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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192)화 (192/200)

192화

“……누구?”

브래드 퍼트는 물론 김도진 그리고 장필도까지 눈을 크게 뜨고 정우현을 바라봤다.

<바이 더 베테랑> 이후 오랫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었던 정우현이 다시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그것도 본인이 주인공이다.

영화를 만들고 출연했다 하면 항상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히트를 쳤던 장본인이기에, 동료들은 그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뮤지컬 영화의 여주인공이니까 요즘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팝 가수를 써도 될 것 같고…….”

김도진이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니면 할리우드의 톱스타를 써도 되지. 그중에서도 노래와 춤에 능한 여배우들이 있다고.”

이번엔 브래드가 금발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혹은 지난해 내 영화로 세계 영화제에서 여우 주연상을 받은 연기파 배우를 써도 된다.”

하면서 장필도 감독이 투명한 안경을 고쳐 쓰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뭐, 누굴 섭외하든, 우현이 네 영화라고 하면 부리나케 달려올 거다. 설령 다른 작품 계획이 있거나 해도 아마 취소하고 달려올 걸, 하하.”

“하하하하! 그렇지!”

장필도의 말에 브래드와 김도진이 크게 웃었다.

특히 브래드는 우 재단 소속으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오랫동안 활동해, 한국어를 듣고 이해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아, 아닙니다.”

정우현이 세 명의 영화인을 번갈아 바라봤다.

“……응?”

브래드가 놀라서 물었다.

“아니라고? 그럼 누구?”

“이번 제 영화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지 않았던 사람이 출연할 겁니다.”

“뭐!”

김도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신인 배우, 아니, 연기를 아예 해 보지 않았다면, 그저 배우 지망생 아니냐! 그런 사람을 어떻게 선뜻 영화에, 그것도 주연으로 출연시켜!”

“도진이 말이 맞다.”

장필도 감독이 김도진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심지어 이번 너의 영화는 뮤지컬 장르. 단순히 대사를 외우는 것뿐만 아니라, 짧은 순간 온몸의 동작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하지. 노래를 잘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데 경험이 없는 사람을 쓴다면, 영화의 완성도가 분명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 우.”

브래드까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너의 상대방 역할이다. 즉 너랑 얼마나 교감하는지에 따라, 인물 간 감정도 살고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텐데, 신인을 쓰기엔 너무 리스크가 크다는 거지. 거기에 또 네가 감독이기도 하잖아. 그만큼 배우들을 잘 파악한 채 때에 따라 컨트롤을 해야 하는데, 이런 면에서 역시 또 신인은 여러모로…….”

하는데 정우현이 불쑥 입을 내밀었다.

“아니요.”

“…….”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물론 여러분도 잘 아는 사람이니까요.”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다. 정우현은 물론 자신들까지 모두 잘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런 신인 배우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국과 미국 등 요즘 뜨는 신인 배우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떠올렸다. 놓친 사람이 없을까 하고.

하지만 소용없었다. 명백히 최근엔, 그런 떠오르는 스타가 없었다.

“……우현아, 우리는 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고 장필도가 말하는데 정우현이 신난다는 듯 입을 벌렸다.

“엘라 로렌츠!”

“…….”

“엘라가 이번 영화의 제 상대 역으로 출연하게 될 겁니다!”

브래드와 김도진 그리고 장필도는 정우현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서로의 눈을 말없이 힐끔거렸다.

* * *

정우현의 새 영화 <판타지 러브 댄스>의 시나리오는 애초 그날 밤, 정우현과 엘라가 우 재단에 복귀한 날을 기념하는 밤에 둘이 함께 춤을 추고서 탄생한 이야기다.

즉 정우현이 엘라와 함께 춤을 춘 강렬한 경험에 영감을 받아 썼다.

바쁘기 짝이 없는 오랜 공직 생활 후, 오로지 쉬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 아무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던 정우현의 가슴 속에 창작 욕구가 피어올랐다.

글로써 구체화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큰 욕망이었고, 정우현은 그대로 단번에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러다 보니 정우현이 해당 이야기의 상대 여배우로 엘라를 고른 건 무리가 아니었다.

아니, 정우현에겐 오히려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뭐라고요?”

우 재단 의장실.

엘라가 깜짝 놀라는 것을 넘어 얼굴이 경직됐다.

“……제가 영화에 출연해야 한다고요? 그것도 우현 님의 신작인 뮤지컬 장르에 여주인공으로요?”

“하하, 맞습니다!”

정우현이 신나서는 눈을 크게 떴다.

“모든 게 정해졌어요! 엘라만 얼른 촬영장에 오면 돼요!”

“…아아, 우현 님…….”

하고서 엘라가 입을 다물고 거의 울상을 지었다.

자기가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할 수 없어요.”

“왜요?”

“저는 연기 같은 거 평생 한 번도 해 본 적 없단 말이에요. 꿈도 꿔 본 적 없고요.”

“하하, 그럼 지금부터 하면 되겠네요!”

“안 돼요.”

하고서 엘라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자신의 동그란 이마를 얇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우현 님, 제 성격 아시잖아요. 남들 앞에 나서거나, 주목받는 거 싫어하는 거.”

“하하, 저랑 함께라면 괜찮습니다, 엘라!”

정우현은 엘라에게 다가가 본격적으로 설득해 보려 했다. 한데 엘라는 정작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더군다나…….”

“예?”

“제가 출연하면, 무조건, 무조건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질 거예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영화가 되지 못할 거라고요.”

하고서 그녀가 걱정과 슬픔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참을 수 없어요. 저로 인해, 우현 님의 새 영화가 실패한다는 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는, 다시 예전의 그 골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을지도 몰라요, 저로 인해 우현 님이 잘못된다면, 저는 아마 이 세상을 더 이상 버텨 낼 수 없을 겁니다.”

