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엘라의 말에 정우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정우현이 당연히 응할 것으로 생각하고 말을 하고 있었다.
애정과 존경 그리고 기대가 가득한 눈빛이었다.
정우현이라면, 우현 님이라면 당연히 다시 우 재단으로 돌아와 줄 것으로 생각했다.
“으음, 엘라.”
정우현은 그런 엘라의 마음을 모르는 척 눈썹을 올렸다.
“저는 좀 더 쉬고 싶습니다.”
“아아, 우현 님.”
정우현의 말에 엘라가 일순간 절박한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그의 손을 잡기까지 했다.
“부디, 부디 우 재단으로 돌아와 주세요. 와서 아무것도 안 하셔도 돼요. 명예직입니다. 명예 의장이에요. 그것만으로 재단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을 거예요.”
“으음.”
정우현이 엘라를 지그시 바라봤다.
순간 엘라가 이토록 자신에게 매달리며 무언가를 부탁한 적 있었던가 생각했다.
없었다. 엘라는 항상 조용한 성격으로 있는 듯 없는 듯했으며, 오히려 오랫동안 정우현 본인의 이런저런 일을 모두 도맡아 처리했다.
그런 그녀가 절박한 부탁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금씩 동했다.
또한, 엘라의 말대로 정우현이 그저 명예직에 거의 이름만 걸고 있어도, 재단이 훨씬 더 커지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전직 유엔 사무총장에 초대 통일 대한민국 대통령, 거기에 세계의 질서를 변혁하며 지구촌 곳곳에 자유와 평화를 안겨 주고, 전쟁과 바이러스를 종식한 인물.
그 외에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업적에 정우현의 이름만으로도 재단에 막대한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은 명백했다.
“……알겠습니다.”
결국, 정우현이 승낙했다.
“와아!”
엘라는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 정우현은 괜히 안쓰러웠다.
“그런데 엘라.”
“예.”
“다음부터는 이렇게 절박하게 부탁하지 마세요.”
“……왜요?”
“엘라는 저에게 무엇이든 편안하게 의견을 표현하고 속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설령 엘라가 그러기를 원치 않더라도, 저는 그러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저를 어려운 사람 대하듯, 힘겹게 부탁 같은 걸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아.”
정우현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어쨌든, 예, 하겠습니다. 다시, 우 재단으로 돌아가겠어요. 물론 애초 제가 만든 재단으로서, 언젠가는 돌아가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렇게나 빨리 돌아갈 줄은.”
하고서 정우현이 잠시 말을 멈추고 홀로 웃었다.
“하하, 몰랐네요. 하지만, 뭐, 이렇게 된 거 잘됐습니다. 이러나저러나 세상은 계속되고 엘라의 말대로 제가 나아가야 할 미지의 영역도 무한히 남아 있으니까요.”
정우현의 다정다감한 말에 엘라의 볼이 빨갛게 상기됐다.
그 순간 정우현이 재차 엘라를 불렀다.
“그런데 엘라.”
“……예?”
“약속은 지키셔야 합니다.”
순간 엘라는 다시 긴장했다.
“……어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아아.”
“하하하, 아무것도 안 하진 않을 테니, 너무 많은 일거리를 주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정우현의 농담 어린 말에 엘라가 다시 긴장을 풀고 웃었다.
“……하하하, 알겠어요.”
* * *
이와 비슷한 일이 며칠 후 또 반복됐다.
“헤이, 보오오오오오오스!”
일론이었다, 일론이 청담동 자택에 찾아왔다.
대낮에 자기 방에서 한갓지게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던 정우현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예?”
“보오오오오스, 얼른 일어나! 지금이 잘 때야?”
“……무슨 일 있나요? 일론?”
“당연히 있지!”
하고선 그가 가져온 서류 뭉치를 정우현에게 내밀었다.
그것들은 우후 그룹의 각종 사업과 관련된 서류였다.
“보스, 이제 충분히 놀았잖아! 그러니까 다시 일해야지, 일! 사업! 우리의 사업을 이어 나가야지!”
“아아.”
정우현이 사업 서류들을 보며 소리를 냈다.
가뜩이나 우 재단 명예 의장이 되어 조금이나마 할 일이 생겼는데, 일론이 찾아와 예전처럼 사업을 하자니 또 난감할 따름이었다.
