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권유라가 찾아온 날.
마침 정우현은 집에 혼자 있었다.
새 영화 <판타지 러브 댄스>와 관련한 모든 세부 계획을,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검토하고 있었다.
“어, 유라야?”
정우현은 조금 놀라며 권유라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아니, 몇 년간 권유라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우현이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재선까지 성공할 때는 가끔이라도 만났었다.
권유라의 아버지가 에이치그룹 회장이 되고, 수년이 지나 권유라도 에이치자동차의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둘은 대통령과 기업인으로서 공적으로 만나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그전처럼 친밀하게 함께하지는 못했다.
일단 정우현이 국정 운영으로 워낙 바빴고, 권유라 역시 거의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야?”
정우현은 집에 찾아온 권유라를 살폈다.
정우현과 동갑인 권유라의 나이 또한 마흔네 살.
중년의 여성이지만 재벌가 기업인 특유의 세련되고 부유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즉 권유라는 재계에서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손꼽히는 여성 리더로 성장해 있었다.
다만 이 순간 권유라가 어울리지 않게 조금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눈 끝이 부자연스럽게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왜.”
권유라가 짐짓 퉁명스럽게 입을 벌렸다.
“난 너희 집에 오면 안 돼? 꼭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와야 해? ……언제부터 내가 따로 허락을 받고 왔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 40년 전, 정우현의 집에 매일같이 드나들었던 어린 꼬마 아가씨가 바로 권유라니까.
한데 그런 그녀가 시간이 흘러, 조금은 어색한 모습으로 정우현의 집 안에 있었다.
“……아, 오랜만이라서 그러지, 유라야. 연락도 없이.”
하고 정우현이 말하자 권유라가 빠르게 답했다.
“흥, 연락은 좀 네가 하면 안 되니.”
그러고서 권유라는 마치 자신의 집인 양 자연스럽게 걸었다. 역시 또 익숙한 손놀림으로 냉장고를 열고 음료를 찾아 컵에 따라 마셨다.
정우현의 집 안에 있는 모든 가구와 가전제품 그리고 식기 등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머님, 취향은 여전하시네. 접시 정리하시는 거랑.”
권유라는 여전히, 정우현의 어머니를 어머님으로 칭하고 있었다.
“하하, 어머니야 항상 그렇지.”
정우현이 멋쩍게 웃었다.
권유라는 냉장고에서 직접 꺼내 따라 마신 주스를 한 모금 홀짝이더니 다시 자리를 옮겨 정우현 곁으로 갔다.
그러고서는 그가 열중하고 있었던 작업을 힐끗 봤다.
새 영화 <판타지 러브 댄스> 시나리오와 그와 관련된 촬영 계획이었다.
“영화 준비 중이구나.”
“응, 오랜만에 한 편 찍고 싶어서.”
그러고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권유라는 물론 친구 정우현이 대통령 퇴임 이후 쉬고 있다가, 모처럼 활동을 시작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신작 제작 계획을 발표했는데 뮤지컬 심지어 로맨스 영화라는 것에서 자연스레 관심이 더 생겼다.
근데 놀랍게도 상대가 엘라였다.
정우현과 거의 모든 것을 함께하는 엘라가 이제는 그와 영화도 찍게 됐다.
이에 그녀는 직감했다.
오랫동안 인정하기 싫었지만, 지금이야말로 결국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바로 정우현의 여자는 엘라 로렌츠라는 것을.
물론 권유라는 아주 오랫동안, 그 누구보다 빨리 친구 정우현을 이성으로서 마음에 품었다.
이성에 호기심이 생길 나이, 즉 사춘기 즈음부터 그랬다.
하지만 권유라는 급히 생각하지 않았다. 죽마고우인 친구 정우현과 앞으로 영영 가까이 지낼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우현과 권유라는 한국영재학교를 졸업하고서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됐을 때부터 자주 보지 못하게 됐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고서는 각자의 일로 더 바빠져 연락마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20대의 젊은 권유라는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신만만했고, 여전히 갖고 싶은 모든 걸 가질 수 있다고 확신했으니까.
바로 일과 사랑. 즉 아버지를 따라 사업에 매진하고, 사랑하는 정우현 또한 완전히 자신의 남자로 만들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 여자, 엘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상대 역은 엘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권유라가 짧게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 응. 저번에 같이 춤을 춰 봤는데 재능이 엄청나더라고. 좀만 연습시키면 아주 멋질 것 같아. 더군다나 엘라는 노래도 잘 불러서…….”
