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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191)화 (191/200)

191화

테이블 밖 무대로 나온 정우현과 엘라.

많은 남녀가 쌍을 지어 나왔지만, 사람들이 주목하는 건 오로지 정우현과 엘라였다.

오늘 행사의 주인공인 그들.

심지어 연회장에는 최근 커플이 됐음을 알린 화제 속의 유명 배우들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정우현과 엘라를 주목했다.

“……저는.”

긴장된 목소리로 엘라가 말했다.

“춤을 처음 춰 봐요, 우현 님.”

“괜찮습니다.”

정우현은 엘라의 허리를 왼 팔로 감았다.

“힘을 빼고, 제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면 됩니다.”

“아아…….”

음악과 함께 춤은 시작됐다.

정우현은 과거 배우 활동 시절 춤이란 춤은 모두 능통했다.

물론 이처럼 무대에서 상대방과 쌍을 지어 추는 춤 예컨대 왈츠나 탱고 그리고 자이브나 룸바 또한 모두 잘 췄다.

그 외 음악에 따라 스스로 곡을 해석해 자유롭게 독창적으로 춤을 추기도 했다.

“잘하는군요, 엘라!”

정우현은 능숙하게 엘라를 리드하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엘라는 부끄러워하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현 님이 잘하시니까, 저는 그저 따를 뿐이지요.”

“아닙니다.”

하나, 둘 정우현은 스텝을 정확하게 밟았다.

“제가 이렇게 리드한다고 해서, 전부 잘되진 않아요.”

다시 스텝을 밟고, 엘라를 빙그르르 회전시켰다.

“엘라가 춤에 재능이 있어서 지금 우리의 춤이 자연스럽고 역동적으로 보이는 겁니다.”

사실이었다.

정우현과 엘라의 춤은 빼어났다.

많은 커플이 춤을 추고 있었지만, 정우현과 엘라처럼 아름답고 그러면서도 호흡이 잘 맞는 팀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처음엔 관심과 호기심으로 그저 정우현과 엘라를 봤지만, 지금은 오로지 화려한 춤 실력에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아, 모르겠어요.”

엘라는 정우현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기뻐하면서도 당황했다.

“정말입니다, 엘라. 당신의 몸은 유연하고.”

정우현은 오른손으로 맞잡은 엘라의 손을 쭉 뻗고, 왼손으로는 그녀의 허리를 젖히며 상체를 기울였다. 엘라의 몸이 활처럼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리듬에 아주 정확하고 탄력 있게 반응합니다. 분명 춤에 큰 소질이 있어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엘라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정우현은 다시 그녀의 상체를 바로 하고는, 지그시 웃었다.

“더군다나, 아름답죠. 이곳에서 가장 아름다워요!”

“어머!”

엘라가 깜짝 놀라며 소리를 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우현 님. 제 나이 올해로 마흔일곱 살.”

엘라는 정우현보다 나이가 세 살 많다.

나이를 의식한 엘라는 정우현의 칭찬을 믿을 수 없다며 눈을 흘겼다.

“여자로서 가장 예쁜 나이는 지나도 한참 지났답니다.”

하고서 그녀가 춤을 추고 있는 다른 커플들을 바라봤다. 약간의 부러운 시선이 녹아 있었다.

“심지어 예뻐도 너무 예쁜 여자들은 따로 있다고요, 보세요!”

엘라가 눈짓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젊은 여자들이, 즉 자기보다 한참 어린 이십 대의 여자들이 화사한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꽃이 만발했어요, 아름다움이란 저 아이들처럼 인생이라는 꽃이 활짝 피어난, 그 짧은 시기에나 느낄 수 있죠.”

“하하하하.”

정우현이 엘라의 말에 크게 웃었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그녀를 리드하며 유려한 춤사위를 보였다. 그러다가 한순간 그녀와 얼굴을 가깝게 했다.