“……왜? 안 해?”
일론이 정우현의 표정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천하의 보스가! 위대하신 정우현 님이! 일을, 그것도 사업을 안 해?”
“…하하하…….”
“보스, 그거 엄청난 손해인 거 알아? 보스도 보스지만 세상에 엄청난 손해라고? 보스가 조금만 일을 하면,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아지는데, 어떻게 마냥 놀기만 한다는 거야!”
일론의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정우현이 사업이든 재단이든 예전처럼 열성적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아졌다는 데 있었다.
그저 놀고 싶었다.
“으음.”
정우현이 또 짐짓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괜한 핑계를 대며 말을 이었다.
“일론.”
“응?”
“저는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입니다.”
“알지, 알아! 근데 말이 좋아, 전직 대통령이지, 어쨌든 실질적으로 지금은 백수라는 거잖아!”
“……아, 하하.”
일론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어서, 정우현은 슬며시 웃었다.
“그러니까, 다시 하자, 일!”
“일론, 전직 대통령은.”
“음?”
“아마 특정 기업과 관련된 활동에 약간의 제약이 따를 거예요.”
“뭐, 그렇기야 하겠지. 근데 법률이든 뭐든 얼마든지 바꾸면 되는 거고!”
일론은 이미 마음을 먹고 정우현을 찾아왔다. 그를 어떻게든 우후 그룹에 복귀시킬 참이었다.
“정 안 되면 일단 공석인 회장직으로 돌아와. 현재로서 딱히 할 일도 없을 테니!”
“으음.”
“보스. 잊었어? 우리 우주로! 우주로 가기로 했잖아. 화성이 코앞이라고! 얼마 전 우후 X 소식, 뉴스에서 봤지? 화성 일부 땅에 식물이 자랄 수 있는, 부분 테라포밍에 성공했다고!”
“하하하, 예, 일론, 아주 잘 봤습니다. 참 잘하셨어요.”
“잘하긴 개뿔! 그거 다 예전에 보스가 나한테 준 아이디어잖아! 화성에 인공 대기(大氣)를 만들고 안에 온실가스를 가둬 지표면 온도를 상승시키는 방법!”
“아, 그때 그랬죠.”
“그러니까, 지금! 지금이 바로 화성을 정복할 기회야! 이제 본격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보오오오오스가 필요해!”
“으음.”
정우현이 잠시 생각하다가는 며칠 전 엘라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알겠습니다, 대신.”
“응……?”
“명예.”
“……명예?”
“명예직으로 주세요. 아무 자리든 책임과 의무는 거의 없거나 비교적 덜한.”
“아…….하.”
일론이 잠시 생각하고는 크게 답했다.
“알겠다, 명예 회장!”
그러고서는 기분이 좋아서 크게 웃으며 말했다.
“보스! 보스는 이제 우후 그룹의 명예 회장이야!”
이로써 정우현은 우후 그룹에 복귀했다.
* * *
명예 의장과 명예 회장.
모두 명예라는 영광스러운 수식어가 달려 있지만, 그 실체는 재단의 운영과 사업의 경영에 한 걸음 물러 떨어져 있다는 뜻이었다.
엄연히 소속은 있지만, 자유로운 상태.
마치 어릴 적 정우현이 한국영재학교를 다니며 비상무이사로 에이치자동차에 소속된 때와 비슷했다.
그래도 그때와 큰 차이점이라면, 어디까지나 우 재단과 우후 그룹의 가장 높은 사람은 엄연히 재단의 설립자이자 그룹의 창업자인 정우현이라는 사실이었다.
즉 정우현은 각 단체의 최고 자리로 다시 돌아왔지만, 이전과 달리 실제 일에는 한 발짝 물러나 있다.
결국, 대통령 퇴임 후 집에서 완전히 자기 시간을 가졌던 때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여유로운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036년.
우 재단에 행사가 열렸다.
바로 정우현 명예 의장의 복귀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이에 대한민국 서울의 우 재단 본사에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달러의 붕괴로 미국의 경제가 쇠락하고, 한국이 세계 제일의 강국이 된 가운데, 서울은 과거 미국의 뉴욕처럼 되었다.
