 바라본다.
이내 천천히 피아노 앞에 앉는 정우현.
건반에 기다란 손가락을 올리고는 살며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디리딩.
"오오……."
웅성대는 카페 안의 사람들.
정우현의 피아노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단순히 잘 친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했다.
베토벤, 모짜르트, 라흐마니노프, 쇼팽 등 인류사 피아노를 가장 잘 다룬 음악인들을 현시점 정우현이 뛰어넘으며 연주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정우현은 앞서 말한 음악가들보다 더 깊고 아름다운 피아노곡까지 만들었다.
"NG!"
한데 자꾸 NG가 났다.
그러니까 정우현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곡을 가장 아름답게 연주하는데, 계속 NG가 났다.
주위 엑스트라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려서 그랬다.
원래 그들은 정우현의 피아노 솜씨에 놀라면서도 그저 그를 물끄러미 바라봐야 했다.
그래야 카메라 중앙 정우현이 비치며, 그의 슬픈 감성과 피아노 선율이 돋보인다. 그것이 감독이자 배우인 정우현의 연출 의도였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정우현의 연주는 정말 미칠 듯이 아름다웠다.
마치 전설 속 세이렌의 노래처럼 사람들을 홀리는 강력한 무언가가 있었다.
엑스트라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계속해서 NG가 났다.
"이런."
정우현도 조금 놀라서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 실력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전혀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정우현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이, 이미 세계 최고의 두뇌와 신체로 인정받은 것 이상으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실상 정우현은 역사상 그 어떤 음악가보다도 뛰어난 천재였다.
그런데도 그는 여태 음악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더 집중했다. 그것이 음악적 업적이 거의 없었던 이유였다.
"흑흑……."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정우현.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재능과 실력에 도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장면에서 계속 NG가 나는 등 촬영이 전혀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자, 집중."
결국, 정우현은 눈에 힘을 준 채 사람들을 바라보고 굳게 입을 열었다.
"모두, 자신의 역할에 집중해 주세요."
감독이자 주인공인 정우현의 말에 엑스트라들은 뒤늦게 눈물을 닦으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다시 촬영이 시작됐다.
띠리딩딩.
피아노를 치는 정우현.
역시나 아름다운 선율이 흐른다.
하지만 엑스트라들은 이전처럼 울지 않았다. 그들은 시나리오대로 제 역할에 집중하며, 연주하는 정우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엑스트라들의 연기가 이처럼 가능한 이유는, 그들이 정우현의 음악에 이전보다 덜 감동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정우현이 일부러 엉성한 연주를 했다.
아까처럼 최선을 다해 피아노를 치지 않고, 일부러 대충 연주를 했다.
정우현은 그래야 촬영이 진행되리라 판단했고, 역시나 그의 예상이 맞았다.
"컷, 오케이!"
즉시 피아노 장면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 * *
물론 정우현이 최선을 다한 위대한 연주가 고스란히 촬영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영상에 소리를 따로 입히면 모두 말끔히 해결되는 문제였다.
어쨌든 그는 음악가로서 연주회를 하는 게 아니라 감독으로서 영화를 촬영하고 있으니까.
이어지는 영화 촬영.
다시 원산 앞바다.
정우현은 브래드 퍼트가 윈드서핑으로 도착한 해변 앞에 우뚝 서 있다.
그것도 수영복 차림으로 있었다. 전신에 완벽하게 근육이 잡혀 있는 정우현. 그가 수평선을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아아아앗!"
그러고는 큰마음을 먹은 듯 기합을 한번 내지르고 바다로 풍덩 빠져 헤엄친다.
그는 이대로 태평양을 가로질러 미국 LA까지 수영하기로 결심했다.
* * *
영화 설정상 엘라의 삼촌인 브래드 퍼트는 무려 돛과 서핑 보드로만 태평양을 횡단해 미국에서 한국으로 와 엘라를 데려갔다.
극 중 정우현은 그런 그녀의 삼촌을 설득하려면 윈드서핑 이상으로 훨씬 더 강하고 극적인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정우현이 수영을 한다.
엄청난 속도다.
정우현이 진지하게 수영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실로 압도적인 속도였다.
공식적으로 측정하지는 않았지만, 정우현의 자유형 속도는 촬영 중 100m 기준 39초에 달했다.
세계 신기록인 46초보다 무려 9초나 빠른 속도였다.
촤자자잣!
엄청난 속도로 계속 헤엄을 치는 정우현.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다시 해가 져도 계속 헤엄을 친다.