엘라는 깜짝 놀랐다, 정우현이 자신에게 키스하는 줄 알았다.

음악이 멎고, 정우현과 엘라가 종이 한 장 차이로 얼굴이 맞닿은 시점.

“저에게는.”

정우현이 멈춘 자세 그대로 엘라에게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엘라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엘라는 저에게 절대적으로 아름답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보이지 않을뿐더러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모습을 하든 간에 저에게는 투명한 공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엘라 당신의 주위에서 그저 공허하게 떠다니는 공기 말입니다.”

“……아아.”

정우현의 말에 엘라가 다시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러고는 그의 넓은 가슴에 자신의 얼굴을 살포시 묻을 수밖에 없었다.

연회는 끝이 났다.

사람들이 정우현과 엘라를 바라봤다. 모두 환호성을 지르고 손뼉을 치고 있었다.

* * *

정우현과 엘라의 관계는 무엇일까.

친구? 연인? 혹은 부부?

정확히 그 무엇이라고 지칭하기는 어려웠다.

왜냐면 정우현과 엘라, 모두 둘 사이를 한 번도 무엇이라고 따로 규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도,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점을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굳이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그랬다.

그들은 예전부터 그랬다. 청년 정우현이 베를린의 그녀 집에 찾아가, 엘라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을 때부터, 그들은 많은 말을 않고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심지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언약이나 말도 필요 없이 서로가 서로의 파트너임을, 나아가 인생의 동반자임을 마음속으로 굳게 믿기 시작했다.

물론 아주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특히 정우현이 그랬다. 정우현은 엘라가, 그러니까 독일 출신의 한 여자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리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몰랐다.

심지어 과거 어느 날, 아버지가 그의 전용기에서 엘라를 진지하게 여성으로 바라보고 함께하라고 했을 때도,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순간 정우현은 느꼈다.

엘라가 자신의 마음 한편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없을 때 그녀를 떠올리면 무한에 가까운 애정과 다정한 마음이 샘솟았는데, 이는 일찍이 가족을 떠올릴 때가 아니면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었다.

그제야 정우현은 뒤늦게 인정했다. 자신이 엘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아주 오랫동안, 특히 두 번째 삶인 이번 생 내내 가장 큰 의미를 두고 거의 신성시했던 가족을 향한 사랑이 어느 순간 엘라에게도 번져 있었다.

그렇게 그는 엘라를 향한 마음을 의식적으로 확인하고서, 드디어 마음을 먹었다.

엘라도 나의 가족이다. 나의 사랑이며, 영원히 내가 지켜야 할 한 사람이다.

물론 그때는 이미 엘라가 정우현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을 때였다.

애초 기댈 곳 없었던 엘라로서는 일찍이, 정우현을 따라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은 완전한 하나의 사랑을 이뤄 가고 있었다.

* * *

정우현과 엘라의 춤은, 엘라에게 역시나 완전한 행복이 실현됐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행복했다, 더없이 행복했다.

사실 엘라는 정우현이 끝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즉 언젠가 그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도 영원히 그의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마치 지구 주위를 맴도는 달처럼, 그렇게 영원히 묵묵하게 정우현 곁을 지키려 했다.

그것이 그녀의 사랑이었다.

왜냐하면, 정우현이 자신에게 새 삶을 안겨 줬기 때문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컴퓨터와 만화책만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세상에 햇빛과 바람, 나무와 꽃 그리고 밤하늘을 항해하는 별들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 정우현이었다.

그런 정우현을 엘라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가만히 옆에서 한없이 사랑하는 것밖에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따금 아찔해서 몸이 떨리기까지 했다.

오랫동안 정우현 앞에서 이와 같은 모습을 최대한 숨기고, 그를 마냥 돕는다는 게 물론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라는 했다, 그것도 모두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저 정우현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그랬다.

그리고 이 굳건하고 인내심 있는 조용한 사랑이, 정우현의 마음에도 끝내 사랑의 꽃을 피웠다.