이것이 엘라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갑작스러운 정우현의 영화 출연 제의에, 심지어 자신이 여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한데 그 와중에도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나로 인해 정우현의 영화가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였다.

다른 무엇보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실상 그동안 자신보다 정우현을 위한 마음으로 살아왔던 그녀였다.

실상 정우현을 따라 독일에서 한국으로 온 이래, 그녀는 항상 그랬다. 심지어 정우현을 향한 마음이 더욱더 커지고, 급기야 완전히 사랑하게 된 후에는 그런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내게 있어 삶의 의미는 우현 님, 온통 우현 님 하나로 가득하다. 그것 말고는 없다.

이것이 그녀의 내면이었고, 그런 만큼 정우현의 새 영화에 직접 출연하는 게 몹시 두려웠다.

이와 달리 정우현이, 만약 그와 관련 없는 영화에 엘라의 출연을 제의하기라도 했다면, 엘라는 마뜩잖은 마음에도 결국은 그의 뜻을 따랐을 것 같았다.

정우현에게 별다른 영향이 없다면, 엘라는 언제나 그렇듯 그의 말을 따른다. 그럼으로써 조금이나마 어떤 방식으로든 정우현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면 되니까.

그게 바로 엘라가 사는 삶의 의미였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나로 인해 우현 님의 새 영화가 실패할 수 있고, 우현 님의 이름에 오점이 남을 수 있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엘라는 정우현의 말을, 거의 처음으로 따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으음.”

정우현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엘라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다가, 뒤에 있는 의장실 벽에 가로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고는 이제 정우현에게서 달아날 수 없게 됐다.

물론 떨리는 그녀의 본능은 그로부터 달아나고 싶지 않았다.

“엘라.”

정우현이 엘라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다가갔다.

“……예.”

엘라는 또 긴장되는 마음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제가 이 영화를 왜 만들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

“이 이야기를 어떻게 썼는지 아십니까?”

“……모르겠어요.”

하는 엘라의 푸른 두 눈에 정우현이 잠시 말없이 시선을 고정했다.

엘라는 그의 시선이 너무 강렬해서, 차마 정우현을 바라볼 수 없었다.

이에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놀랍게도 정우현이 그런 그녀의 얇은 턱을 한 손으로 덥석 쥐었다.

그러고서 반쯤은 강제로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당신 때문입니다.”

정우현의 손길이 느껴지는 그대로, 엘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곤란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당신 때문에 이 이야기를 쓰고 영화 촬영을 계획하게 됐습니다.”

“…….”

“실로 아주,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습니다.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 제 안의 욕망이 불타오르는 것은.”

정우현은 여전히 한 손으로 엘라의 얼굴에 손을 댔다. 턱을 쥐던 손은 그녀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래, 아주 오래 쉬려고 했습니다만 엘라로 인해 이렇게 또 새 이야기가 제 손안에서 탄생했다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정우현의 물음에 엘라가 입술을 깨물고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엘라가, 꼭 출연해야 해요. 또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무턱대고 엘라를 캐스팅한 게 아님을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일단 저는 평소 엘라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알고 있었고요.”

한국에 오래 살게 되면서, 엘라는 정우현을 따라 물론 노래방에도 갔었다.

그곳에서 역시 정우현에 의해 거의 억지로 마이크를 잡고 부르게 된 노래 실력에, 정우현은 과거 입을 다물지 못했었다.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애초 엘라는 목소리가 예뻤다. 부드럽고 차분했다. 그런데 그 목소리로 노래를 하니 마치 달밤 아래 들려오는 아름다운 자장가 같았다. 즉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힘과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또 얼마 전, 함께 춤을 추며 엘라의 엄청난 소질을 확인했죠. 그런데도 제 영화에 출연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정우현이 물었다. 하지만 엘라는 이번에도 별다른 대답은 하지 못하고 그저 거칠게 숨만 쉴 뿐이었다.

“그러니까 엘라가 꼭 출연해야 합니다. 이 영화는 모든 의미에서 엘라를 위한 영화란 말입니다.”

하고는 드디어 정우현이 그녀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뒤로 조금 물러섰다.

그제야 엘라는 정우현에게서 풀려났다는 듯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엘라를 보며 정우현은 이제야 다시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돌아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시겠죠, 엘라? 영화, 하는 겁니다?”

엘라가 그런 그를 응시했다.

엘라에게 있어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가 눈앞에 서서 자신을 어르고 달래며 그리고 또 지금은 장난스럽게 웃는다. 그러고는 결정적으로 부탁을 한다.

그런 그를 어떻게 부정하고 또 거절할 수 있을까.

엘라는 신음을 토하듯 한마디 했다.

“……알겠습니다.”

그러고서 원망과 사랑 그리고 존경과 두려움 등 온갖 감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묘한 행복감이 번지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황홀한 금단의 묘약을 먹으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하하하하, 잘 됐군요!”

정우현이 다시 환히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라의 삶에 있어 오랫동안 자양분이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영영 그럴, 정우현의 따뜻한 모습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 * *

정우현의 우후 엔터테인먼트는 곧 그룹의 명예 회장인 그의 신작 <판타지 러브 댄스> 촬영에 들어간다고 대중에게 알렸다.

회사는 감독과 주인공이 정우현인 것은 물론 상대 여주인공으로는 그의 오랜 파트너인 엘라 로렌츠라고 깜짝 발표했다. 이는 곧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놀라움과 찬사였다.

한데 그런 뜨거운 반응 속에 어느 날 한 사람이 정우현의 집에 찾아왔다.

권유라였다.

“정우현.”

정우현의 가장 오래된 친구이자, 세상에서 정우현을 가장 먼저 좋아한 여자가 그의 집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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