그리고 어느 밤 태평양 한가운데.
정우현이 역시 수영을 하고 있다. 그의 팔과 다리가 거침없이 대양을 가르고 있다.
그런데 한순간 바다가 형광색으로 푸르게 빛나더니,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도 온통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동시에 정우현의 주위로 한 무리의 돌고래 떼가 나온다.
끄으으으으!
까아아!
헤엄을 치는 정우현의 주위를 빙빙 돌며 노래를 하는 돌고래들.
이내 음악이 흐른다.
밤하늘의 별과 그 못지않게 빛나는 바다를 무대로 펼쳐지는 장대한 광경.
노래하는 돌고래들 사이 정우현의 몸이 온전히 수면 위로 드러나 상공을 향한다.
이내 상공의 그를 바라보는 신비로운 초록색 빛의 커다란 눈. 커다란 눈이 바다 한가운데에 있다.
대왕고래였다. 대왕고래가 수면 아래에 있다가 수영을 하는 정우현을 수면 위로 들어 올렸다.
“아아.”
정우현은 거대한 고래와 눈을 마주쳤다. 아니, 마주쳤다기보다는, 고래의 눈 속에 자신이 흠뻑 담긴 것만 같았다.
그 상태 그대로, 마치 배가 바다 위를 떠다니듯, 고래를 타고 편하게 앞으로 향하는 정우현.
대왕고래의 커다란 눈이 깜빡거린다. 동공이 출렁이며 초록빛이 더 강렬해진다. 돌고래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하늘과 바다는 계속 반짝거린다.
두둥.
두루둥.
두두두두!
이윽고 정우현은 돌고래들의 울음소리에 맞춰 몸을 흔든다.
이른바 고래 댄스였다.
“기다려!”
순간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치켜드는 정우현.
태평양 한가운데에서의 환상적인 춤과 노래 장면이었다.
이 영화의 제작비 중 상당 부분이 이 장면을 위해 할당됐다.
실제 태평양 한가운데서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거기에 돌고래와 대왕고래의 눈 그리고 형광색으로 반짝거리는 하늘과 바다 모두 엄청난 컴퓨터 그래픽 작업이 필요했다.
“기다려요, 그대!”
두두둥!
그침 없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정우현. 팔과 다리가 리드미컬하게 때론 현란하게 움직인다.
카메라는 상공 위로 멀어지고, 사방이 휙휙 돌며 어지러울 정도로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다.
* * *
마침내 정우현은 헤엄을 쳐 미국 LA에 도착했다.
미국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며 그런 그를 보고 신기해했다. 하지만 정우현은 그들에게 눈빛 한번 주지 않았다.
중요한 건 오직 엘라, 엘라를 만나는 일이었다.
마침내, 엘라가 전에 알려 준 주소에 도착한 정우현.
드넓은 마당 한가운데 서서 있는 힘껏,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어머!”
3층 창문이 열렸다. 고개를 내민 엘라는 놀란 눈으로 정우현을 바라봤다.
하지만 기쁜 기색도 잠시였다. 이내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삼촌 브래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브래드의 등장에 다시 노래하는 정우현.
“태평양을!”
그는 마치 헤엄을 치듯 몸을 유연하게 흔들며 노래를 이었다.
“건너왔습니다. 이 몸뚱이 하나로요오오!”
“아니, 정말인가아아아!”
놀라는 삼촌 브래드. 자신의 금발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고 눈을 크게 떴다.
브래드는 정우현이 이렇게까지 이곳에 올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 못 했다.
놀란 표정 그대로 큰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브래드.
“대단하군, 젊은이이이!”
하고는 그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든다. 정우현보다 몸동작이 크다.
“자네를 너무 과소평가했구우우운! 그렇게나 내 조카를 원하는가아아아!”
“그렇습니다아아!”
정우현 역시 서서히 몸을 흔든다. 브래드보다 더 빠르고 격렬하다.
“그럼 내가 한 가지 내기를 제안하지이이이!”
브래드는 머리를 넘어 어깨까지, 거의 상반신을 창밖으로 하고 노래했다.
“뭐요오오오!”
“배틀!”
그러고서 놀랍게도 브래드는 3층에서 지상을 향해 단숨에 뛰어내렸다.
쿵!
하고 사뿐히 착지한 브래드.
“나와 댄스 배틀을 하세에에에! 자네가 이기면, 우리 조카를 주겠네에에!”
정우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