“엄청.”
권유라는 정우현의 말을 잘랐다.
“기뻐하네. 그 여자에 관해 말할 때면. 너, 나한테도 그런 적 있어?”
“…….”
갑작스러운 권유라의 말에 정우현은 입을 다물었다.
권유라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우현아.”
“응.”
“너.”
“…….”
“그 여자 사랑하니? 엘라 로렌츠를?”
“응.”
정우현은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로 답했다.
“사랑해. 아주 많이.”
“하…….”
권유라는 역시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은 오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입술을 깨물며 탄식을 내뱉었다.
알고 있는 것과 그 알고 있는 사실을 실제로 겪는 일은 완전히 다르니까.
“그럼 나.”
“응, 유라야.”
“하나만 또 물을게.”
“…….”
권유라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윤기가 나는 붉은 입술이 동그랗게 움직였다.
“……나도 사랑했어? 우현이 너, 나는 사랑했냐고…….”
정우현은, 답을 할 수 없었다.
물론 권유라가 하는 물음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다.
권유라를 엘라처럼, 여성으로서, 열렬히 사랑한 적 있냐는 뜻이었다.
이에 생각해 보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함께한 친구다.
그래서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서 한순간 가슴 떨리는 설렘과 함께 연정이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마음을 지금 여기서 권유라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반면 사랑했었다고 거짓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친구인 권유라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니까.
“…….”
잠자코 시선을 돌리며 아무 말을 않는 정우현을 보고 권유라가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는 한순간 헛웃음을 지었다.
“……하, 됐다. 내가 너랑 무슨 얘기를 하니.”
하고서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활달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 조금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넌 항상 그랬어. 어릴 때부터, 내가 뭔가 진지한 얘기를 하려고 하면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주면서도, 모르는 척 다른 말을 하거나 입을 다물더라.”
권유라는 원망이 섞인 눈빛으로 정우현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에 힘을 풀고 체념하듯 웃었다.
“하하, 진짜, 내가 바보야, 내가 바보지.”
하고서 자신의 가방 안에서 네모난 갈색 봉투를 꺼내 정우현에게 건넸다.
정우현은 가만히 그 봉투를 받아 내용물을 꺼내 살펴보았다.
청첩장이었다.
권유라는 청첩장을 주기 위해 오랜 친구인 정우현의 집에 찾아왔다.
“……오.”
그제야 정우현이 놀라며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신랑, 즉 권유라의 남편이 될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정우현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에이치그룹과 함께 대한민국 최대의 기업인 에스그룹의 후계자였다.
정우현이 대통령 시절 몇 번 직접 만난 사람이기도 했다.
“뭐, 어쩌다가 그렇게 됐어. 처음엔 당연히 비즈니스로 봤는데, 계속 보니 나쁘지 않더라고.”
하고는 권유라가 묻지도 않은 말을 마치 해명하듯 했다.
“그리고 내 나이, 사십 중반이잖니. 언제까지 혼자 지낼 수는 없고. 더 늦기 전에 해야지, 결혼. 그리고 뭐, 사업에 큰 도움도 될 테고.”
권유라는 모든 사항을 고려해 이번 결혼을 결정했다.
즉 그녀 자신과 그녀가 이끄는 사업, 그리고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정우현과 그가 사랑하는 엘라 로렌츠까지 고려해서.
“그래서 이렇게 온 거다! 놀랐지, 우현? 내가 막장 드라마 찍으러 온 줄 알고?”
“하하, 축하한다, 유라야.”
“흥, 축하는 무슨! 하여간 우현아, 거기 쓰인 대로 그날 와! 올 수 있지?”
“당연하지, 설령 안 된다고 해도 무조건 가야지. 지구 반대편, 아니 우주 반대편에 있다고 해도 가야지. 내 친구 결혼식인데.”
“아이고, 이럴 때만 친구야. 하여간, 그래.”
권유라는 마시던 주스를 홀짝거리며 한 모금 더 먹었다. 역시 익숙한 손길로 잔을 싱크대로 가져가서는, 남은 주스를 흘려 버리고 설거지까지 순식간에 했다.
“야, 무슨 손님이 설거지하냐. 내가 할게.”
“됐어, 언제는 내 집처럼 드나들었는데. 손님은 무슨 손님.”
분명히 그랬었다.
어릴 적, 정우현과 권유라 그리고 구태호 삼인방은 서로의 집을 마치 자신의 집처럼 오가고 놀며 함께했었다.
