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정우현과 가족, 그리고 엘라 로렌츠는 청담동 자택에서 한껏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정우현은 기뻤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든, 밖에서 무슨 일을 하든, 집에서는 변함없이 아버지 어머니의 아들이고, 여동생의 오빠였다.
그 사실이 큰 힘이 되었다. 어찌 보면 그가 이뤄 온 대단한 일들을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거기에 또한 엘라가 있었다.
엘라는 이제 한국에 정우현이 없을 때면, 정우현이 시키지 않았는데도 자진해서 정우현의 부모를 찾아가 그들을 돌봤다.
그러고 싶어서 그랬다. 엘라에게 정우현의 부모는, 살아생전 그녀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따뜻한 애정과 관심을 주는 윗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즉, 정우현의 부모는 실제 부모처럼 엘라를 아꼈다. 그들 또한 엘라가 딸 같고 한편으로는 며느리 같았다.
그래서 정우현이 없이도 엘라와 정우현의 부모는 함께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줬다. 특히 그들 모두 평소 정우현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누며 즐거워했다.
동생도 그런 엘라가 무척 좋았다.
원체 편견을 갖지 않고 사람을 좋아하는 동생에게 엘라는 똑똑하고 마음씨가 넓은 언니였다. 특히 엘라가 우 재단의 관리자로서, 빈곤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걸 동생은 몹시 존경하고 마음에 들어 했다.
동생 또한 비슷한 마음으로 약사가 되기를 꿈꾸며 제약 회사의 연구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약을 만들어 사람들을 치료하고자 하는 것과 엘라가 재단에서 하는 모든 일의 근본은 결국 같았다. 선행이었다.
이렇듯 엘라와 정우현네 가족은 아주 잘 맞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 정우현이, 엘라가 너무도 편안하고 익숙하게 가족과 함께하는 것을 보고 그리 놀라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하, 이 많은 음식을 대체 언제 한 거예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온갖 음식이 차려져 있는 식탁을 보며 정우현이 말했다.
그것도 갈비찜에 오징어 볶음, 그리고 계란말이에 열무김치 등 온통 한국 요리였다.
“아, 좋다, 한식!”
어머니 황희진은 보통 아들이 한국에 오랜만에 오면 이렇게 한식을 차려 줬다.
정우현이 집에만 오면, 외국에서는 좀처럼 먹을 수 없는 한국식 집밥을 몹시 찾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많이 먹어라, 우현아.”
마치 직접 요리한 듯 자랑스럽게 웃으며 한마디 하는 아버지다.
이에 정우현이 숟가락을 들고 곧장 외쳤다.
“예, 잘 먹겠습니다!”
하고 그가 먼저 먹는 건 온갖 고기와 해물 등 값비싼 음식들이 아닌, 된장찌개였다.
어머니의 된장찌개야말로 그에게 있어 세계 최고의 음식이었다.
“와, 이 맛 진짜…….”
역시나 한 숟가락 먹고, 말을 잇지 못하는 정우현이다.
가족들은 물론 엘라도 숨죽이고 그런 정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우현이 곧장 된장찌개를 몇 번 더 먹고는 크게 말했다.
“역시 어머니표 된장찌개예요! 세상 그 어떤 음식도 뛰어넘을 수 없는!”
“……하하하하하하!”
한데 이상하게도 가족들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정우현이 의아해서 그 모습을 그저 바라봤다.
가족들은 웃고, 엘라 또한 뭐가 그리 기쁜지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한껏 미소 짓고 있다. 심지어 얼굴까지 빨개져 있다.
“……왜요?”
이에 정우현이 부모를 보고 웃었다.
“왜 웃는 거예요, 아버지 어머니?”
“아들!”
어머니가 크게 말했다.
“예?”
“그거 엄마가 만든 된장찌개 아니야!”
“……예?”
정우현은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30여 년, 아니 전생의 세월까지 하면 60년 동안 먹어 봤던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손맛.