* * *

엘라와 함께 춤을 추고 행사를 마친 뒤, 정우현은 격정적인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서 몸을 씻고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사랑이다, 사랑이었다.

근데 이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무언가 도무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가 아주 오랜만에, 펜을 들었다.

그리고 두꺼운 노트를 꺼냈다. 새하얀 종이 위에 빠르게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야기였다. 그것도 한 편의 아름답고 강렬한 이야기였다.

13년간 공직 생활에 전념해 누적된 피로감에 그 아무것도 하기 싫어했던 정우현이 지금, 이 순간 무언가에 몹시 몰두하고 있었다.

엘라와 춤을 추며 서로를 향한 마음의 심층까지 함께한 뒤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밖으로 나와 형형색색의 인물과 사물 그리고 세계의 모습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배길 수 없는 이야기.

그런 것들을 정우현은 빠르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막힘은 없었다. 말 그대로 일필휘지(一筆揮之)로써 단번에 정우현의 마음속에 있었던 무형의 이야기가 형태를 갖추게 됐다.

몇 시간이 지나, 밤이 지나고 다시 해가 떠올랐다. 드디어 그는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를 탈고했다.

시나리오였다.

정우현이 아주 오랜만에, 순전히 내적 욕망을 따라 다시 영화인으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 * *

“……이걸 하루 만에 썼다고?”

우후 엔터테인먼트 본사.

정우현의 오랜 동료들이 시나리오 한 부씩을 각기 들고 설왕설래했다.

“하하, 네.”

“믿을 수가 없다!”

김도진이었다. 김도진이 정우현이 완성한 시나리오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심지어 컴퓨터도 아니고 손으로 썼다는 거지?”

“아,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원래 정우현은 컴퓨터로 글을 썼다.

한데 이번엔 손으로 직접 펜을 잡고 속기를 하듯이 엄청난 속도로 썼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정우현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강렬한 무언가를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선, 수기로 직접 쓰는 것만큼 효과적인 게 없었다.

“……으음, 우.”

이번엔 브래드 퍼트가 자신의 덥수룩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영어로 번역된 정우현의 새 시나리오를 주시한 채 입을 열었다.

“……쉰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어떻게 또 이런 보물, 아니, 요물이 또 튀어나온 거지? 너 진짜, 무슨 악마와 계약한 거 아니야?”

“하하하하, 브래드, 농담이 심하시네요!”

“우현아.”

낮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이번엔 정우현의 데뷔작 <겨울방학>을 연출한 장필도 감독이었다. 장필도는 일찍이 우후 엔터테인먼트 전속 감독이 되어, 나이가 노년에 접어들었음에도 여전히 대한민국 간판 감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물론 미국 할리우드와도 활발하게 협업을 하고는 했다.

“예, 감독님?”

“이거 물건이다, 물건이야.”

“하하하, 감사합니다.”

“아니, 단순히 물건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이 시나리오대로 촬영만 하면 장르적으로 무조건 대히트를 치는 영화가 될 거야.”

“아, 그러면 좋겠네요!”

정우현은 활짝 웃었다.

김도진은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뮤지컬 영화라는 거지?”

“맞아요!”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배우들이 춤을 추는?”

“하하, 예. 아주 오랜만에 영화판으로 돌아온 만큼, 제 시나리오를 갖고 제가 연출도 하고 안무도 짜고, 음악도 전부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오오, 그렇구나.”

이번엔 브래드가 말을 받았다.

“그런데 우현아.”

“예.”

“보니까 뮤지컬인데, 또 중요한 건 사랑 영화라는 거잖아.”

“하하하, 그렇죠.”

“그렇다면 여배우, 즉 너의 상대방 역할이 무척 중요한데, 어떻게, 좀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는 거냐.”

“예.”

하고 정우현이 짧게 답하고는 잠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있습니다. 아주 안성맞춤인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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