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장.
중국 대표가 러시아 대표를 보고서는 크게 외쳤다.
“….”
러시아 대표는 잠자코 있었다.
“대표님!”
그럼에도 중국 대표가 계속 크게 소리치자, 러시아 대표가 다시 말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러시아는 안보리 상임 이사국 지위를 포기하겠습니다.”
“왜요, 왜!”
“….”
러시아 대표는 다그치는 중국 대표에게 대답하기는커녕 바라보지도 않으며 그를 완벽히 무시했다.
안보리 국가 중 유일한 우방이자 가장 가까웠던 중국과, 한순간 거리를 두며 작정하듯 선을 긋는 행동이었다.
그러고서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사무총장인 정우현을 바라봤다.
이에 중국 대표가 새빨개진 얼굴로 역시 정우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제 됐군요.”
정우현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말했다.
“오늘의 안전보장이사회의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대표들 또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러시아 대표도 천천히 일어났다.
오직 중국 대표만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씩씩거리며 계속 앉아 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수개월 전 사무총장실에서 정우현이 러시아의 새 대통령과 회담할 때였다.
정우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새 대통령에게 말했다. 러시아는, 안보리 상임 이사국 지위를 내려놓는 게 좋겠다고.
이에 새 대통령은 당황했다. 이미 우크라이나를 향한 러시아의 사죄와 배상 그리고 크림반도까지 반환하기로 했는데, 상임 이사국 자리까지 포기하라고 하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무리 혁명으로 탄생한 새 민주 정부의 대통령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한데 정우현이 그런 분위기를 눈치채고 곧장 말했다.
“대통령님.”
“…예?”
“지금 현재, 유럽 최대의 강국이 어느 나라입니까?”
정우현의 질문에 러시아 대통령이 별생각도 않고 바로 답했다. 명백했기 때문이다.
“독일이요.”
“맞습니다. 안보리 상임 이사국인 영국도 프랑스도 아닌, 독일이, 현재로서 유럽 최대의 강국이자 리더죠. 대통령님도 어떻게 그리됐는지 아시죠?”
“….”
잠자코 있는 새 대통령에게 정우현이 빠르게 말했다.
“2차 대전 패배 후 독일은, 전쟁의 원흉으로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죠. 우선 동쪽의 영토 일부는 소련과 폴란드에, 서쪽의 영토 일부는 프랑스에 헌납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남은 영토도 반으로 갈라진 것은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요. 또한 오랜 라이벌인 영국과 프랑스가 상임 이사국 지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도 아무 말할 수 없었습니다. 즉 패전 국가로서 자국의 비참한 지위를 받아들여야 했죠.”
여전히 러시아의 새 대통령은 아무 말을 않으면서도, 정우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했다.
“그런 독일이 어떻게 현재 영국과 프랑스를 압도하는 유럽의 리더가 될 수 있었습니까?”
하고서 정우현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성했기 때문입니다. 반성하고 끊임없이 사죄하고, 그들은 서서히 국제적 신뢰를 회복했습니다. 그렇게 주어진 책무를 다하는 것을 넘어, 자발적으로 앞서 유럽의 이런저런 일을 챙김으로써, 리더로 인정받고 급기야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됐습니다.”
“음.”
정우현의 말에 새 대통령이 무언가를 조금이나마 깨달은 짧게 입소리를 냈다.
“이에 반해 일본을 보십시오. 같은 2차 대전 전범 국가이지만, 독일과 비교했을 때 국제 사회에서의 입지는 훨씬 낮습니다. 비록 일본은 뛰어난 기술력으로 일찌감치 경제 강국이 됐지만, 딱 거기까지가 그들의 한계였습니다. 왜냐, 그들은 반성하지 않거든요.”
그러고서 정우현이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명백히 아시아 국가이지만, 독일과 달리 여타 주변 국가와 가깝지도 않을뿐더러 인정 또한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 반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한 그들의 성장은 20년 전 이래 멈춰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시대에, 성장하는 데 있어 이웃 국가와의 협력은 필수불가결하니까요.”
하고 정우현이 새 대통령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앞으로 어떤 길을 가겠습니까? 같은 패전 전범 국가였지만, 현재로서 새로운 리더로 거듭난 강대국 독일의 길을 따르겠습니까, 혹은 여전히 주변 국가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채 경제 침체에 허덕이고 있는 일본의 길을 따르겠습니까?”
답은 명백했다.
러시아의 새 앞날을 꿈꾸는 지도자로서, 그녀가 택해야 할 길은 오로지 하나였다.
“…반성하고 끊임없이 사죄하겠습니다. 그렇게 러시아를, 글로벌 리더로 만들고 싶습니다.”
“예, 그런 의미에서 상임 이사국 지위를 포기하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 러시아의 침략 전쟁 및 패배에 따른 논리적 결과이자 정당한 의무입니다. 그렇게 첫 단추를 잘 끼움으로써 러시아는 새로운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못을 박는 정우현의 말에, 새 대통령이 잠시 생각하다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이것으로 러시아는 상임 이사국 지위에서 스스로 내려왔고, 국제 사회는 서서히 평온한 모습을 찾아갔다.
* * *
즉각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국가는, 유엔 사무총장인 정우현의 뛰어난 외교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극찬하고 나섰다.
침략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빠르게 압박해 위기에 빠트리고,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러시아 국가 원수를 만나 완전 범죄로 남을 수 있었던 암살 시도를 폭로해 그를 몰락시키는 한편 전쟁을 종결시키고, 전후에는 놀랍도록 완벽하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투표를 이끌어 성공적으로 민주 정부를 탄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우현은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유엔 차원에서 러시아의 새 정부를 계속해서 돕고 있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서서히 안정을 찾고, 활기를 띠게 됐다.