즉 세계의 수도나 마찬가지였다. 국적과 인종 불문, 거리는 온갖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데 이처럼 서울을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든 장본인인 정우현이 우 재단에 복귀한다니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잔뜩 유명 인사들이 행사에 참석했다.
“와우.”
한껏 멋진 정장을 차려입고 참석한 정우현.
한 여성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엘라였다. 엘라 로렌츠는 순수하면서도 고혹적인 느낌이 나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괜히 부끄러운지 사뭇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군요.”
“……감사합니다.”
엘라가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답했다.
“정우현 님도 멋지세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굳이 엘라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정우현은 정말 멋졌다.
정우현의 나이 어느덧 마흔네 살.
완연한 중년의 나이였지만, 자기 관리를 완벽하게 해 여전히 군살은 하나 없이 이상적인 비율과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기에 중년 특유의 중후한 매력이 더해져, 그야말로 치명적인 미중년이었다.
실상 애초 배우이기도 한 만큼, 세월의 흐름과 함께 더욱더 깊고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정우현은 엘라의 부드러운 손을 잡고 연회장의 정중앙에 앉았다.
오늘의 주인공은 명백히 정우현 그리고 엘라였다. 엘라 또한 오랜 시간을 뒤로하고, 우 재단에 복귀했다.
그러고는 대한민국의 간판 MC가 행사장에 나와 오늘의 연회를 이끌었다.
전직 대통령인 정우현의 재단 복귀이기에, 이번 행사는 비단 우 재단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국가적 행사였다.
그래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것은 물론 MC 또한 대한민국 최고의 MC가 섭외됐다.
하지만 정우현은 그런 유명 인사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오로지 엘라를 바라봤다.
“엘라.”
“……예?”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어떤 이들이 참석했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
“오로지, 지금 이 순간, 바로 엘라, 당신과 함께한다는 게 중요하죠.”
“어머…….”
엘라는 정우현의 직접적인 표현에 얼굴이 또 새빨개졌다.
이러나저러나 정우현이 계속 말했다.
“지난해 쉬면서 생각해 봤습니다. 그간 삶을 살아가며, 이곳저곳에서 정말 많은 일을 했습니다. 예, 사람들 말대로, 다행히, 제가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준 것 같습니다. 한데 한순간 반문해 본 겁니다. 반대로,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누가 나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가?”
엘라가 강렬한 눈빛으로 정우현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생각해 보니 아주 단순하더군요. 바로 엘라, 당신입니다. 엘라와 그리고 제 가족들만이, 저에게 행복을 안겨 줬어요. 엘라야말로 제 삶의 원동력이었다는 겁니다!”
“아아!”
엘라가 탄성을 내뱉으며 말을 잃었다.
심지어 몇 년 전 정우현의 방에 그와 단둘이 있었을 때 겪었던 현기증마저 느껴졌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다만 그때와 차이가 있다면, 당시엔 정우현과 단둘이 있는 자리였고, 지금은 여럿이서 함께 있는 자리라는 게 달랐다.
사회자가 이런저런 말을 크게 하는 가운데, 행사는 계속해서 진행됐다.
그런데도 정우현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제껏 너무 오랫동안 많은 일을, 그것도 하나같이 대단한 일들을 전부 성공적으로 해 왔기에 그런 걸까. 아니면, 단순히 앞에 엘라가 있어서 그런 걸까.
정우현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이런 자리에서 의례상 필요한 표정과 몸짓, 그런 것들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 나아가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런 상투적인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 오로지 엘라와 함께하는 가운데, 행사는 계속 진행되어, 이윽고 MC의 뒤편에 있던 현악단이 바이올린과 첼로 등을 켜기 시작했다.
춤이었다. 제대로 된 연회장을 위해 남녀 한 쌍씩 테이블 밖으로 나와 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시간이었다.
“엘라.”
현악기의 은은한 선율이 들렸다. 정우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고 엘라를 불렀다.
“……예?”
“나갑시다.”
“……어딜요?”
“춤이요, 춤을 추러 갑시다.”
“아아…….”
생각도 못 했다는 듯 머뭇거리는 엘라에게 정우현이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 앞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엘라는 떨리는 손으로 정우현이 내미는 손을 살포시 잡았다.
둘은 이제 곧 예기치 않은 경험을 하게 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