“엄마가 만든 거 아니라고!”
“……그러면요?”
계속해서 어머니를 의아한 눈빛으로 보는 정우현의 모습에, 어머니가 재밌다는 듯 다시 한번 웃고는 한순간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바라봤다.
엘라였다.
여전히 부끄럽다는 듯 미소만 짓고 있는 엘라를 바라보고 어머니가 말했다.
“그거 엘라가 한 거야.”
“……네?”
“엘라가 끓인 된장찌개라고. 아들 없는 동안, 엄마가 가르쳐 줬어.”
“……와.”
정우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단 0.000001%도, 어머니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요리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하하, 실망인데?”
어머니가 계속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들, 엄마 요리도 못 알아보고?”
“아아, 어머니…….”
하고 말을 잇지 못하는 정우현에게 어머니가 계속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래도 성공이다! 역시 엘라가 잘할 줄 알았어!”
“……어머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그렇죠.”
엘라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에이, 잘 가르쳐 준다고 다 잘하나. 여전히, 우리 애기는 잘 못 하는걸?”
동생 정다현의 얘기였다.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동생에게 요리를 가르쳐 줬다. 하지만 동생은 잘하지 못했다. 요리에는 취미도 재능도 없었기 때문이다.
“엘라가 진짜 엄청 잘한 거야! 심지어 외국인인데도 이렇게 한국 요리를 잘한다는 건, 엘라야, 네가 엄청난 요리사라서 그렇다!”
“……아니에요.”
하면서도 엘라는 몹시 기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우현을 위해 한국 음식을 배워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엘라였다. 그래서 어느 날 정우현의 어머니인 황희진에게 이와 같은 뜻을 알렸고, 어머니는 몹시 기뻐하며 즉시 요리를 가르쳐 줬다.
엘라가 요리를 잘한다는 건 금세 확인됐다. 어머니가 무슨 요리를 가르쳐 주든 뚝딱 만들어 냈다. 심지어 창의적으로 요리를 재해석해, 어머니 이상으로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가르쳐 준 요리가 바로 이 황희진표 된장찌개였다.
“엘라야, 우리 우현이는 세상 온갖 진미를 다 먹어도, 내가 만든 이 된장찌개를 가장 좋아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엘라 앞에서 된장찌개를 준비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잘 배워야 해. 된장찌개는 정직한 요리야. 무언가를 조금만 더하거나 덜해도, 맛이 바로 변하지. 그리고 우리 우현이가,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하며 요리를 직접하고 설명하는 어머니와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된장찌개의 모습을 엘라는 말 그대로 머릿속에 그대로 저장했다.
정우현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기에, 그 어떤 음식보다도 잘 해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잘 만들어야 해. 솔직히 다른 음식 필요 없고, 이 된장찌개 하나만 잘해도, 우리 우현이한테 평생 사랑받을 거다.”
그러면서 엘라를 바라보는 어머니다.
사랑받을 거라는 말에 엘라는 얼굴이 또 빨개졌다.
사실 어머니는 잘 알고 있었다. 엘라가 아들을 몹시 좋아한다는 것을.
그리고 다행히 어머니의 눈에 엘라는 몹시 예쁘고 좋았다. 그래서 이렇게 요리를 가르쳐 준 것이기도 했다.
“……와아.”
정우현이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된장찌개를 몇 숟가락 더 먹고는 말을 이었다.
“……믿을 수 없네요. 아무리 먹어 봐도, 파천일류, 황희진표 된장찌개인데.”
“하하하하, 그게 뭐냐, 우현아, 너 요즘 무협 소설 읽냐?”
아버지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냥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세계 최강이라 이런 이름을 붙여 봤어요.”
“하하하하!”
온 가족은 물론, 엘라 또한 몹시 기뻤다.
아니, 엘라가 가장 기뻤다.
완전하게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의 일원이 된 것만 같은 이 소속감.
