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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인생이 너무 쉽다 (186)화 (186/200)

186화

며칠 후 서울 대통령 집무실.

일본 총리가 다시 정우현을 찾았다.

한데 그 옆에는 중년의 남자가 말 없이 서 있었다.

일본 왕이었다. 일왕이 정우현의 말대로 총리와 함께 한국을 찾았다.

이번에는 비밀리에 찾지도 않았다. 공식적인 총리와 왕의 방한이었다.

“오셨습니까.”

정우현이 귀빈실에서 그들을 맞이하며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에 총리가 꾸벅 인사했다.

“…….”

일왕은 가만히 있었다.

정우현이 총리와는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그저 왕을 주시했다.

이러나저러나 총리가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저번에 얘기 나눈 대로, 우리 천황 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이에 우리 일본은 공식적으로 한국에 난민 수용을 요청하는 바이며……..”

“잠시만요.”

정우현이 불쑥 총리의 말을 잘랐다.

“저는 총리 님이 아니라, 여기 계신 왕의 말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

총리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왕에게 말을 하라고 직접 뭐라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자국민을 생각하면 괜한 자존심을 챙기며 마냥 가만히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으음.”

이에 끙끙대며 가만히 있는데, 다행히 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우현 대통령 님.”

“예.”

“만나서 반갑고 영광입니다, 저는 일본의 왕입니다.”

“예, 저 또한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우현이 예의를 갖춰 인사를 했다. 총리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일왕은 어쨌든 한 국가의 원수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예를 다하니, 정우현 또한 정중하게 말했다.

“대통령 님.”

“예.”

“…….”

왕이 정우현을 부르고서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작정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드립니다, 우리 일본을 살려 주십시오. ……일본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고서 왕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다.

정우현이 그런 그를 바라봤다.

진심이었다. 일왕은 단순히 왕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와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진정으로 자국민들을 위해서 부탁을 하고 있었다.

이에 정우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오오!”

옆에 있던 총리가 탄성을 내뱉었다.

“다만.”

하지만 정우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기까지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총리가 곧장 되물었다.

“예. 당장 제가 일본의 난민을 수용한다고 결정해도, 그 규모나 또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일은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

“그러니 제가 제시하는 것들을 모두 응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총리가 긴장한 표정으로 답했다.

정우현이 곧장 말했다.

“먼저 일본은 한반도 식민 지배 시절 과거사에 관한 모든 사실을 전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하십시오.”

“…….”

애써 잠자코 정우현의 말을 듣는 총리였으나, 그의 얼굴이 이내 붉어졌다.

정우현은 계속해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매년 8월 15일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 기념관과 현충원을 찾아 사죄하고, 우리와 함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말도 안 되는!”

급기야 총리가 참다못해 소리쳤다.

“대통령 님! 현재, 지금 이 시각에도 일본인들이 부지기수 죽어 가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인도적인 문제와 과거사를 연관시키면 어쩌자는 겁니까! 이게 올바른……!”

하는데 누군가가 그만하라는 의미로 총리의 등에 손을 댔다.

일왕이었다. 왕이 잠자코 정우현의 말을 들어 보자며, 총리를 우선 진정시켰다.

“하아…….”

이에 총리가 한숨만 쉬고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우현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한마디 했다.

“총리 님, 지금 사람의 생명과 인도(人道) 즉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언급하셨습니까?”

“…….”

“한국과 일본의 과거사야말로 생명 그리고 인간의 도리와 직결되어 있는데 여태 그걸 모르고 계십니까?”

총리가 입술을 깨물며 잠자코 있었다.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쨌거나 그는 지금 한국 대통령인 정우현에게 부탁하러 온 사람이었다.

설령 반박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든 참아야 할 때였다.

“저는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정우현이 말했다.

“이 모든 조건에 응해야 합니다. 또한, 난민의 구체적 규모와 체류 기간 및 송환 방법은 우리 대한민국이 정할 것입니다.”

“으음.”

“나아가 일본 열도가 안정을 찾는 훗날, 대한민국의 기업들이 주관해서 복구 사업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향후 10년 동안 일본은 대한민국의 모든 제품에 관한 관세를 철폐해야 합니다.”

경제적 얘기가 나오자 총리의 표정이 다시 붉어졌다. 이번에는 눈썹마저 파르르 떨렸다.

“또한, 과거사 사죄에 따른 배상금으로 일본 내에서 기금을 만들어 매해 일본의 GDP 중 5%를 한국에 지급하기를 원합니다.”

“아니, 대체!”

총리가 다시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입니까!”

하고서는 뒤로 홱 돌며 말을 이었다.

“안 해요, 못 해요! 그런 말도 안 되고 굴욕적인 일은! 우리 대 일본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고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몇 발자국 걸어가는데, 일왕이 총리를 불렀다.

“총리.”