권유라는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잔을 뽀드득 닦으며 말했다.
“...어머님이랑 다현이 보고 싶었는데 다음에 봐야겠네.”
하고서는 깨끗이 식기를 정리한 뒤 의자에 걸쳐 둔 자신의 모피 외투를 손에 잡고 집 밖으로 향했다.
“뭐야, 벌써 가게? 좀 있다 가지, 유라야.”
“됐네요, 감독 님은 차기작 준비하셔야죠. 예술은 하나도 모르는 무식한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이, 오랜만에 왔는데 더 있다 가라니까.”
"아니야, 진짜. 나 어디 또 가 봐야 해. 내가 청첩장 돌려야 할 사람이 너 하나뿐이겠니? 나, 유라야, 권유라. 에이치 자동차 사장이라고. 훗날 대한민국 최초로 대기업 그룹의 여성 회장이 될 사람이고!"
권유라는 입을 활짝 벌려 지그시 웃어 보이고 왼팔을 천장을 향해 뻗기까지 했다.
"하여간 간다, 우현아!"
그러고서 그녀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기 전 뒤를 돌았다.
“꼭 와!”
“응!”
권유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아까 전 어두웠던 표정을 살며시 비치더니, 애써 다시 웃었다. 그녀의 표정 변화가 너무 빨라서, 정우현은 내심 헷갈렸다.
“…엘라, 엘라도 꼭 데리고 와……!”
“아, 알았어, 유라야.”
그녀는 홱 하고 다시 뒤로 돌아 문밖으로 나가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너도 얼른 결혼해라, 바보.”
하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간 권유라.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정우현, 너무나 사랑했던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친구 정우현 앞에서는 결코 보일 수 없는 눈물.
가슴이 아팠다.
뻐근하고, 한편으로는 찢어질 것 같았다.
“아아아.”
결국,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계속 걸어가며, 멀어지는 집 안에 있는 정우현이 자신의 울음소리를 듣기라도 할까 억지로 울음을 참고 소리를 죽이며 흐느꼈다.
“하아…….”
그렇게 거리로 나온 권유라.
“아가씨!”
권유라의 경호원들이 울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놀라서는 마구 달려왔다.
“왜 그러세요? 어떻게 된 겁니까?”
“…….”
권유라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세요? 안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정우현 님이 뭐라고 해요?”
다그치는 경호원들.
하지만 권유라가 눈물을 훔치며 말없이 차량 문을 열고 뒷좌석에 탔다.
그러고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아무 일 없어.”
하고 경호원들에게 얼른 차에 타고 이곳을 떠나자고 하고는 한마디 했다.
“……그냥, 너무 행복해서 그래.”
지금 권유라의 생각은 과거로 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사람에게 솔직한 마음과 느낌을 전달하지 못하게 된 이 현실이 아니라, 과거 그 사람과 모든 걸 함께했던 그 시절을.
어릴 적 그를 학교에서 처음 만나 친구가 된 이래, 까르르 웃고 때론 엉엉 울고 그러면서도 항상 옆에 있었던 그 사람을.
그러다가 그녀는 한 가지 기억에 오롯이 집중했다.
어느 날 정우현과 학교에서 싸운 날이 있었다.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싸웠다기보다는 정우현이 고집을 부리고 자신은 화가 많이 났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울음이 터지고 학교 수업 시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집에 혼자 온 날이 있었다.
방 침대에 누워 울면서 정우현을 탓하고 원망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를 향한 마음이 크다는 것만 확인할 뿐이었다.
어렸던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마음으로, 엄마까지 들어오지 못하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찾아왔다.
그가, 정우현이 자신을 달래 주기 위해 직접 집에 찾아왔다.
놀랍고 행복했다. 슬프고 비참했던 하루가, 한순간에 너무너무 즐겁고 좋은 하루로 바뀌었다.
한데 돌이켜 보니, 그 후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그날의 그 순간 이상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 사실이 그녀를 또 한없이 기쁘면서도 슬프게 만들었다.
권유라는 그때 그 시절이 그렇게나 빨리 지나가고, 종국적으로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그때는 전혀 몰랐었다.
사무치게 애틋한 기억과 깨달음이었다.
“……너무 행복해서 그래.”
권유라는 경호원이 운전하는 차량의 뒷좌석에서 그 시절을 추억했다. 차창을 통해, 노을빛에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너무 행복해서.”
그녀는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정우현의 행복을 마음속 깊이 소망하고 또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