또한 러시아를 안보리 상임 이사국 지위에서 스스로 내려오게 함으로써, 패전 이후 국제 사회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러시아의 상임 이사국 지위는 국제적 딜레마이자 유엔의 구조적 모순이었다.
엄연히 세계 평화를 위해 설립된 유엔이, 전쟁 범죄를 일으킨 한 국가의 지위를 제한할 수 없다는 건, 이렇다 할 방책이 없는 크나큰 문제였다. 하지만 정우현이 앞장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엘라를 제외한 세상 그 누구도 모르지만, 정우현이 아주 오랜만에 어나니머스가 되어 러시아를 장악한 군부의 폭주를 저지하고 통제권을 빼앗음으로써 핵전쟁의 위기 또한 막을 수 있었다.
실상 세상 사람들은 어나니머스라는 한 해커가 혜성처럼 출현해 러시아 군부를 무력화시켰다는 사실만 알았지, 그 해커가 유엔 사무총장인 정우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었다.
다만 오직 미국만이 자국의 정보부인 CIA의 오랜 침투 기록을 확인하며, 9.11테러를 사전에 예방한 어나니머스와 이번 러시아의 군부를 장악한 어나니머스가 같은 사람인지 비밀리에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우현은 또한 모든 흔적을 완벽히 남기지 않았기에, 미국의 추적을 소용없이 만들었다. 두 사건의 어나니머스가 동일인이라고조차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사전에 완벽하게 정보를 차단했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과 국제 사회의 흐름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세력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은 러시아의 패전부터 혁명, 그리고 상임 이사국 지위 포기까지 그 모든 것 하나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함께 미국과 대적하는, 오랜 우방을 잃음으로써 중국의 영향력 또한 약해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들은 정우현의 유엔 사무총장 취임을 찬성한 과거 자국의 결정에 관해, 뒤늦게 몹시 후회했다.
안보리 상임 이사국인 중국으로서는 반대표를 행사해 얼마든지 정우현의 취임을 막을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정우현이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자유와 평화에 힘을 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실상 중국의 수뇌부는 과거 정우현의 사무총장 후보 추천 시, 다각도로 그를 분석했다.
온화한 성격에 논란의 소지가 될 만한 말은 일절 하지 않고, 결정적으로 각종 영토 분쟁이나 정치 개입에 관한 발언은 극히 꺼린다.
따라서 그들은 중국과 러시아를 한 축으로 한 세력과 미국을 포함한 자유 진영과의 갈등에 관해서도, 정우현이 입을 다물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사무총장이 되자마자 광폭의 행동을 보이더니, 이번 러시아와 관련해 거의 모든 일을 혼자서 이뤄 내고 국제 질서를 재편했다.
이런 상황에 중국은 정우현을 달리 볼 수밖에 없었다.
* * *
시간이 흘러 2024년.
러시아는 완전한 안정을 되찾고, 우크라이나는 빠르게 피해를 복구했다.
특히 우크라이나는 정우현을 자국의 대통령 이상으로 칭송하게 됐는데, 러시아의 침략 전쟁을 해결한 이가 정우현 사무총장임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정우현은 모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국에 왔다.
“안녕하십니까.”
공항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사무총장인 그를 맞이했다.
유엔 사무총장은 국가 원수와 지위가 같기에, 정우현은 대한민국 대통령과 같은 격이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정우현이 모처럼 싱긋 웃으며 대통령과 악수를 했다.
“바쁘실 텐데, 어떻게 이렇게 오셨습니까?”
라는 말을 시작으로 대통령이 이런저런 말을 했다.
그러고는 정우현을 따르며 말을 이었다.
“곧장 용산으로 가시지요.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하고 오찬을 권유하는 대통령의 말에 정우현이 즉각 답했다.
“아니요.”
“…예?”
“대통령님 청와대는 내일 가 보겠습니다. 오늘은 급히 가 볼 데가 있어서요.”
정우현은 한국에 입국 전 미리 그의 일정을 청와대에 알렸다.
한데 청와대 직원의 실수로 정우현의 일정이 대통령실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와 같은 사달이 났다.
“…아아, 그렇습니까?”
대통령이 당황하며 되물었다.
“예, 내일 뵙겠습니다, 대통령님!”
하고 정우현이 인사를 한 뒤 앞으로 나아갔다.
대통령과의 만찬을 뒤로하고 가는 선약(先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약.
“우현아!”
“아드으으을!”
바로 가족이었다.
가족이 공항에 나와서 정우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정우현은 오랜만에 인류사 가장 빠른 속도로 가족에게 달려갔다.
“…우와아.”
어머니가 입을 크게 벌리고 놀랐다.
“진짜 엄청 빠르다, 우리 아들!”
“하하하하, 어머니, 보고 싶었습니다!”
하고서 그가 어머니를 번쩍 안아 들었다.
“어머, 어머어머!”
어머니는 놀라면서도 기분이 좋아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잘 왔다, 우현아.”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고 역시 웃으며 말했다.
정우현은 어머니를 안고 네 바퀴 정도 연속으로 빙빙 돌고서는 자리에 멈추고서 그제야 주위를 둘러봤다.
그곳엔 젊은 여자 두 사람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정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과 엘라였다.
“…오빠.”
“하하하, 다현아, 보고 싶었다.”
하고서 정우현이 동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우현 님.”
그러고는 자신을 부르는 엘라를 또 바라보며 밝게 말했다.
“엘라도 참, 보고 싶었습니다.”
이에 엘라가 붉게 물든 얼굴로 살며시 미소 지었다.