심지어 여전히 정우현 앞에 우두커니 서서 고개만 돌린 채 그를 불렀다.

“총리, 가지 마시오.”

“…….”

일왕의 말에 총리가 가만히 섰다.

“이리 오시오.”

총리가 다시 뒤를 돌아 일왕을 바라봤다.

“부탁하러 왔으면,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를 보여야 할 것 아니오. 그게 대체 무슨 망발이오.”

“…….”

“얼른 오시오. 총리의 말대로, 지금 우리 일본 국민이 무참히 죽어 가고 있소. 그런데 지금 국가의 지도자라는 나와 그대가, 이렇게 성질을 다 내고, 아무런 소득 없이 고국으로 돌아가도 되겠소?”

하고는 일왕이 계속해서 총리를 훈계했다.

“우리 일본인은 그렇지 않소. 선대 왕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바, 우리 일본인은 어느 때 어느 상황에서도, 무엇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지 아주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지.”

그러고서 그가 침울한 표정을 하고 옆으로 다가온 총리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

“이보시오, 지금 일본이, 우리나라가, 완전히 사라져 없어질 판이오. 그런데 그대는 어찌 그리 화를 내시오? 심지어 도움을 주려고 하는 분에게?”

하고서 일왕이 정우현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대통령 님.”

“예.”

“대통령 님의, 한국의 모든 요구 사항을 무조건 수락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정우현이 가만히 일왕을 바라봤다.

역시 진심이었다.

그는 지금 일본의 왕으로서 일본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고 있었다.

“으음.”

정우현이 말이 없자, 일왕이 다시 고개를 돌려 총리를 바라보고 눈짓을 했다.

얼른 사죄하라는 뜻이었다.

이에 총리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는 끝내 정우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하고서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예, 모두 대통령 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일본을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정우현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일본 총리와 왕.

그들을 바라보며 그제야 정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전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대한민국, 이웃 나라인 일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도와드리겠습니다.”

* * *

이것으로 한국은 일본 난민을 수용하게 됐다.

또한, 재해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복구하기 위해 한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적 대규모 팀이 꾸려졌다.

나아가 한국을 시작으로 자유 중국과 러시아 등 인근 국가들 또한 일본의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이러기까지 한국 내에서는 반대 여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오랜 앙숙인 일본을 뭘 도와주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목소리는 수그러들었다.

일왕과 총리가 한국의 독립운동 순국선열의 묘지 앞에서 과거사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왕은 묘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담한 표정으로 진심으로 과거를 뉘우치기까지 했다.

이 모습이 곧 카메라로 촬영되어 대대적으로 방영이 되었다.

이 순간, 이 순간을 대한민국 국민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물론 당장 일어난 일본의 재해는 그들에게 가혹한 시련이지만, 한국인은 한국인대로 일본에 의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앓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조금이나마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다른 반응이 불거졌다.

일왕의 퇴진 운동이었다. 일찍이 일본에서는 옛 봉건시대의 잔재인 군주 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는데,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이다 보니 어디까지나 소수에 그치고 말았다.

한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미 세계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제 수준으로 자신감이 많이 상실된 상태에서, 나라를 거의 몰락 시킨 쓰나미, 결정적으로 한국의 현충원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일왕의 모습을 보며 일본 민족주의 세력은 힘을 잃고 와해하였다.

반면 소수 세력이었던 일본 좌익이 힘을 얻었는데, 그들이야말로 오래전부터 일왕을 폐위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

결국, 2033년 12월.

일왕은 폐위되었다.

폐위하는 것을 넘어 헌법의 개정으로 군주 제도 자체가 사라졌다.

즉 일본에서 더 이상 왕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일본 역사상 마지막으로 남은 127대 왕은 퇴임과 함께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후회는 없습니다, 슬픔도 없습니다. 언젠간 겪어야 할 일이라고, 홀로 조심스레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제 왕이 아니지만, 여전히 일본 국민입니다. 일본 국민으로서 일본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선 이웃 나라이자 이번 우리나라의 위기 극복에 큰 힘을 준, 대한민국과 더 가까워져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에 반해 일본은, 많이 뒤처져 있습니다. 마치 고대 선진 국가였던 한반도의 백제로부터, 우리 일본이 많은 것들을 물려받은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일찍이 일본의 125대 왕이 고대 일본 왕은 백제계라고 밝히는 등 일본은 과거사를 반성하고 한국과 더 가까이 지내야 한다고 했는데, 이번 발언은 이와 같은 말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러고서 마지막 왕은 일본이 현실을 직시해야 하며, 한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하고서는, 끝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의 정우현 대통령 님께, 특별히 감사를 표합니다. 존경하는 대통령 님 덕분에 우리 일본이 이렇게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언젠가 평범한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방문하게 된다면 꼭 한 번 대통령 님을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전직 왕이었던 한 일본인이 카메라 앞에서 계속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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