이야말로 천애의 고아인 엘라가 오랫동안 꿈꾸던 것임을 뒤늦게 스스로 알아차리고 있다.
“대단합니다, 엘라.”
정우현이 엄지손가락을 올리고서 말했다.
“파천일류 황희진표 된장찌개의 2대 계승자가 되겠군요.”
* * *
즐거운 식사 후 정우현의 방.
정우현이 머뭇거리는 엘라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왔다.
엘라가 정우현에게 방을 구경하고 싶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한데 어쩐지 엘라가 방 입구에서부터 들어가기를 주저하기에, 정우현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안으로 데려왔다.
엘라는 긴장한 듯 어디에도 괜스레 시선을 두지 못했다.
“하하, 왜 그래요, 엘라.”
“……아아.”
엘라가 소리를 내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남자의 방에 들어오는 건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우현 님.”
“하하, 그런가요? 뭐, 별거 없습니다!”
하고는 정우현이 말을 이었다.
“그냥 그렇죠, 뭐. 컴퓨터에 책상에, 책이 몇 권 있고.”
그러고서 정우현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엘라의 손을 잡고 자신의 침대에 앉혔다.
“아…….”
엘라는 완전히 당황하면서도 힘겹게 생각했다.
냅다 바로 침대로 이끌다니.
정우현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거침없이 진도가 빠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두근두근.
한순간 세상이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로 가득해졌다.
시야가 흐릿해지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그러고서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 순간 그저 정우현에게 모든 걸 맡기기로 결심했다.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러기를 몹시 갈망하고 있었다.
“…….”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정우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라?”
“…….”
“엘라?”
엘라가 천천히 눈을 뜨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정우현이 시야에 들어왔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프세요?”
“……아.”
엘라는 당황했다.
정우현이 순간 엘라의 볼에 자신의 손등을 대고서는 말했다.
“뜨겁군요! 제 방에 들어올 때부터 어딘가 불편해 보였는데, 역시 열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아아, 아니에요.”
숨고 싶었다. 엘라는 너무 부끄러워서,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혼자 별의별 상상을 한 자신이 발칙하고 한편으로는 못나게 느껴졌다.
“정말입니까? 얼굴이 이렇게나 뜨거운데.”
“……괜찮아요!”
결국, 엘라가 정우현의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황급히 방 밖으로 나가며 어색하게 말했다.
“어, 어머님을 도와드려야겠어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엘라, 일은 다했잖아요! 설거지도 하고!”
하지만 방 밖으로 사라지는 그녀다.
정우현은 아쉬웠다. 모처럼 자신이 이 방에서 어떻게 생활하고 자라났는지, 어떻게 푸앵카레 추측을 입증하고, 어떻게 CIA 내부망을 해킹해 9.11테러를 막아냈는지, 그런 것들을 잔뜩 얘기해 줄 참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쨌거나 오랜만의 집은 여전히 포근하고 아늑했다.
그렇게 모처럼 자신의 침대에 눕자, 스르르 눈이 감겼다.
* * *
시간이 지나 2025년, 미국 뉴욕 유엔 본부 총회의장.
정우현 사무총장이 연단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회원국 여러분, 최근 국제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롭고 좋은 만큼 저는 오랫동안 작정했던, 한 가지 세계적 숙원 사업을 시작해 볼까 합니다.”
“…….”
사람들이 정우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바로, 아프리카입니다. 아프리카의 오랜 아픔과 어려움을 직시하고, 함께 풀어 나가야 할 때가 됐습니다.”
이에 즉각 유엔 회원국인 아프리카의 수십 개국 대표가 정우현을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모든 면에서 세계는 발전했고, 굶주림은 옛 고대의 얘기가 된 지 오래됐습니다. 한데 그럼에도 역사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아프리카입니다.”
하고서 정우현이 각국 대표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리카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계 연합인 유엔이 지금 여기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